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위. 즉 트리스테인 왕위를 마리앙느 여왕에게서 알브레히트 3세에게로 넘긴다는 의미다. 그것이 양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책이었다.
'알브레히트 3세는 트리스레인을 꼭 침공하고싶지만을 않을것이다'는 추측에 기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제일 중요하고, 조심스레 다뤄야 할 점은 황제의 명예였다.
제정 게르마니아의 황제 알브레히트 3세는 권력 다툼끝에 친족과 정적을 모두 탑에 유폐시키고 권력의 정점에 오른 자로, 야망이 넘치는 냉철한 이성론자였다. 또 광대한 세상 판도를 한몫에 정리해 생각하는 정치적인 재능도 있었다. 다만, 시조와의 혈연이 없어 그 권위와 카리스마가 지극히 부족한게 단점이었다. 트리스테인과 게르마니아의 군사동맹도 단기적으론 '레콘기스타의 할케기니아 상륙 억제'란 이해 일치, 그리고 트리스테인을 알비온에 대한 방패로 삼는것이 주 목적이었다. 거기에 장기적으로 시조의 혈맥을 잇는 왕녀와 결혼함으로서, 시조의 권위를 얻겠다는 속셈까지 품고 있었다. 결코 앙리에타 공주에 대한 정분이나 사랑으로 결혼을 진행한 게 아니었다.
그것이 어쨌던, 현재 알브레히트 3세로서는 굳이 트리스테인으로 진격하여 영토확장에 대한 야망을 표출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레콘기스타가 게르마니아로 오지 않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만일 트리스테인이 알비온(레콘기스타)에게 점령당할경우, 군사대국인 게르마니아라도 알비온의 기세를 완전히 찍어 누를수는 없게 된다. 게르마니아 함대는 알비온 함대의 반수인데다, 함선도 구식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건, 제공권을 잃게되면 이도저도 못하는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앙리에타 공주가 망명했다는 정보가 전해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정보를 틀어 막는다고 해도 게르마니아 대사가 라 로셸에 있고, 쿠르덴호프 대공국에서 정보가 갈것이다. 이렇게 되면 황제는 자신의 분노는 물론이요,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트리스테인을 징벌해야만 국가의 권위가 사는 것이다. 거기에 미리 트리스테인으로 진군하지 않으면 레콘기스타가 마른 들판에 번져오는 불마냥 게르마니아를 덮치는건 시간문제란 점도 이유가 된다. 위기에 빠진건 트리스테인뿐인건 아니었다.
그래서 군사동맹이 어느때보다 중요한 것이다. 한시를 지체할순 없다.그가 분노로 이성을 잃기 전에 그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만 두
나라가 살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양위'란 최후의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단순한 사과와 피해 보상만으로는 게르마니아
황제의 권위와 명예가 회복되지 않는다.
만일 마제라니의 목이 날렸다고 치자. 그렇지만 군사동맹은 여전히 파기된 채일
것이다. 트리스테인은 레콘기스타에게 짓밟힐 것이고, 게르마니아는 약혼자가 도망갔다 , 그 약혼자가 도망간 나라랑 손을 잡았다,
게르마니아는 속빈 강정이다, 작은게 아쉬워서 무릎을 꿇었다는 둥 별의별 조롱을 다 받게 되리라.
다른 방법으로 트리스테인의 고위 귀족과 정략결혼을 통해 다시 군사동맹을 체결하자고 사자를 보낼수도 있다. 그랬다간 그 소식을 전할 대사는 오체분시 당하고 말것이다. 황제를 조롱한 죄목으로 말이다.
