"...어떡하지, 야에?"
2교시와 3교시 사이의 쉬는 시간, 나 이치노세 하즈키는 진지한 얼굴로 친구인 요모다 야에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멍하니 날 바라보던 야에는 천천히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밀어낸다.
"그래, 하즈킷치도 수학 숙제를 깜빡한 거구나!! 근데 평소에 숙제를 안 해오는 나랑은 달리 성실한 하즈킷친 숙제 노트를 집에 두고 온 걸 테니까 나한테 시간벌이를 해 달라고..."
"아니, 숙제는 다 했는데. 거기다 두고 오지도 않았어."
"뭐!? 그럼 당장 빌려주라! 야~ 역시 친구는 잘 사귀고 봐야 된다니깐~"
양손을 싹싹 비비면서도 미소를 띠며 달려드는 야에. 꼭 상전에게서 하사품을 받는 하인처럼 헤헤거리며 양손으로 노트를 받아 빛과 같은 속도로 숙제를 베끼기 시작했다.
친구 사이긴 하지만 기브&테이크란건 중요한 것. 이것도 다 야에가 숙제를 다 베끼고 나면 내 문제에 대한 상담을 하도록 묶어두기 위한 것이다.
까닭도 없이 빌려주는 게 아니라구.
여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야에 곁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베끼면서 말해도 괜찮으니까 내 고민 좀 들어줄래?"
"어떤 거? 아, 가슴 사이즈가 점점 커져서 곤란하다고? 그렇겠지~ 야요이 언니는 엄~청 크니깐~ 가슴은 유전이라고들 하니깐~"
여자가 그런걸 말하면 그렇지 않나? 싶은 말을 쏟아내면서 야에는 노트를 베껴나갔다.
난 '그런 것도 고민거리가 돼?'하고 생각하며 말했다.
"지도실의 상담원 선생님한테도 말 못할걸 야에한테 할 리가 없잖아. 당연히 자전거 이야기지."
"호오, 그럼 대체 뭔데 하즈킷치? 전동변속의 도입에 대해서? 아니면 아직 튜블리스는 인류에게 이른지에 대해서? 그것도 아니면 세대를 풍미한 카본 핸들과 에어로 보틀 케이지는 어떻게 됐는가에 대해서? 아님 그 비슷한 즐거운 고민??"
"히나코 언니가 같이 라이딩 가자고 했어."
내 어조는 확 가라앉아 있었다.
야에가 얼굴을 들었다. 두 눈에 "?"마크가 떠오른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본다.
의문 중 하나는 '히나코 언니는 대체 누구?', 다른 하나는 '그게 왜 고민거리인거야?'라는 것.
"히나코 언니라...그러니까..."
"야에도 전에 한번 봤었잖아? 사이죠 히나코 언니. 지난번에 요코스카에 도착했을 때 베르니 공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우리 언니 친구..."
내 설명에 야에는 샤프로 통, 하고 손바닥을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카레라 피브라 타던 그 작은 언니! 피브라 좋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단 말이지~ 보면 뽕이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그런 프레임이란 말이지!"
작다는 건 본인이 되게 신경 쓰는 건데 말이지. 야에가 히나코 언니 앞에서 그 말은 안한 게 다행이다. 동시에 로드 프레임과 얼굴을 한 세트에 기억하는 야에는 진짜 자덕이구나 싶었다.
히나코 언니가 누군지 기억해낸 야에는 음음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다시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하즈킷치의 언니 친구가 라이딩가자 한 게 왜 고민거리가 되는 거야?"
"히나코 언니니까! 히나코 언니가 나랑 같이 자전거를 타자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구! 분명 뭔가 꿍꿍이가..."
야에는 한손을 들고 '잠깐만'라고 나를 말려 세웠다.
"뭔가 팍 하고 안 오는데... 요코스카에선 평범하게 이야기를 하던 거 같던데. 하즈키칫치랑 히나코 언니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야 히나코 언니랑 나는 옛날부터..."
"아니, 하즈킷치랑 난 중학교 때부터 알게 된 사이라고? 근데 옛날 이라니 난 모른다고. 알아?"
야에는 곤란하단 얼굴로 말했다.
나는 미안함을 느끼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네. 야에는 히나코 언니와 얼굴만 본 사이니까 잘 모르겠구나."
해서 간략하게 히나코 언니와 나, 그리고 언니의 관계를 설명했다.
히나코 언니와 언니는 동갑, 즉 나와는 나이 차이가 한참 나기 때문에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두 사람은 소꿉 친구였다. 나는 언니를 동경하고 있었기에 까마득한 나이 차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니의 소꿉친구인 히나코 언니가 부러웠다.
히나코 언니 입장에서도 난 친구의 귀염성 없는 동생인지라 자연스레 서로가 서로에게 어색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야에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즈킷치, 히나코 언니한테 뭐 나쁜 짓이라도 했어?"
"모르겠어…… 그치만 안 좋은 말을 항상 했었어. 옛날부터 히나코 언니한테 귀염받아본 기억이 없거든."
나에게 히나코 언니란 사람은 항상 언니와 함께 멀리까지 나가는 사람이다. 나를 상대해주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가 없지. 그런데도 며칠 전, 갑자기 그 히나코 언니가 나에게 라이딩 초대를 한 거다.
히나코 언니의 집인 중화요리점에 나와 언니가 초대받았다. 그때는 언니와 함께하는 외식이란 생각에 들떠서 그만 허를 찔리고 말았다. 차이나 드레스 차림의 히나코 언니는 테이블에 와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에 보니까 야요이랑 재미 좀 본거 같던데? 그러면 다음 일요일, 나랑 같이 자전거 타는 거다?'
"같이 라이딩이라. 잘 됐잖아?"
뭘 고민 하냐는 얼굴로 야에가 말했다. 남은 숙제를 베끼려고 열심이던 야에는 서서히 손이 둔해지더니 결국 고개를 들었다.
"……그 히나코 언니의 피브라를 보고 생각 난 건데, 설마 엄청 잘 타는 사람?"
"300Km나 400km를 달리면서 어디서 잘 지 언니랑 이야기하는걸 들은 적이 있어."
"그럼 하즈키한테 라이딩 가자고 할 적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어?"
"웃고 있었어."
그 말을 하니 히나코 언니의 '크흐흐...'하는, 왠지 모르게 에코 효과가 들어간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그때 야요이 언닌...어땠어?"
"'언니랑 같이 가는 거면 갈래요'하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거 좋네. 하지만 히나코랑 둘이서 재밌게 보내고 와'라고 했었어...그 말을 듣고선 더 뭐라 할 수가 없었어."
"그면 완전 찍혔네, 하즈킷치."
거친 말을 하는 야에였지만 말이랑은 달리 화가 난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언니랑 히나코 언니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빙긋이 웃고 있던 건 설마...저녁 초대를 핑계로 날 유인한 뒤, 도망갈 곳을 막고 약속을 성사시킨 게 성공해서 그런 거였나?
사실 그 상황까지 와서 그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한테 이런 상담을 한다는 건 그 부탁을 거절했단..."
"아니. 그걸 못해서 주말에 가야 해."
언니가 보는 앞에서 '싫어요!'라고는 절대로 말 못한다. 거기다 요코스카 때의 빚도 있고, 저녁식사에도 초대받았는데 무례하게 굴 수가 없다. 야에는 샤프의 뒤꽁무니를 찰칵거리며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면 그거구만. 주말은 '느긋하고 폭신폭신한' 라이딩이겠네."
"오손도손하고 즐거울 거 같은 말이긴 한데, 왠지 모르게 싫은 느낌이 드는 게 이상해."
"'느긋하고 폭신폭신한'거라, 그러고 보니 이 일대에선 그게 그렇게 불리고 있었지..."
"그거라니 대체 뭔데?"
야에는 먼 곳을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야비츠 고개"
"거긴 느긋하지도 폭신폭신하지도 않잖아!? 죽을 거야. 죽어도 몇 번이나 죽는다고 야비츠는!!"
아츠기에서 출발 하자마자 어퍼컷처럼 급상승하는 악마 같은 업힐의 어디가 '느긋하고 폭신폭신'한 거지? 그렇게 비명을 지르는 내게 야에가 '쉿!'하고 손가락을 들이댔다.
"100km 단위로 달리는 장거리 라이더가 웃는 얼굴로 같이 라이딩하자고 권유하면서 우후후 아하하한 곳에 포터링 할 리가 없잖아! 히나코 언닌 분명 밉살스럽게 구는 하즈키에게 복수를 하기위해서 '느긋하고 폭신폭신한' 라이딩을 시키려는 게 분명해!"
"으으으..."
"그리고 직접 대면해가면서 불러냈다는 것부터가 그거라고. '으흐흐흐, 선후배 사이의 상하관계가 무엇인지 몸에다 깊게 새겨주겠어'라는 냄새가 팡팡 풍기잖아?"
야에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나의 우려는 근거가 충분하다.
히나코 언니와는 한 번도 같이 자전거를 타 본적이 없고, 평소에도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다. 각력이 나보다 까마득하게 강한 히나코 언니와 단둘이 라이딩이라니, 분명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초주검이 되서 돌아오게 될 거란 불길한 예감밖엔 들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무작정 따라갈 바보는 없다. 도망갈 길이 없다면 적어도 도와줄 아군을 늘리는 게 좋다. 그리고 나한테 그런걸 부탁할 수 있는 상대는 한사람뿐인 것이다.