그래서 현재로선 게르마니아황제의 체면을 살려주는것 외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천천히 협상같은걸 할 여유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트리스테인은 내분이 일어나 배신자나 망명자가 쏟아져 나올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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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보나에서 앙리에타를 기다리던 황제 앞에, 마리앙느와 마자리니가 무릎을 꿇는다. 그것도 사태를 알게된 게르마니아 대사나 쿠르덴호프
대공보다 빨리 오게 된다면? 거기에 모든 사정을 말하고 사과하면서 홀*(笏.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지팡이:역주)을 바치고 왕위를
양위한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것도 게르마니아의 지배를 받아들인다는 트리스테인 귀족들의 연명부가 함께 제공된다면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황제 자신의 분노는 진정이 될 것이다. 시조로부터 부여받은 왕권을 넘겨 받음으로서, 앙리에타가 시집오는것보다
훨씬 더 큰 권위를 얻을수 있게 된다. 아니, 시조의 권위를 가진 마리앙느가 스스로 무릎을 꿇었단 사실이 '황제의 권위가 시조의
왕권보다 앞선다'고 평가받을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레콘기스타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방패가 공짜로 굴러들어오게 된다. 그 방벽을
얻기위해 무익한 전력소모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또 마리앙느와 마자리니 추기경이 죽지 않게 된다.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
사형을 집행하게되면 국정을 손에 쥐던 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당연히 트리스테인 귀족들에게서 반발이 나올 것이요,
특히 시조의 권위를 짖밟았다는 화근을 만들게 된다. 이러저러한 이유에서라도 황제에게는 가치가 높은 선택지인 것이다.
그
렇다면, 황제가 이를 수락했을때 트리스테인 귀족을 숙청하고 직접 지배를 하게 될 가능성은 어떻게 될까. 물론 가능성은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묻는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레콘기스타 침공을 막은 이후, 그 창부리를 황제에게 돌릴 가능성도 존재하게
된다. 원래 게르마니아는 여러 도시국가가 모인 연합국. 거기에 트리스테인이 끼어들 경우, 국가로선 작았을지 몰라도 세력면에서는
역사와 전통을 지닌 막대한 존재감을 자랑하게 된다. 함부러 손을 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알비온과의 전쟁에서 국력을 온존할수만
있다면, 자치권을 지킬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게르마니아의 속령으로 매년 조공을 바치게 되겠디만, 실질적으로 독립을 유지할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 방법을 진행하려면 몇가지 조건이 존재한다.
첫째로 마리앙느 스스로가 알브레히트 3세에레 무릎을 꿇고 왕위를 양위할것.
둘째, 마자리니 추기경은 앙리에타 망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황제에게 맡길것.
셋째, 발리에르 공작을 비롯한 트리스테인 귀족들이 알브레히트 3세의 지배에 복종한다는 것을 전 국민에게 알릴것. 즉 국내의 의사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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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가 갖춰져야만 황제가 트리스테인의 항복을 선선히 받아들일것이다. 이것들이 진행될 동안 트리스테인은 알비온의 침공을 어떻게던
막고 있어야 한다. 그외에 몇몇 조건이 더 추가될지도 모른다. 게르마니아에 대한 손해배상, 트리스테인 고위층의 인질, 영토
할양...그건 급한불이 꺼진 뒤에 교섭해야 할 것이다. 일단 얼마 안되는 시간동안 이 조건을 마리앙느 여왕과 귀족들이 전원
받아들어야 할 것이다. 과연 실현시킬수 있을까? 협상이 진행될 동안 알비온 함대는 어떻게 막을것인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게르마니아는 트리스테인에 군대를 파견할 이유가 없고, 알비온은 그걸 기다려줄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당연히 홀에 모인 귀족들은 알비온의 위협만을 보고 있었다. 게르마니아와 정치적 협상을 하는것 보단 알비온의 침공이 더 현실로 다가오는 문제였다. 애시당초 알비온 함대를 상대로 싸울순 없다. 탁상공론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이미 그 대책은 세워져 있기에 알비온 함대는 트리스테인에 상륙할수 없습니다!"
공작부인의 말에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알비온의 최첨단 거함 '로열 소베린'을 필두로, 트리스테인 함대의 배를 넘는 함선이 진군중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길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쾅! 하고 홀의 문이 열렸다. 거기엔 숨을 헐떡이는 공작 일행이 있었다.