"그렇게 됐으니까 야에, 일요일에 시간 되면 나랑 같이 가자!"
"어, 어어어어어어??"
OK~하고 즉답할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야에는 곤란하단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히나코 언니는 둘이서 라이딩 가는걸 원하는 거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근데 거기 내가 '안녕하세요! 하즈키 친구에요~ 갑작스럽지만 저도 같이 갈게요~'하고 당돌하게 끼어드는 건 얼굴 두껍기로 정평이 난 나라도 부담이 된다고."
야에는 숙제를 다 베낀 노트를 돌려주며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물론 야에의 사정도 이해가 간다. 그래도 나는 야에에게 매달렸다.
"그건 내가 어떻게든 이야기 할 테니까..."
"사지마에서 1파운드 버거를 가르쳐준 거 히나코 언니라면서. 그럼 나도 언니한테서 받은 게 있는 건데 언니의 데이트를 방해한다니 예의가 아니지."
"야에. 히나코 언니랑 난 그냥 라이딩 가는 거지 데이트 같은 게 아니라구."
"뭐? 그럼 하즈킷치가 그동안 나랑 한 건 데이트가 아니란 거야!? 내 순정은 하즈킷치한텐 그저 허접쓰레기에 불과한 거야??"
그렇게 소리치면서 책상 위에 털썩 엎드리는 야에.
주변의 남자애들이 '요모다랑 이치노세가 사랑싸움을 하는 거야?', '아냐 바보야!'하고 웅성거리는 거엔 이제 화를 낼 마음조차 생기질 않는다.
"뭐, 농담은 이쯤 하고. 내가 직접 권유받은 것도 아니고 둘과 관계가 깊은 야요이 언니마저도 응원해주고 있는데...좀 그렇잖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기지개를 켜며 남의 일 같이 말하는 야에. 아무리 봐도 영 반응이 시원찮다. 이런 야에를 움직이게 하는 건 꽤 어렵다. 거기다 수업 종까지 울려 버렸다. 타임 오버.
노트를 들고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가는 내게 야에는 느긋하게
"뭐, 너무 걱정하지 마. 하즈킷치. 즐기고 오라구. 자전거쟁이들한테 전해져 내려오는 응원의 말을 해 줄게!"
"뭔데?"
"'느긋하고 폭신폭신한' 라이딩을 하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사상 최초로 '느긋하고 폭신폭신한' 라이딩을 하다 죽은 사례로 이치노세 하즈키란 이름을 올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나는 당번의 차렷, 경례소리를 들었다.
주말에 비 안 오려나...하는 생각도 했지만 비가 왔는데도 중지가 안 된다면 더 큰일이다. 현관을 나설 때부터 비를 맞는데다 11월의 추운 날씨 속을 흠뻑 젖은 채로 달린다니 전혀 내키질 않는다. 다행?히도 일기예보로는 토요일은 흐리지만 일요일은 맑음.
토요일 밤에 창고에서 언니가 즐거운 듯이 데로사의 휠을 교체하거나 라이트를 잔뜩 다는걸 보고 히나코 언니와 언니가 대체 무슨 계획을 한 건지 불안해졌다. 원군으로 야에를 부른다는 계획도 좌절된 상황.
애당초 히나코 언니가 날 지명한 상황인데 내가 멋대로 참가자를 늘린다니 실례도 그런 실례가 없다. 그래서 전날까지 야에와 톡을 주고받으면서도 도저히 와 달라고 할 수 없었다.
아니, 대체 히나코 언니는 왜 나랑 같이 타고 싶다고 했을까? 히나코 언니는 '언니와 같이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내 소망은 분에 넘치는 망상이라 생각해서 엄청난 속도로 업힐을 끝없이 올라 '언니의 파트너는 바로 나다!'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피해망상에 가까운 이 상상도 히나코 언니니까 정말 그럴 것도 같다는 게 무섭다.
그러고 보니 일요일에 어디를 가는 건지도 물어보질 않았다. 미우라 반도나 쇼난 같은 평지가 메인인 곳이 아니라 탄자와 같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내가 그만이라 말 할 때까지 계속 뺑뺑이를 도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불안이 꼬리를 물고 나와서 잠들지 못하고 계속 뒤척였다.
약속 당일인 일요일. 날씨는 행운이라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쨍쨍 맑았다. 자명종이 찌르릉하고 우는 소리에 커튼 사이로 비쳐오는 약한 햇살을 보고 아아...하고 신음하는 나였다.
11월일라 집합은 9시. 미나미 간토라 아무리 따뜻하대도 겨울은 춥고 아침 일찍 나가는 건 힘들다. 반팔 차림으로 다녔던 10월이 그립다.
아침은 아버지와 같이 먹었다. 언니는 이미 외출한 모양이다. 빵을 조금밖에 먹지 못할 정도로 입맛이 없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걸 보고 아버지가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시간을 계산하면서 져지를 입고 클릿슈즈를 신은 뒤 현관을 나서자, 덮쳐드는 한기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추워..."
동계 웨어에 롱 글러브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도 난방이 되는 실내에서 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가니 그 온도차에 바로 소름이 돋았다.
언니의 창고에서 데로사를 꺼내왔다. 겨울이라 물통은 한 개지만 핸들 주위에 라이트가 왕창 늘었다. 해가 떨어지는 게 빠르니까 귀가가 늦을 때를 대비한 세팅인 모양이다. 물통은 있다 합류한 뒤 편의점에서 채우도록 하자. 보급을 하면서 겸사겸사 따뜻한 커피로 몸을 데우고 싶다.
컴프레셔로 타이어에 공기를 채운 뒤 가볍게 스트레칭. 이후 안장에 앉은 뒤 차고를 나와 그대로 집 밖으로 나섰다.
혼자 하는 외출은 외롭다. 언니와 미우라 반도를 같이 갔었지만 그 이후로 같이 라이딩을 간 적은 없다. 꿈을 한번 이루긴 했지만 매주 언니와 함께 로드를 탄다는 건 아직까지 먼 꿈속의 이야기다.
"아참, 립밤..."
도로에 나서기 전, 잠시 멈춰서 주머니에 넣어뒀던 립밤을 두텁게 발랐다. 건조한 겨울 공기는 입술을 갈라지게 만드니까. 월요일에 잔뜩 부르튼 입술로 학교에 가서 다른 애들에게 '무슨 일이야?'하고 질문받기는 싫다.
속도계의 시계를 보니 편의점에 도착하기까지 여유롭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자마의 낙타등을 달린다. 아직 몸에 열이 오르지 않아 페달을 밟아도 생각만큼 나아가질 않는 거 같다. 좀 길을 돌면서 워밍업을 하는 게 좋을까하다가도 지각해서 히나코 언니를 기다리게 하면 큰일이다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약속 시간 전에 편의점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아직 히나코 언니도 도착하지 않아서 안심했다. 편의점 유리창에 로드를 기대놓고 헬멧을 벗어 스템에 걸쳐둔 뒤, 물통에 넣을 생수를 사러 들어갔다. 계산대로 향하던 중, 자동문이 열리고 찬 바깥 공기와 함께 클릿슈즈 특유의 소리가 들려온다. 히나코 언닌가 싶어 문을 본 나는 눈을 비비고 들어온 상대를 다시 보고 말았다.
"야에!?"
"아, 밖에 데로사가 있어서 혹시 했는데 역시나...아 고기만두랑 호빵 주세요. 커피는 s사이즈로..."
나와 똑같이 동계 장비를 입은 야에는 옆 계산대에 서서 한가로이 쇼핑을 시작했다. 먼저 가게를 나오니 내 데로사 옆에 야에의 루이가노가 대져있었다.
멍하니 그걸 바라보는 내 곁으로 야에가 커피를 홀짝대며 섰다.
"아뜨! 뚜껑 덮어달랄걸 그랬나..."
"어떻게 된 거야, 야에?"
"아니~ 오늘은 나 혼자고 또 날도 좋으니까 달리고 싶어서 나온 거야. 그래서 여기서 보급하려고 했는데...혹시 여기가 히나코 언니랑 만나기로 한 곳이야?"
야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나. 야에는 편의점 봉투를 안장에 걸고는 커피를 꿀꺽꿀꺽 마셨다. 따뜻하고 맛있겠다...하고 생각하며 나는 야에에게 물었다.
"있잖아, 나 여기서 이시간대에 히나코 언니랑 만난다고 말 안했었지?"
"응, 안했었어. 오늘 어디서 우연히 만나진 않을까 생각은 했는데 그게 설마 초장부터일 줄은."
야에는 '마실래?'하고 커피가 든 종이컵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받으며 야에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무리 우연히 만났다지만 여기서 '그럼 내일봐~'하고 가는 건 뭔가 내키질 않는다. 그렇다고 히나코 언니와 같이 가는 게 무서우니 따라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좀 그렇다.
그렇게 고민하며 입 안에 들어온 온기를 느끼는 중에 차르륵, 하는 우렁찬 래칫 소리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드니 빨간색 피브라 -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특유의 프레임 - 에 탄 히나코 언니가 클릿페달에서 발을 빼는 게 보였다. 히나코 언닌 입 주위를 덮은 머플러를 벗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 기다리게 해서 미안. 워밍업 하려고 길을 돌아서 오려는데 오늘은 신호 운이 없는지 시간이 좀 걸려버렸어."
장갑을 낀 한손을 들면서 가볍게 인사하는 히나코 언니. 언니는 우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는 우리가 아닌 야에를 바라보았다.
"어라? 거기 루이가노 탄 애는...전에 요코스카에서 봤었지? 어...그러니까......"
"요모다 야에, 하즈킷치 친구에요! 오랜만에 뵙네요~"
한입 베어 문 호빵을 손에 든 채로 쾌활하게 인사하는 야에. 둘이서 갈 예정이었는데 왜 사람이 늘었냐는 무언의 질문에 나는 어떻게 설명을 하려 했지만 당황해서 횡설수설하고 말았다.
"그게 그러니까, 야에는 아침 라이딩을 하고서, 여기서 우연히 만나게 되서, 그래서..."
"뭐, 사이클리스트의 서식범위는 꽤 좁으니까 집 근처면 이렇게 자주 만나곤 하잖아요. 그러니까 전 이거 먹고 먼저..."
"요모다는 오늘 어디로 갈 거야?"
아직 안장에 걸터앉은 채로 히나코 언니가 물었다. 야에는 바로 답을 하지 않고 호빵을 입에 문 채 고개를 들고 태양의 반대편...서쪽을 보며 말했다.
"어...오늘은 탄자와 쪽으로 갈까 해요. 오늘 바람이면 에노시마쪽이 좋겠지만 돌아올 땐 역풍이 장난 아닐 테니까요."
"호오, 그거 참 신기하네. 나도 그쪽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갈래?"
빙긋, 하고 만면에 미소를 띠는 히나코 언니. 나는 놀라서 히나코 언니에게 말했다.
"히나코 언니!? 오늘은 둘이서 라이딩하자고 안 했었어요?"
"요모다는 하즈키 친구잖아? 그런데다 행선지도 같은데 따로 가는 건 재미없잖아, 안 그래?"
"그럼요! 하즈킷치, 같이 가도 되지?"
야에는 호빵을 입에 다 털어 넣은 뒤, 고기만두의 종이를 떼 내면서 물었다. 나는 당황하며 야에...가 아닌 히나코 언니에게 말했다.
"히나코 언닌 괜찮으신 거예요?"
"싫을 리가. 하즈키는 내가 그럴 거라 생각했어?"
히나코 언니의 눈은 고글 안에 숨겨져 있지만 분명 굉장히 의아해하는 눈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히나코 언니는 내게 본때를 보여줄 셈이니까 구원투수가 오는 건 별로지 않냐고 물어볼 수는 없다. 다만 히나코 언니가 먼저 야에를 끼워준 덕분에 한시름 놓긴 했다. 너무 예상외의 전개라 머리가 따라가질 않는다.
야에는 태평하게 히나코 언니 뒤에서 고기만두를 우물거리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지금이 찬스라고 권투 경기장에서 세컨드가 지시를 내리는 거 같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히나코 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히나코 언니. 전 야에랑 같이 가고 싶은데...괜찮아요?"
"그럼, 당연히 괜찮고말고. 요코스카서 얘 봤을 때 '아 얘랑은 마음이 맞겠다'싶었거든. 이렇게 기회 될 때 친해지는 건 일석이조 아니겠어?"
'아, 나보단 사키랑 더 맞을지도...'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히나코 언니. 이제야 안장에서 내린 히나코 언니는 피브라를 기대면서...내 손목께를 가리키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 하즈키? 그 편의점 봉투 갖고 갈건 아니지? 그랬다간 앞바퀴에 감겨서 공중회전 한 바퀴하고 땅에 처박힌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뭐 좀 사 올 테니까 그때까지 마무리해둬. 글고 너무 긴장 안해도 돼, 왜냐면..."
히나코 언니는 히죽, 하고 뭔가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느긋한' 라이딩이니까!"
"오오~ 역시 '느긋하고 폭신폭신한'거네요~ 재밌겠다!!"
히나코 언니와 야에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아하하하 하고 웃었다. 산으로 간다고 했으니까 절대 '느긋하고 폭신한'라이딩이란 말은 믿을 수 없다. 설마 야에는 내 편이 아니라 히나코 언니 편이었던 거야? 그렇게 불안감에 휩싸이면서 나는 물통에 생수를 채우며 출발 준비를 했다.
선두는 히나코 언니, 가운데가 나, 후미는 야에.
오늘 루트는 히나코 언니가 리드한단 모양이라 어딜 어떻게 갈 건지 전혀 모른다. 히나코 언니는 장거리 라이딩에 도가 튼 베테랑이라 나나 야에가 계획하는 것 보다는 낫겠지만...아무래도 행선지를 모른다는 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51번 국도를 타고 남쪽의 아츠기로 향하는, 몇 번이고 가본 길. 히나코 언니의 엉덩이를 따라 가니 뭔가 신선한 기분이 들었지만 또 그만큼 심경이 복잡했다.
언니 뒤를 달릴 때의 설레는 마음이나 점점 높아지는 일체감 같은 건 없었다. 그 대신 수신호를 잘못 읽어서 추돌한다거나, 노란불이 들어왔을 때 타이밍을 잘못 계산해 떨어지진 않을까하는 긴장감, 오늘 어떻게 되려나 하는 불안감만 들었다.
몸을 움직이고 있지만 계속 한기만 느껴진다.
바람막이를 입고 올걸 그랬나 하나다도 그렇게 중무장했다 체온이 너무 오르면 그것도 문제란 생각도 든다.
브라켓을 쥐고 있는 손끝이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리다. 감각이 없어질 정도 춥지는 않지만.
얼굴에 맞는 아침의 찬 공기도 피부의 수분을 자꾸 빼앗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머플러를 코 있는 데까지 올리고 숨 속의 습기로 수분을 채우려하면 고글에 김이 서려왔다. 아무래도 하루 종일 이대로 달리다보면 피부가 장난 아니게 트지 않을까.
에비나에서 43번 국도를 타고 곧이어 40번 국도로 우회전, 사가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신호대기를 할 때 난 히나코 언니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루트를 보면 우리는 서쪽에 있는 탄자와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는 건...?
"오늘은 야비츠로 가는 거예요?"
"왜, 가고 싶어?"
뒤돌아보는 히나코 언니는 뭔가 불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당했다'하고 초조함을 느끼며 나는 재빨리 답했다.
"아, 아뇨! 그렇게 되면 좀 힘들지 않을까 하는데요..."
"미야가세로 해서 오모테 야비츠로 가도 되긴 한데, 느닷없이 거기 가면 다리가 나갈 테니까 안 돼. 뭐, 키요가와로 갈 생각이었는데 하즈키가 가고 싶다면야 못갈 것도 없지."
"괜찮아요!! 생각하신 코스로 가죠!"
파란 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알았다며 출발하는 히나코 언니. '그쪽도 깨나 빡센 오르막인데...'하며 뒤에서 야에가 말했지만 그래도 야비츠보단 덜하겠지...?
사가미 강을 건너 아츠기 시청을 지나 129번 국도의 육교를 지나고, 조금 모양이 비틀어진 카야마 교차로에서 좌회전─60번 지방도를 타고 북상한다.
편도 1차선 도로라 노폭도 그리 넓지 않다. 휴일인데도 우리를 앞지르는 트럭이 많았고, 뭣보다 바람이 북풍이 되면서 속도가 확 떨어지는 등 주행 조건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지만 히나코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슥슥 잘도 나아간다. 나는 뒤쳐지지 않도록 페달을 밟으며 따라가기 바빴다.
길이 북서쪽으로 휘면서 서쪽을 향하게 돼 측풍을 맞으니 눈앞에 불그레한 단풍으로 물든 탄자와의 산줄기가 보였다. 저기를 가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니 흥분보다 얼마나 고생하게 될지 걱정이 들었다.
풍향과 미묘한 경사 때문에 점점 숨이 가빠온다. 간간히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의 물기가 다 말라 마른기침이 나왔다. '립밤 다시 바를까'하고 생각할 적에 논밭과 농가가 교대로 이어지는 풍경이 아직 녹색이 남아있는 숲으로 바뀌면서 이이야마 온천의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은 왼쪽으로 꺾이고 이후 업힐이 시작됐다. 히나코 언니는 가볍게 댄싱을 섞어가면서 비탈을 올라간다. 이정도 업힐은 워밍업이라는 듯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반면 몸이 좀 풀리긴 해도 평지에서 오르막으로 길이 바뀌면서 내 속도는 뚝 떨어졌다. 당분간 기어를 낮추지 않고 히나코 언니에게 떨어지지 않게 좀 무리해서 뒤쫓아 가기로 했다.
"하아, 하아..."
"하즈킷치, 너무 무리하지 마."
"미안... 너무 뒤쳐지면 히나코 언니한테 폐가 될 테니까...먼저 가 있어. 따라갈게."
"여기서 미야가세까진 금방인데? 너무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이이야마 온천을 지나자 길은 내리막이 됐다. 덕분에 히나코 언니 뒤에 바짝 붙을 수 있겠다 싶었지만 내리막에서 총알처럼 내달리는 히나코 언니는 나보다 훨씬 빨랐다.
그렇게 낙타등 코스가 이어진다. 히나코 언니는 간간히 이쪽을 돌아다봤지만 우리가 따라오는걸 보고는 안심한 듯이 계속 선두에서 달려 나갔다.
키요가와 무라 사무소, 스스가야라 적힌 간판들을 지나치며 길은 완전한 오르막이 됐다. 도로는 몇 번이고 커브를 틀고 있고, 히나코 언니의 피브라도 그 너머로 사라져 안 보였다.