"여러분들! 이미 추기경님이 손을 써 뒀습니다. 오늘 알비온 함대는 큰 타격을 입을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브레히트 3세와 협상할 시간은 충분하겠지요!"
공작의 외침에 의혹과 경탄의 소리가 나왔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런게 가능하긴 한건가?'
하며 그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추기경이 공작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그게 사실이면 시간을 벌수 있겠지만...'
하는 희망에 찬 소리도 들려왔다. 카린의 옆에 있던 엘레오노르가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버님!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정말로, 정말로 알비온 함대를 쓰러트를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렇다. 지금부터 어떻게 할 것인지 설명해 주마."
부인의 뒤를 이어, 공작이 말을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알비온 함대에 맞서 싸울지에 대한 '양의 계책'을.
공작의 말이 끝나자, 홀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은 희망에 차 잇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공작과 추기경이 취한 방안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이 부딪치고 있었다.
"그렇군...그거라면 잘 풀릴지도 모르겠어."
"무슨 바보같은 소릴! 그런 형편좋은 소리가 어디있나! 고작 편지 한장으로 알비온 함대를 물려 보내다니!!"
"하지만 다른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알비온 함대의 도착보다 밀서가 일찍 도착해 준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요."
"그야말로 시간과의 승부, 아니 겜블 이로군"
"이미 사자를 보낸지 시간이 지났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로써는 어쩔 방법이 없어요."
"음...함대에 대해선 기다릴수 밖에 없겠네요. 그 사이에 우리가 할수 있는건 뭔지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잠깐 기다려, 우리 나라와 알비온은 상보 불가침 조약을 맺었잖소? 그렇다면 그들이 침공해 온다는건 헛소문일지도..."
"
바보인가, 자네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앙리에타 공주가 직금 알비온에 있다고. 그렇다면 트리스테인을 마구 휘저은뒤 꼭두각시로
공주를 세워둔 뒤 자기네 입맛대로 조종할수 있게 된다고. 그 뒤엔 자기네에게 유리하게 사실을 날조할걸세!"
"그렇지, 지금은 불가침조약따위 아무 의미 없는거라고."
알비온 함대가 트리스테인을 강습할 가능성이 낮아졌다. 그 사실만으로 귀족들은 안심하고, 공황상태에서 벗어나 냉정히 사태를 분석할수 있게 됐다.
"그렇담 우리도 레콘기스타에 참가하는건 어떻습니까? 양위보다는 더 현실적일것 같습니다만."
"무슨소릴. 알비온은 황태자를 제외한 모든 왕당파를 색출해 처형했네. 그렇담 폐하도 숙청당하겠지...그 다음 순서는 우리 귀족들일테고."
"
그렇게는 안될걸. 그들은 게르마니아, 갈리아, 로마라리아와도 싸워야 하니 조금이라도 전력에 도움이되는 편을 택할겁니다.
트리스테인을 오랫동안 통치했던 우리를 숙청하면 이국땅인 이곳을 통치하기 어려워지니 우릴 숙청하거나하진 않을겁니다."
"아니, 숙청당하지는 않겠지만 최전선에 끌려가 싸워야 할거야. 그리고 주인을 잃은 영지는 황폐화될걸세. 대륙 통일이 끝나면 그 다음은 엘프들과 전쟁이야. 그리고 모든것이 끝났을때까지 레콘기스타는 우리 영지를 온전히 돌려 줄까?"
"그러진 않겠지...그대로 레콘기스타 놈들이 이때다하고 접수하는게 눈에 보이는군. 그리고 백성들은 전란으로 고통받고 원망과 증오만이 남게 될걸."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지금 이대로라면 우리의 명예는 실추되고, 레콘기스타에 참가해도 미래는 없고...차라리 죽는게 낫습니다, 이래선!"