응, 애초에 각력부터가 다르니깐.
무리해서 쫓아가다간 다리 힘이 빠져서 더 못 달리게 된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기어를 풀이너까지 낮췄다. 그러자 야에가 내 옆에 나란히 섰다.
"하즈킷치, 쉬려고? 좀만 더 가면 편의점 있는 거 같던데?"
"괜찮아...야에는 먼저 가...나도 계속 갈 테니깐..."
핸들을 향해 고개를 팍 숙인 나는 야에의 얼굴을 볼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 나란히 가는 야에였지만 뒤에서 엔진소리가 들려 내 앞으로 섰다.
나는 야에에게 먼저 가라며 손짓을 했다.
"오르막 끝나는 데서 기다리고 있을게! 정 안되겠으면 폰으로 전화해!!"
응, 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에선 마른기침만 나왔다. 야에는 힐끗힐끗 걱정스레 돌아다봤지만 점점 거리가 멀어지다 결국 저 앞으로 사라졌다. 쉴 곳 없는 키요가와의 업힐을 터벅터벅 오르게 됐다.
골짜기라 바람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골짜기의 공기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신선했지만 지금의 내겐 상쾌한 라이딩이라기 보단 끝없는 고행 길이었다.
"흐어어어어..."
페달을 밟을수록 허벅지가 움찔거리며 절로 신음이 나왔다. 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해서 목덜미의 지퍼를 풀어 열을 빼낸다. 이 열은 소모한 체력 그 자체. 몸이 뜨거워지고 맥박도 빨라지지만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물을 마시려 한손을 떼면 핸들을 지탱하는 손의 힘이 없어 절로 휘청거렸다. 추월하는 차가 옆을 지날 때마다 긴장하게 돼 체력이 낭비되는 것 같았다.
나는 혼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히나코 언니도, 야에도 보이지 않게 되자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뭐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멜로디가 끝없이 재생돼서 발이 멈추고 만다.
여기서 힘들고 지쳤으니 다시 돌아가는 것도 볼썽사납다. 그렇지만 혼자서 끝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도 외롭고 힘든, 뭔가 저주받은 기분이었다.
왜 나는 혼자서 이런걸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섭섭함 비슷한 기분과,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는다는 고독감에 혼자 '으아아아아!'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힘이 안나 발이 멈춰버릴것 같다.
그런 한심한 충동을 이겨내며 브라켓을 쥐고 페달을 밟아나간다. 팔이 덜덜 떨려온다. 겨울이라 목이 건조하다. 물통의 물을 마시면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온 몸이 젖어드는 기분이 든다.
'혹시 나는 미움 받으니까 이렇게 혼자서 이러고 있는 거?'
가빠오는 호흡과 피로 때문인지 이런 망상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러면 그냥 돌아가 버려, 내리막은 편하다구?'라는 악마의 유혹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치만 기다릴게, 라고 야에가...히나코 언니가..."
두 사람에게 아무 말도 없이 돌아가기엔 너무 미안했다. 그치만 한편으론
'이렇게 느릿느릿하게 올라가고 있으면 위에 있는 둘은 몸이 식으니까 내가 폐 끼치는 거 아냐?'
하는 불안과 우려도 뇌 속에 쌓여갔다.
그래도 발을 멈추지 않고 미야가세로 가는 길을 따라 오르고 또 올랐다. 커브를 돌면서 이제 오르막 끝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를 몇 번째, 하지만 키요가와의 길은 무정하게도 다음 코너가 있다는 걸 보여 줄 뿐이었다.
그렇게 체력보다도 정신의 소모가 빠른 업힐 도중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산마루가 보이고 겨울의 잿빛 구름이 하늘에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 업힐은 끝인가 하다가도 눈앞의 수풀을 지나 다시 커브가 있다. 방심은 금물이다.
거기서 나는 휠 래칫의 차르륵 소리와 사람 목소리를 들었다.
"하즈킷치, 이제 정말 눈앞이야! 히나코 언니는 다리 있는데서 기다리고 있어!!"
반대 차선에서 야에가 쏜살같이 내려오고 있었다.
내 뒤에서 차선을 가로질러 야에가 뒤에 붙었다. 바싹 마른 목에서 숨을 뱉으며 나는 페달을 밟는다.
'이제 오르막은 끝? 아니, 정말 이걸로 끝일까? 오늘 일정은 아직 시작도 안한 걸지도 몰라.'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게 고작이었다.
"요모다가 엄청 걱정했다고? 밑에서 펑크 난 건 아닌가 하면서 내려가더라니까."
"하즈킷치, 지금 보니 봉크가 오는 모양인데 아침은 먹었어? 아까 편의점에서도
암것도 안 먹던데."
나는 벤치에 축 늘어지며 히나코 언니와 야에의 말을 들었다. 미야가세 호수 공원에 있는 정자에서 우리는 휴식을 취했다.
여기까지 400m정도를 올랐나? 위로 올라온 만큼 기온이 떨어져서 추웠지만 나는 헉헉대며 거친 숨을 쉬고 땀을 흘려댔다.
탄자와의 숲 속, 카나가와의 미야가세는 11월 들어 붉은 단풍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닛코처럼 온 산이 붉은 게 아니라 군데군데 녹색이 뒤섞여 얼룩덜룩했다. 오히려 저수량이 줄어 드러난 호숫가의 바위 때문에 을씨년스러워보였다.
야에가 마중을 나온곳은 키요가와 루트의 마지막 오르막이었다. 오르막을 지나 미야가세 호수가 보이는 다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히나코 언니는 질린 듯 한 얼굴로
"추워, 몸이 식었으니까 따뜻한 커피라도 마시고 가자."
라고만 했다.
기복이 완만한 미야가세 호숫가의 경치는 좋았지만 히나코 언니와 야에 사이에 끼여 있는 나는 그걸 즐길 겨를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달릴 뿐이었다. 그렇게 다리를 몇 개 건너 호숫가 공원에서 쉬게 된 것이다.
겨울인데도 놀러온 사람들이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선물가게가 네다섯곳 정도 있는 큰 공원이었다.
나는 공원의 정자에 주저앉자마자 일어설 수 없게 돼 야에가 내 것까지 사오게 됐다. 히나코 언니는 헬멧과 고글을 벗고 여유로운 얼굴로 캔커피를 마시고 있다.
커피의 따뜻함과 달콤함에 조금씩 체력이 회복되는걸 느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이게 어디가 '느긋하고 폭신폭신한' 라이딩인거에요."
"엥? 충분히 느긋하잖아? 한바라 쪽으로 온 것도 아니고, 우라 야비츠로 가는 것도 아닌데?"
히나코 언니의 '엥?'이라며 놀라는 얼굴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나를 걱정스럽게 살펴보던 야에가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한바라 쪽은 길이 어때요?"
"어...스스가야에 있는 키요가와 주민센터 지나서 우회전하는 길 있었지? '리치랜드는 이쪽으로'라고 적혀있던 간판 못 봤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없었던 거 같기도 하고...?"
야에가 자신없단듯 말했다. 나야 계속 고개 푹 숙이고 올라오기 바빴던지라 주위가 어땠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초행길인 사람들이 자주 들어가는 곳이야. 거기서 산에 들어가 아이카와 쵸로 가는 길은 실업팀이나 프로 선수들이 쓰는 연습루트지. 이때쯤엔 낙엽이 쌓여서 코너에서 슬립하기 십상이었지..."
올라가는 도중에 옆에 벽으로밖에 안 보이던 산을 오른다...상상만으로도 몸이 망가져가는게 눈에 훤하다. 그런 악몽과도 같은 길을 희희덕대며 말하는 히나코 언니를 보며 나는 아무것도 못들은 걸로 쳤다.
"저, 왜 오늘 저랑 라이딩 가자고 하셨어요...?"
각력이 차이나도 한참 차이나서 내가 올라오는 동안 히나코 언니는 한참 기다리게 되는 꼴이다. 나나 언니 입장에서나 썩 즐거운 라이딩이라 말할 순 없는 것이다.
히나코 언니는 콧잔등을 긁으며 답했다.
"음...뭐 그냥 이제까지 같이 타보질 못했으니까. 처음 같이 타보는 상대랑 다니는 것도 재밌지 않아? 나야 하즈키가 태어날 때부터 알고 지내오긴 했지만."
히나코 언니의 대답은 그것뿐이었다. 뭔가 시원스럽지 않은 대답이라 본심을 숨기는 것밖에 안 보인다. 역시 업힐 뺑뺑이를 돌리면서 분수를 알라고 다그치려는 걸까? 그럼 나는 히나코 언니의 억지를 어떻게 피해야 할까. 어디서 도망쳐? 아니면 어디서 항복 선언을 해야 할지도? 그렇게 꼬리를 무는 생각에 잠겨있는 중에 갑자기 누군가가 내 등을 팡팡 두드렸다.
옆에 앉아있던 야에게 내 고민도 모르면서 웃고 있었다.
"하즈킷치~ 왜 그렇게 축 처져있어? 아침 제대로 안 먹고 달린 거야?"
"응, 그럴지도...별로 식욕이 없어서..."
"그래서 몸이 덥혀지기도 전에 업힐을 타게 돼 봉크까지 왔구나. 히나코 언니, 상황 보니 하즈키한테 뭐라도 먹여야 할 거 같은데 어쩔까요?"
야에 말대로 일지도 모른다. 업힐 도중에야 옷깃을 풀 정도로 더웠지만 땀이 식으니 추위로 몸이 덜덜 떨려왔으니까. 에너지가 부족한 탓인지 체온 조절이 잘 안 되는 거 같다.
히나코 언니는 뒤를 돌아보고 선물 가게와 카페들을 보며 말했다.
"미야가세까지 와서 행락객 대상으로 하는 식당은, 글쎄... 이왕 온 거 조금만 더 가서 먹자."
"조금만이라니, 야비츠란 건 아니겠죠...?"
내 자그마한 투정이 들렸던 건지 히나코 언니는 깔깔 웃으면서 일어섰다.
"나 참,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정 그렇게 야비츠 야비츠 노래를 부르면 정말 올라가버린다?"
"그건 하즈킷치에겐 진심으로 죽음의 트라우마가 될 거에요! 그리고 저도 배 고파오기 시작해서 보급을 요청합니다! 단 게 먹고 싶습니다!!"
야에가 한손을 들고 주창하자 히나코 언니는 음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야가세 북쪽으로 가면 잔뜩 있지. 중간에 오르막도 별 거 아니고. 어때, 하즈키. 갈래?"
남은 커피를 다 마신 나는 테이블에 손을 짚고 일어섰다. 휴식과 커피의 카페인과 당분 덕분에 조금이나마 회복이 됐다. 히나코 언니의 말을 믿고 다음 보급지점까지 어떻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가다 자빠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긴 하지만.
"갈 수 있어요. 히나코 언니, 선두에 서 주세요."
"응, 그 정도면 둘 다 갈 수 있겠네. 그럼 몸이 더 식기 전에 출발하자~"
헬멧과 쪽모자, 장갑을 고쳐 매고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미야가세의 호수 풍경을 볼 여유가 조금은 생겼다. 속도를 줄인 히나코 언니의 등을 따라가며 호반의 얕은 업다운을 따라 니지노 대교를 건너 오른편에 호수를 두고 달리니 곧 오르막이 나왔다.
아주 쉬운곳은 아니었지만 이제까지와 비교하면 훨씬 나았다.
"이 산장 아니에요?"
후미에서 야에가 소리쳤다. 호수 옆의 '오렌지 트리'라는 통나무집 같은 카페를 지나갈 때였다.
"아냐. 좀 더 가서 터널 지나야 돼. 라이트 불 넣어둬!"
"그렇대, 하즈킷치! 괜찮아? 안 힘들어?"
"아, 아직은 갈 수 있어...아마도."
호숫가의 길이 좁아지면서 적당히 업다운이 반복됐다. 좋은 의미로는 타기 좋은 길이고, 나쁜 의미론 체력을 깎아먹는 길이었다. 하지만 터널에 들어서니 평지가 됐다. 터널 속을 구와아앙 하고 지나가는 차는 무섭지만 그만큼 편하고 속도 내기도 쉽다.
터널을 벗어나자 그 앞은 숲 속에 펼쳐진 와인딩 로드였다. 그렇게 내려가다 T자 삼거리가 보이자 히나코 언니는 핸들에서 왼손을 떼 좌회전을 지시했다. 넓은 논밭 한가운대 2차선 국도를 향해 좌로 틀자 히나코 언니는 왼손을 그대로 돌려 목적지를 가리켰다. 거기엔 붉은 원추모양 지붕을 한 건물이 있었다. '탄자와 팥빵, 튀김빵 전문 오기노'란 간판도 보였다.
주차장에 히나코 언니가 먼저 들어가고 우리도 뒤따라 들어갔다. 이런 곳에 빵집이 있구나... 그래도 아츠기나 에비나가 아닌 이 산속에 있는 빵집이 그리 장사가 잘 되는가 싶은 의문이 들었다.
"와아~!!!"
오기노 빵집에 도착하자 내 의문은 풀렸다. 아직 점심시간 전인데도 주차요원이 나와있을 정도로 주차장은 차로 가득했다. 승용차 뿐 아니라 다른 현의 번호판을 단 관광버스까지 대져 있어서 깜짝 놀랐다. 깊은 산 속 빵집에 다른 지역에서 찾아올 정도라니, 이 정도로 유명한 가게인 줄은 몰랐다. 거기다 쇠파이프를 조립해 만든 거치대도 있어서 사이클리스트들에 대한 준비도 완벽했다. 이미 선객 몇 명의 자전거가 자물쇠와 함께 걸려 있다.
그렇게 감탄하는 내게 히나코 언니는 어떠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여긴 미야가세 라이더들의 성지야. 시기에 따라선 개점타임을 노리지 않음 거치대에 자리가 없을 때도 있어."
"오오오...!!"
루이가노를 걸자마자 야에는 손님으로 가득한 매점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흥분하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하고 생각했지만 자물쇠를 걸고 히나코 언니와 함께 가게에 들어서니 야에의 판단이 맞았다.
'탄자와 팥빵'이라 적힌 장막이 걸린 야외 테이블 위에 온갖 종류의 팥빵이 팔리고 있었다.
단팥, 통팥, 흰 앙금은 물론 레몬, 유자, 자색고구마, 즌다[각주:1](!) 등등 본적도 없는 여러 종류의 팥빵이 가득했다. 도너츠나 카레빵을 튀기는 야외 매대에도 줄이 길게 늘어서있고 그쪽에서 풍겨오는 기름과 밀가루 튀겨지는 냄새가 침샘을 참을 수 없게 만들었다.
옆엔 공장과 같이 들어선 빵 판매소가 있다. 손님들로 그득그득한 매장 안은 식빵부터 샌드위치, 아이스크림 빵[각주:2], 또 여러 특이한 과자와 빵들이 가득 진열돼 있었다. 물론 그것뿐이라면 좀 큰 빵집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딜 봐도 북적거리는 가게 입구에 옷걸이에 걸린 오기노 빵 공인 사이클 져지가 있었다.
그걸 보고 나는 깜짝 놀라 히나코 언니에게 물었다.
"저거...뭐에요?"
"재밌지? 빵집이야 많이 있지만 저렇게 사이클 져지를 만들어 파는곳은 잘 없잖아. 자, 하즈키도 얼른 먹고 싶은걸 갖고 와."
집게를 찰칵거리며 웃는 히나코 언니의 재촉을 받고 나도 빵을 고른다.
밀가루와 버터의 향기를 맡고 있으니 배가 점점 고파진다. 샌드위치와 소금 바닐라 크로와상, 노자와나[각주:3] 오야끼[각주:4](이것도 빵이라 쳐도 될지는 미뤄두고)를 사 가게를 나왔다.
눈앞의 튀김 빵 판매대서 비닐봉지 가득 빵을 채워온 야에가 손을 흔들며 날 향해 말했다.
"하즈킷치랑 히나코 언니 것까지 사 갈 테니까 자리 좀 맡아주세요!"
"그럼 난 카레빵! 하즈킨 뭐먹을래?"
"아, 나는 튀김빵 하나 부탁할게."
"네에~!"
그 대답을 듣고 히나코 언니와 나는 빈자리를 찾았다. 원뿔모양 지붕을 한 휴게소에 들어오자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자세히 보니 줄지어 세워진 의자와 책상이 꼭 오래된 초등학교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째서 빵집에 학교 의자가 있어요?"
"응, 튀김빵이 여기 B급 명물이거든. 그리고 옛날 쇼와시대[각주:5] 학교 급식때 단골로 나오던 거라 책걸상을 옛날식으로 했다는 모양이야. 소위 말하는 노스탤지어란 거지."
다 먹고 일어서는 가족을 보고 그쪽으로 간 히나코 언니는 인사를 하고 거기 앉았다. 합판으로 된 의자는 낮고 평평해서 앉기가 썩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느낌은 있는 거 같다.
"옛날 초등학교 책걸상은 이랬었구나...나땐 이미 플라스틱이었는데."
사온 빵을 꺼내 책상 위에 펼쳤다.
"그리고 급식때 튀김빵은 안 나왔었지. 하즈키 때도 튀김빵 없었지?"
"급식으로 튀김빵은 부모님 세대 이야기라고 봐요. 어쩌면 할아버지 할머니때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하긴, 이런 거 모르는 세대도 그리운 맛이라면서 튀김빵을 먹으러 오는 거 보면 추억이란 거 참 아무것도 아니라니깐..."
아하하, 하고 웃으며 히나코 언니는 명란 감자빵 포장을 뜯었다.
오기노 빵집의 분위기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독특한 분위기였다. 나도 아까까지의 침울함에서 벗어나 설레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비닐 포장을 뜯었다.
누구도 잘먹겠습니다라 말하지도 않고 바로 빵을 먹기 시작했고, 뭐라 말하기 힘든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생각도 움직임도 멎을 정도로 감동적인 맛이었다.
"어라, 왜 그래 하즈키? 노자와나가 아니라 갓 들어간 걸 먹은듯한 표정인데?"
히나코 언니가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이 상쾌하고도 산뜻한 감정의 정체를 찾는데 열중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 먹어본 적이 있다...맞아, 초등학교 때였다. 아직 입학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다 같이 간식이나 과자를 먹곤 했었다.
근데 누구랑 이었지? 맞다, 지금 같이 있는 히나코 언니와, 야요이 언니랑 같이였다. 그 이후 공원에서 같이 놀거나, 히나코 언니네 식당에 들어가 장난을 치거나, 우리 집에 히나코 언니가 놀러왔었고, 언제는 자고 가기도 했었고...그러자 전에 야에와 했던 대화가 다시 생각났다.