그야말로 이율배반.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고 다른 대책은 없나 고민하고 있을때, 누군가가 외쳤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종말을 기다릴순 없잖습니까!..무슨 무슨 다른 의견은 없으십니까! 양위도, 레콘기스타도 안된다면 그냥 게르마니아에게 영토를 갈라주고 손해배상을 해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
그걸로 황제의 분노는 가라앉겠지만...군사동맹까지는 힘들지 않겠나. 알비온의 선발대를 어찌어찌 막는다 해도 우리 혼자서 싸워야
하는건 바뀌지 않아. 그들이 다시 침공해 오면 그때야말로 도망자, 배신자들로 저항할 힘을 잃게 될걸. 그런 껍데기만 남게될 나라를
뭐가 좋다고 게르마니아가 안고 가겠나."
"에이, 갈리아는 왜 보고만 있는겁니까?!"
"그 무능왕한테 뭘 바라는거야, 지금까지 계속 무시해왔는데 지금와서 그치에게 뭘 기대할수 있겠나."
"그럼 이런건 어떤가? 누군가가...그래, 발리에르 공작에게 양위하는 거야. 그리고 두 딸, 엘레오노르와 카틀레아를 마리앙느님의 양녀로 삼는 거다. 그 다음 그녀들을 정략..."
"또 정략결혼이라, 자네라면 할수 있겠나?"
"...말도 안된다며 거부했겠지..."
"그런거야. '자 왕권을 넘겨 받았으니 내가 왕입니다. 그리고 내 딸들을 시집보낼테니 참아주시요. 앙리에타 대신입니다...' 사람 바보취급하는데는 이만한 것도 없을걸세."
"으아아! 이렇게 떠드는것만으로 아무것도 해결이 안됩니다! 폐하, 폐하께선 어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래, 폐하의 생각도 들어봐야 합니다!"
마
리앙느의 의견을 듣는것은 양위의 필수 조건이다. 마리앙느 자신이 알브레히트 3세에게 무릎을 꿇고 양위한다는 걸 납득하지 않는다면
공작이 말한 대책은 소용이 없어지는 것이니까. 그런 그들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마리앙느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부진 얼굴과 굳은
입술을 한 여왕의 뒤로 시종들이 따라 붙었다. 마자리니도 함께였다.
"폐하! 저희는 이런 사태를 인정할수 없습니다!"
"추기경 네놈, 미친건가!"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지 마십시오!"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 트레스테인의 독립과 긍지를 저버리는것은 안되는 일입니다!"
귀족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쏘아냈다.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그리고 여왕의 진의를 묻는것으로 대부부분은 양위의 거절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여왕은 그런 그들의 말을 잠시간 듣고 있었다.
"다들 조용히."
혼약을 위해 마련한 단아한 흰 드레스로 몸을 감싼 마리앙느가 말했다.
"다들 침착하고 제 이야기를 들으세요."
공
작은 아까의 논쟁에서 반으로 나눠져 있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모두를 물러서게 했다. 홀 입구에서 홀 입구 주위 5메일정도의
공간이 비워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 마리앙느와 마자리니 추기경, 시종들이 섰다. 그녀가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우선 제 딸의 어리석고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경들에게 사과해야 겠군요. 모든건 딸에게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내 책임입니다."
그
러면서 마리앙느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장소에 있던 그 누구보다 깊게, 뒷통수가 보일정도로 고개를 숙인것이다. 흥분으로 머리에
피가 오른 귀족들도 여왕의 그런모습에 기세가 꺾였다. 그렇게 주변이 진정될때까지 기다린 마리앙느는 다시 머리를 들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경들의 분노와 불만은 이해합니다. 시조께서 내려운 6천년 역사의 트리스테인 왕국을 우리 대에서 무너뜨리게 된것은 불명예 중에 불명예겠지요. 귀족으로서는 죽는것보다 치욕...스럽겠죠."
주위에서 듣던 귀족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마리앙으나 말을 이었다.