'……하즈킷치, 히나코 언니한테 뭐 나쁜 짓이라도 했어?'
'모르겠어…… 그치만 안 좋은 말은 항상 했었었어. 옛날부터 히나코 언니한테 귀염받아본 기억이 없거든.'
그랬을 리가. 어릴 적 기억속의 나는 히나코 언니와 정말 친하게 지냈었다. 그렇게 닫혀있던 기억의 문이 열리고.......그럼 왜 히나코 언니랑 사이가 안 좋아진 걸까 하는 새로운 수수께끼가 날 괴롭히기 시작했다.
"저기, 히나코 언니. 제가 초등학생일 때, 이렇게 자주 놀고 같이 간식같은것도 먹고...그랬었죠?"
혼란스러워서 생각이 정리가 잘 안됐지만 어떻게든 히나코 언니에게 말을 붙였다. 그 순간, 히나코 언니의 얼굴이 어려운 시험 문제를 다 풀고 합격점수가 나온걸 본 것처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기억해 냈냐!? 난 안 까먹고 계속 기억하고 있는데! 오늘에 이렇게 부른 건 그 기억을 하즈키가 떠올려줬으면 해서였어."
"저...그럼 왜 저는 히나코 언니가 절 싫어한다고 생각한 거죠...?"
"하즈키는 기억 안나? 우리가 같이 안 놀게 된 게 언제부터였는지."
히나코 언니의 질문에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중학교 입학땐 이미 히나코 언니와 소원해져 있었다. 그럼 초6땐? 초5...때도 이미 히나코 언니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쯤이 아닐까 싶은데요..."
"하즈키가 나랑 7살 차이니까 그때 난 고1이었네."
'그게 왜?'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히나코 언니는 미안하다는 눈으로 나를 봤다.
"응, 그때쯤이었어. 본격적으로 로드를 타기 시작하고, 또 야요이와 장거리를 타게 된 게."
히나코 언니의 말에 나는 아, 하고 숨을 들이켰다.
히나코 언니에게 미움 받는다고 초등학교 3학년인 나는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언니들이 나와 놀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히나코 언니는 소꿉친구인 언니 랑만 놀고, 나랑은 놀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히나코 언니는 내가 싫어진 게 아니라, 그때부터 타기 시작한 로드바이크가 재미있어서 거기 열중하게 된 거였다.
옛날이라면 몰라도, 야에와 함께 로드를 타는 지금은 로드의 즐거움에 어떻게 빠지게 되는지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언니들을 따라갈 만한 체력이 안됐다. 자전거도 어린이용밖에 탈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 놀게 된 나는 그 원인이 로드바이크란건 모르고 그저 언니가 날 싫어한다고 생각하게 된 거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폐 속이 텅 빌 정도로 길게 숨을 뱉으면서, 심장의 고동이 따끈하게 가슴속을 채워온다.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었다.
"나, 히나코 언니한테 미움 받는 게 아니었구나..."
"내가 하즈키를 미워할 리 없잖아? 휴일이면 야요이랑 같이 이리저리 다니고, 또 고등학교 들어가고부터 알바도 시작했으니 같이 못 놀게 된 거지."
히나코 언니는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 때문에 언제부턴가 하즈키가 날 어려워하는 게 보이더라고. 어떻게 하면 화해할 수 있을까 하고 야요이도 걱정 많이 했고."
언니도 이걸 걱정했다는 말에 그만 미안함이 배가 됐다.
"그치만 하즈키가 로드를 타기 시작하면서 나도 어떻게 화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그걸 확신하게 된 건 지난번 요코스카 때."
"요코스카...언니 마중 나오셨던 때요?"
"그때 하즈킨 웃고 있었잖아? 옛날에 같이 놀던 때랑 같은 얼굴이어서...이렇게 같이 타다보면 이런 말을 할 기회가 오지 않을까 싶더라구..."
히나코 언니는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 전까진 어떻게 말하기도 전에 싸우게 되진 않을까 했었거든...그래서 이제야 이렇게 라이딩 권유를 한 거야."
로드바이크 때문에 틀어진 관계를 로드바이크로 해결하다. 확실히 멋진 이야기다. 그리고 이게 히나코 언니가 날 부른 이유였다.
나쁜 뜻은 없었다는 걸 알게 돼 안심했다. 하지만 히나코 언니가 먼저 가 버려 혼자서 키요가와를 괴롭고 쓸쓸히 올라간 건 아직 남아있다.
그때의 기분은 분명 초등학교 3학년 때 내가 느꼈던 그 기분과 같을 것이다. 물론 히나코 언니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다. 하지만 그렇게 홀로 남겨진 사람은 자연스레 '내가 뭘 잘못했길래?'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 생각이 틀렸다고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이후로 기억이 왜곡돼...히나코 언니 말대로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진 추억'이 되는 것이다.
"그래, 하즈키. 난 옛날부터 하즈키를 미워하고 그런 게 아니었어. 그러니까 하즈키도 날..."
히나코 언니가 동의를 구하고 나는 '네!'하고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원망스러운 감정을 숨기고 말했다.
"나도 히나코 언니랑 사이가 좋아졌으면 해요. 그치만...오늘 키요가와에서 절 두고간건 좀 서운했어요. 다음부턴 같이 가면...저도..."
그 말에 아...하고 히나코 언니는 곤란하단 표정을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날 내버려두고 다니는 게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 낳은 결과에 곤란해 하는 걸 테다.
그렇구나...하고 히나코 언니가 중얼거릴 때였다.
"다음이라니, 어디로 가실 거예요? 이대로 아이카와로 내려가는 거는 아닌 모양인데."
"야에...?"
"자, 하즈키가 부탁한 튀김빵. 이건 히나코 언니 카레빵. 와~ 줄 기다리느라 엄청 고생했다고요~"
내 옆의 빈자리에 야에가 털썩 앉았다. 선물로 갖고 갈 것까지 산건가 싶을 정도의 대량의 빵을 테이블 위에 얹은 야에는 맹렬하게 포장을 뜯어 빵을 먹기 시작했다.
"하즈킷치, 그것만 먹으면 에너지 부족하지 않겠어? 녹차 팥빵 하나 먹을래?"
"어어...저기, 야에. 히나코 언니랑 한 이야기, 어디서부터 들었어?"
"응? 다음 올라갈 때 어쩌구 하던 거 이 다음 갈 곳 이야기하는 거 아니었어?"
아뜨뜨, 하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찢으면서 야에가 되물었다. 따뜻할 때 먹으라기에 나도 튀김빵을 먹기로 했다. 정말 뜨끈뜨끈해서 자칫 입술을 델 뻔 했다. 이런 겨울 날씨에선 따뜻한 음식이 고맙지만.
나랑 히나코 선배의 대화를 야에가 듣지 않아서 다행인걸까, 불행인걸까. 그래도 야에의 쾌활한 목소리에 정신을 가다듬고 응, 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만회할 기회를 얻었다.
그런 의욕이 히나코 언니의 얼굴에 드러났다.
"그래, 이대로 끝인 건 좀 아쉽단 말이지. 업힐 하나나 두개정도 더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보급이랑 휴식만 충분하면 회복될 테니까 전 더 달리고도 싶은데요...하즈킷치는 어때?"
"어디로 가는지 따라 갈리긴 한데...여기서 한 번 더 업힐 할 데가 있어요?"
'야비츠는 안돼요?' 라는 의미를 담고서 물었다. 히나코 언니는 허공을 바라보며 머릿속의 지도를 찾는 듯 했다.
"동쪽은 내리막이니까 북쪽이나 서쪽...돌아올 걸 생각하면 야마부시는 좀 멀겠네. 그럼 북쪽...마키메는 힘들고, 근데 또 어딜 가든 오오다루미는 통과해야 하니..."
"저, 그럼 어디까지 가게 돼요?"
"도쿄. 말은 그래도 카나가와랑 도쿄 경계선이야, 오오다루미는. 여기서 30km도 안 돼."
야에의 말에 그만 '뭐?'라고 말했다. 도쿄까지 자전거로 가다니, 지금껏 생각도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안에서 의욕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모처럼 잡게 된 화해의 기회를 내 나약함으로 놓치고 싶진 않다.
나는 히나코 언니를 보며 말했다.
"히나코 언니. 우리 같이 오오다루미에 가요."
"좋지. 네가 각오가 돼 있다면야. 이번엔 안 두고 갈 테니까. 요모다도 괜찮겠어?"
내 옆에서 양손에 빵을 들고 식사중인 야에는 붕붕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우리의 주행은 끝나지 않았다. 오늘의 수확이란 걸 손에 얻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고 싶었다.
오기노 빵에서 오오다루미와 사가미 호수로 가는 길은 쉽지만은 않았다. 출발 전에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니 412번 지방도는 산 사이를 누비며 북서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지도상으론 평지를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달려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츠쿠이 산간을 헤집고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업힐 한번에 100m정도 고도차는 없었지만 열심히 올라온 길을 도로 내려가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낙타등에 내가 지쳐 나가떨어졌느냐 하면...전혀 아니었다.
"지금은 어디쯤이에요?"
"아까 삼거리가 도시(道志)로 가는 길이야. 다리 건너서 '플레저 포레스트' 따라 올라가면 사가미 호수에 도착할걸?"
신호 대기로 멈춘 히나코 언니가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아직 길은 멀지만 지치진 않았다. 키요가와를 오르래보다 훨씬 다리가 가벼운 것 같다.
한번 부하를 받아 혈관이 팽창하고, 산소와 당분을 실은 혈액이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것 같아 이 낙타등 코스에서도 담담히 오를 수 있었다. 낮이 되면서 기온이 오른 덕분에 힘이 더 잘 나는 것도 같다. 비탈이 보이면 싫은 느낌보다, '좋아, 가자!'하는 의욕이 나기 시작했다.
오기노 빵에서 한 휴식과 빵의 영향도 컸다. 겨울은 물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으니 음식에 소홀해지기 쉽지만 이렇게 되니 근육은 당분을 써서 움직이는구나 하고 실감하게 된다.
용기는 다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는구나.
관람차의 모습이 살짝 보이는 플레저 포레스트의 입구를 통과한다. 내리막 와인딩 로드를 따라 달리니 태양빛을 반사하는 호수가 오른편에 보였다.
"사가미 호수라, 진짜 오랜만이네...전에 왔을 땐 시로야마 쪽에서 왔었는데...!"
풍절음 속에서 야에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가미 호수는 미야가세 호수랑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같은 산 속 호수지만 사가미 쪽이 도로와 호수 사이 간격이 가까운 것 같았다. 거기다 이쪽이 교통량도 많다.
짧게 호숫가 도로를 탄 뒤 한쪽 벽이 뚫린 터널을 지나 현수교를 건너자 호숫가 도로가 끝났다. 이 다음 나온 주택가 한가운데를 관통해 지나가는 구불구불한 오르막을 빠져나오니 사가미 호수 역 앞 삼거리였다.
"여기서 고슈 가도를 따라 조금만 가면 오오다루미인데...하즈킷치, 쉬었다 갈래?"
"아직 물도 남아있고 괜찮아. 히나코 언니는요?"
"오기노 빵에서 쉬면서 식었던 몸이 다시 따뜻해져서 쉬긴 좀 아까운데. 둘 다 괜찮다면 이대로 가겠지만..."
파란불이 들어오면서 히나코 언니는 클릿을 다시 걸고 달리기 시작했다. 네! 하고 우리들도 안장에 올라 뒤를 쫓았다.
사가미 호수 역에서 진로는 동쪽으로 바뀌었다. 경사가 완만해 상점이 늘어선 고슈 가도를 달린다. 아무래도 옛날부터 통행량이 많은 곳이어서 도로는 넓고 지나가는 대형차도 많았다. 어디서부터 업힐이 시작될까 하면서 나는 자세를 잡았다.
'비죠다니 온천'이라 써진 간판을 따라 다리를 건너 우회전을 하니 왼쪽 편에 산이, 오른쪽엔 사가미 강이 흐르는 업힐에 들어섰다.
"하아, 하아..."
여기서부턴 계속 오르막길. 드디어 오오다루미 챌린지가 시작됐다.
키요가와랑 비슷한 정도의 고도차가 있는 것 같다. 한번 마음이 꺾였던 곳과 비슷한 업힐을 오르자 덜컥 겁이 났지만...이번엔 든든한 동반자가 있다.
"오오다루미는 그렇게 경사 급한 곳이 아니니까 풀 이너로 해서 천천히 가. 또 고개 숙이면 호흡이 덜 되니까 고개도 들고."
나를 두고 가지 않도록 히나코 언니는 내 뒤에서 달리며 말을 건다. 야에도 그 뒤를 따랐다. 나보다 잘 타는 사람이 뒤에 있다. 내가 너무 느리니까 둘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초조해져서 정신없이 힘줘가며 페달을 밟아갔다.
"헉, 허억, 하아..."
재출발 할 적엔 다리가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업힐에 들어서니 체력이 떨어져 다시 다리가 무거워졌다. 중력을 거슬러 오르는 건 편할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키요가와와 오오다루미의 차이를 느낄만한 여유가 있었다.
키요가와가 길이 좁고 더 급해서 힘을 싣고 올라가야 했다면 오오다루미는 길이 넓고, 길지만 그만큼 경사도 완만해서 차곡차곡 올라가면 정상에 도달 할 수 있을 거 같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런 길 분석에다가 갓길에 떨어진 뾰족한 돌이나 낙엽에도 눈이 갔다. 크게 돌아가면 뒤에서 오는 차에 방해가 되니 조심해서 피한다. 반대 차선에서 경쾌하게 내려오는 로드 몇 대와도 마주쳤다. 이쪽이 온 힘을 다해 올라가고 있다 보니 다운힐을 한다는 게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난다.
"아~ 저거저거, 일부러 자랑하려고 그러는 거 알지?"
뒤에서 히나코 언니가 하는 말이 뭔가 웃겨서 하하, 하고 웃었다. 앞에도, 뒤에도 아무도 없고 먼저 간 사람을 따라 잡으러 필사적이 되는...그런 고독하고 초조한 업힐이 아니어서 좀 힘들긴 해도 즐겁다. 커브를 하나 지날 때마다 뒤에서 야에의 '화이팅~'소리가 들려왔다. 히나코 언니가 어떤 표정인지 돌아보고 싶다가도 핸들이 휘청여서 참았다.
산의 나무들이 소리를 흩트리는 건지 차가 지나가면 정적이 흘렀다. 속도가 다른 숨소리와, 체인과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물통을 꺼내 목을 축인다. 공기는 차갑지만 몸 속의 열은 금방 빠지지 않으니 물을 마시며 식히지 않으면 금세 지치게 된다.
핸들 위를 잡고 앞을 보며 페달을 밟으니 산이 점점 내려가고 하늘이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고개 정상에 다가가는 실감이 있었다.
"여기서 코너 두세 번 지나면 정상이야!"
히나코 언니의 말에 '아직이야?'하는 짜증은 들지 않았다. 오오다루미는 다리나 폐는 힘들지 몰라도 마음은 한결 편안했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지 같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같을 길을 가는 친구와 같이 있다는 게 이렇게나 든든하다는 게 느껴진다.
"하아, 하아..."
오르막의 끝에, 살짝이 다리 난간같은게 보였다. 강도 없는 고개 한복판에 다리가 있을 리가 없다. 확인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억누르고 차분히 페달을 밟고 나아간다.
'오오다루미 다리'라는 간판과 그 너머 '영업 중'이라 써진 깃발이 걸린 음식점이 보였다. 저게 고갯길에 있는 휴게소인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역시 그 건너편에 '오오다루미 고개'라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그걸 지나 왼쪽으로 틀면 오르막은 끝이다.
녹색과 빨간 단풍으로 얼룩덜룩한 길에 '오오다루미 고개. 해발 392m. 여기서부터 도쿄도'라 적힌 간판이 있었다.
그 말은 여기가...
"해냈다아아아! 도차아아아악!!"
나는 절로 그렇게 외쳤다. 두 손을 놓고 승리의 포즈를 취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랬다간 그대로 자빠링할게 뻔히 보여서 참았다.
오오다루미 고개 표지판을 지나 곁에 있는 보도에서 멈춰 섰다. 순간 클릿이 빠지지 않아 넘어질 뻔 했지만 어떻게 뺀 뒤 내려 데로사를 가드레일에 기대놓았다.
내 뒤를 이어 히나코 언니와 야에도 멈췄다. 히나코 언니는 아직 여유롭다는 듯 미소 짓고 있었고, 야에도 숨이 거칠었지만 기쁜 듯이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펼쳐보여서 가슴 깊은 곳이 아프다. 하지만 나는 부끄러움을 참고 히나코 언니에게 말했다.
"히나코 언니, 나 해냈어! 무정차로 오오다루미 올랐다구!!"
"오랜만이다,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는 거...아, 쑥스럽네. 그렇게 불리니까. 아하하하..."
그러는 내게 히나코 언니가 웃으면서 주먹을 내밀었다. 나는 거기 맞춰서 통, 하고 주먹을 맞댔다.
어느 쪽도 먼저랄 것 없이 서로 웃기 시작했다.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나와 히나코 언니 사이의 감정은...완전히 이어져 친자매같이 느껴졌다.
"수고했어! 쥐나 펑크 같은 트러블 없이 와서 다행이네, 진짜."
"야에도 정말 고마워...아, 물. 저기 꽂아두고 왔다."
"두 사람 다 수고했어. 자, 여기 완주 포상이야."
이라며 히나코 언니는 주머니에서 봉지를 두개 꺼냈다. 오기노 빵집의 탄자와 팥빵이었다.
하나하나 포장이 돼 있어서 등에 넣어놔도 좀 찌그러지긴 해도 갖고 다닐 수 있었다. 유자와 레몬 팥빵이 각각 히나코 언니의 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감귤계 과일은 입에 텁텁하게 남질 않으니까 보급식으로 딱이야. 난 안 먹어도 되니까 둘이서 하나씩 먹어."
"그래요? 잘 먹겠습니다!"
"가게서 그만큼 먹고도 또 먹는 거야?"
그거랑 이거랑은 배가 다르니까 괜찮아!'하면서 웃은 야에는 유자가 든 봉지를 집었다. 나는 장갑을 벗고 남은 레몬을 들어 포장을 뜯은 뒤, 반으로 갈라 히나코 언니에게 건넸다.
"자, 여기 언니 꺼! 히나코 언니도 같이 먹자! ...라고 어릴 적엔 곧잘 얘기 했었는데."
"그랬었지. 그럼 사양 않고 먹어볼까."
히나코 언니는 팥빵 반쪽을 받아 입에 넣었다. 나도 웃으면서 한입에 팥빵을 먹었다. 팥이 들었는데도 새콤한 맛이 있어 묘하게 상큼했다. 꼭 새콤달콤한 추억 같은...
오오다루미에서 자마로 돌아오는 동안엔 아무 일이 없었다. 대체로 내리막인데다 바람도 순풍이었던 덕에 여러모로 편했다.
즐거운 오오다루미 다운힐을 지나(도중에 고속도로 나들목이 있어서 차 피하느라 식겁했지만) 타카오에서 마치다 가도, 그리고 자마까지 곧장 46번 국도를 타고 내려왔다. 남은 문제는 해 지기 전까지 자마까지 갈 수 있느냐였다.
하지만 그건 악천후로 비구름을 걱정하며 달리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시 히나코 언니가 선두에 섰지만, 화해한 뒤 히나코 언니 등을 바라보니 갈 때랑은 느낌이 달랐다.
작지만 믿음직스럽다.
자세나 페이스가 안정적이고, 갈림길에서나 갓길에 떨어진 쓰레기를 피하는 것, 휴식 타이밍을 잡는 등 지시도 잘 해줘서 뒤에서 달리면서도 안심할 수 있다.
히나코 언니는 이렇게나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지금껏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내 안목이 부끄럽다. 히나코 언니가 이렇게 부르지 않았다면 계속 미숙한 채였을 거라 생각하니...히나코 언니에게 몇 번이고 감사의 말을 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져 벌써 어두컴컴해졌다. 라이트를 켠 우리는 얼마 뒤 출발지점인 편의점에 도착했다. 총 이동 거리는 100km에서 조금 모자란 정도. 하지만 업힐을 두 번 탄 탓인지 제법 탔구나 하는 만족감이 있다.
"히나코 언니, 오늘 불러줘서 정말 고마워!"
"어때, 정말 '느긋하고 폭신폭신한'라이딩이었지?"
피브라 안장에서 내리며 히나코 언니가 씨익, 하고 웃었다. 오늘 완주를 축하하고 싶어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연스럽게 하이파이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렇게 사이가 좋아지리란 생각은 못했다.
자전거는 정말 좋구나아...하고, 나는 기분 좋은 피로감 속에 잠겨 있었다.
"다음번엔 언니랑 셋이서 같이 타자! 그럼..."
"어...저기, 그거 말인데."
히나코 언니는 목소리를 낮춘 뒤 좌우를 둘러보며 뭔갈 찾는 듯 했다.
히나코 언니의 시선이 멈췄다. 그 끝엔 편의점 벽에 기대진 야에의 루이가노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야에는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이라면서 편의점에 들어가 있었다.
"너무 그렇게 언니 언니만 찾진 말고...우리들보다 그, 요모다를 더 소중히 하는 게 좋아."
"야에를?"
히나코 언니의 뜻밖의 지적에 나는 깜짝 놀랐다.
"동갑이고, 근처에 살고, 거기다 로드바이크를 타는 친구는 꽤나 만나기 힘들다구. 거기다 그동안 나랑 하즈키 사이처럼 한번 틀어지면 다잡기도 힘들고..."
히나코 언니의 말은, 오늘 한 경험 탓인지 정말 생생히 들려왔다.
"언제까지고 함께 있자 생각해도 이후로 진학하고, 취직하고, 이런저런 인연이 맺어지고 또 멀어지게 돼. 나랑 야요인 다행히도 그런 일이 없었지만. 하즈키는 야에한테 꽤 신세지고 있지?"
"응...아니, 네. 이런저런 데서 많이 도움 받고 있어요. 로드를 타기 시작한 것도 야에가 없었다면 안 그랬을 거에요."
"사실...오늘 워밍업으로 주변을 돌고 있을 때 쟤가 자꾸 눈에 띄더라고. 꼭 누굴 찾으러 다니는 거 같았어."
히나코 언니의 말은 '그거 하즈키지?'라고 묻는 것이었다.
야에랑은 정말 우연히 만난 줄만 알았는데...아니었다. 내가 계속 불안하다고 하니까 야에는 내가 걱정돼서 은근슬쩍 참여하는 척 하려고 추운 아침부터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녔구나.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무 한쪽만 부담을 하게 되면, 정작 걔가 하고싶은건 아무것도 못해. 그럼 좋았던 사이도 점점 벌어지게 되니까 하즈키도..."
"죄송합니다~ 너무 급해서 먼저 실례를...음? 왜 그래, 하즈킷치?"
편의점 봉투를 손에 들고 야에가 편의점을 나왔다. 물끄러미 야에를 바라보고 있으니 뭘 말 해야 할지 모르겠다.
히나코 언니는 나와 야에를 번갈아 본 뒤 통, 하고 내 어깰 두드렸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 갈 때 긴장 풀면 안 된다? 집에 다 왔을 때 제일 다치기 쉬우니까~!!"
히나코 언니는 잽싸게 안장에 올라 타 한손을 들고 달려 나갔다. 점점 작아지는 LED불빛을 향해 손을 흔들며 배웅하고 있으니 야에가 환한 편의점 안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하즈킷치, 자전거 봐 줄 테니 볼일 보고 와. 아, 저녁 집에서 먹는댔으니 보급은 필요 없나?"
"그렇긴 한데 그래도 따뜻한 음료수정돈...저기 있잖아, 야에."
"왜, 하즈킷치?"
"오늘, 나 걱정해줘서 이렇게 따라 온 거야? 내가 히나코 언니가 무섭다고 하니까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
야에는 내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편의점 봉투에서 종이로 된 핫 스낵 상자를 꺼내 이쑤시개가 박힌 치킨 너겟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혹시 내가 너무 참견해서 하즈킷치 화났어?"
"그런 거 아냐! 야에가 오지 않았음 지금까지도 히나코 언니와 어색한 채로 끝났을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정말 고마워!"
치킨 너겟을 입 속에 넣기만 하는 야에를 보며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히나코 언니 말 대로다. 사이가 좋다 믿고서 너무 마음을 놓으면 거기서부터 균열이 생길 수 있는 거다.
"야에는 이후로도 나랑 같이...로드를 타 줄 수 있어? 다음번엔 내가 야에가 하고 싶은걸 도와주고 싶어."
"아니, 괜찮아. '이제 하즈킷치는 내가 필요 없겠구나, 이제 우리 관계는 끝이구나'하고 생각하고 있었는걸."
그 말에 나는 대체 얘가 왜 이러나싶어 깜짝 놀라 입만 벙긋거렸다.
"하즈킷치는 언니랑 같이 자전거를 탄다는 꿈을 이뤘잖아. 그래서 그쪽끼리 알아서 잘 타려는 자리에 부르지도 않은 내가 끼어들어서 괜한 소릴 한건 아닐까...하고"
"아냐, 전혀 안 그래!"
나는 야에의 팔을 잡고 얼굴을 들이대며 말했다. 헬멧 앞부분이 부딪힐 뻔 했지만 야에는 안심한 듯 웃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래,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거...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야에는 왜 로드바이크를 타려고 했어?"
"재밌으니까, 지. 그걸로도 충분한데 말하고 있으니까 뭐 하나 해보고 싶은 게 생겼어."
나는 잡은 손을 풀었다. 야에는 고개를 끄덕이고 추운 밤하늘에 작게 뜬 흰 달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하즈키네 언니나 오늘 히나코 언니처럼 셋이서 장거리를 타니까 재밌었어. 그래서 이젠 언니들 도움 없이 우리 또래로 세네명 모여서 타면 좋지 않을까...싶은데."
"동갑이면서 우리처럼 로드를 타는 여자애...있을까?"
"찾아보면 되지. 뭐, 너무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하면 언젠간 나오지 않을까~"
아하하, 하고 야에가 웃었다. 이 느긋함을 보니 안심이 된다. 역시 나한텐 야에가 있어야 한단 생각이 무럭무럭 솟아난다.
"계속 이렇게 서있음 안 추워? 얼른 뭐라도 따뜻한 거 사 와."
"응, 그럼 야에,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나야 말로! 오늘은 재밌었지만 아무래도 획고가 1000m나 되니 피곤하네~"
야에의 대답을 듣고, 나는 손을 흔들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난방이 들어오는 공간만큼이나 내 마음속이 따뜻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 기분을 다음에도 느끼고 싶다. 야에와, 그리고 새로운 동료와 함께.
새로운 에피소드의 시작.
본편 주역인 히나코도 나오고 에미 영입을 위한 밑밥도 있고 여러모로 흥미로운 화였네요.
거기다 모든게 다 잘 해결되고 부부 금슬도 더 좋아졌으니 잘됐군 잘됐어(???)
'느긋하고 폭신폭신한 라이딩'(ゆるふわ)는 롱라 본편의 주제기도 합니다. 그런걸로 보면 이번화는 확실히 지난화들에 비해 본편에 가까웠죠ㅋㅋㅋ
총 코스길이 87.67km, 획고 1,000m 전후. 그림의 1627m는 터널 구간이(32km지점에 갑자기 확 튀는곳) 평지가 아닌 업힐로 체크되서 뻥튀기된 거에요.
순환코스에 업힐 두개, 중간에서 휴식이라 그런가 헐팔이 절로 생각나네요.
히나코가 말한 한바라 코스. 구간 길이 3.89km, 경사 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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