"
하지만 이대로라면 우리모두는 죽음을 면할수 있을겁니다. 발리에르 공작과 마자리니 덕분에 알비온 함대의 발을 잠시 묶을수 있게
됐으니까요. 하지만 그다음 문제는 게르마니아입니다. 게르마니아와 창을 부닥치며 싸우게 되면 함대를 재정비한 알비온이
트리스테인을...아니, 전력을 소모한 게르마니아까지 공멸하게 되겠지요.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어부지리인 겁니다."
약간의
희망을 품던 사람들은 여왕의 말에 다시 현실의 무거움을 느꼈다. 결국, 게르마니아와 군사동맹 없이는 알비온과 대적하는것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눈길을 피해버리는 사람들에게 마리앙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여왕은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미안해하면서
자신의 불찰을 고백했다.
"모든건 이 상황이 되도록 가만히 있었던 내 책임입니다."
그 말에 바닥의 먼지를 쫓던 사람들의 눈이 다시 올라왔다. 거기엔 후회와 번민으로 가득한 여왕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내가 왕위에 있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여왕'이라고 해도 거기에 응하지 않았지요. 그저 선왕 폐하의 아내, 왕녀의 어머니면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잇었던 겁니다."
"하, 하지만 그건 선왕폐하를 추모하려던..."
"아닙니다."
마리앙느를 옹호하려던 귀족을 향해 팔들 들어 발언을 막고 그녀는 참회를 이어갔다.
"
분명 남편에 대한 추모는 계속 했었습니다. 하지만 왕이라는 막중한 책임은 계속 외면해 왔었죠. 다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선왕폐하께서 승하하셨을때, 재혼해야하는걸 말입니다. 아직 저 자신이 젊으니 딸이 아닌 내가 정략결혼을 통해 후계자가 될
남자아이를 가져야 했습니다."
그 말에 다들 입을 다물고 여왕의 시선을 피했다. 분명 그것은 정치의 정도이자,
왕가의 책임이다...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입에 담는자가 없었다. 마리앙느가 죽은 남편에 대해 가지는
마음을 짖밟을수 없었기에, 그리고 군주의 실수를 지적할만한 용기가 없었기에, 멀리 내다볼수 있는 정치적 안목이 없었기에...군주의
실수는 그를 받치는 가신의 죄, 크고작게나마 트리스테인의 모든 귀족들에게도 책임이 있는것이다.
"그래서 내 대신 딸이 나오게 됐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일을 딸에게 떠맡긴 겁니다. 저는 왕의 자질이 모자랐던 거죠. 거기에 부모로서의 자질도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딸을 나무랄수 없습니다. 이는 모두 내 탓입니다."
그
리고 여왕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감추었다. 그리고...바닥에 물방울이 몇개 떨어졌다. 이를 보고 홀
이곳저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뒤에 서있던 시녀 하나가 쭈뼛쭈뼛 나오더니 여왕의 눈매를 손수건을 닦았다. 정리가
끝나자 여왕은 얼굴을 들고 의연한 태도로 선언했다.
"이는 제가 여왕으로서 해야할 마지막 일입니다. 트리스테인에 사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할케기니아의 모든 사람들을 지켜야 합니다. 이 무능한 왕이라도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쉰뒤, 마리앙느의 외침이 큰 홀에 울려 퍼졌다.
"트리스테인 왕으로서의 지위를, 알브레히트 3세게에 양위하겠습니다!!!"
그 순간, 몇몇 사람들이 몸을 움직였다. 귀족 무리 안에서 몇개인가 지팡이가 삐져나와 마법이 발동된 것이다. 얼음화살과 불 덩어리, 번개가 서로 뒤엉켜 여왕에게로 날아갔다.
하
지만 모든 마법은 여왕에게 닿지 않았다. 여왕에게 걸려있던 '에어 실드'에 의해 튕겨나간 것이다. 그렇게 튕겨간 마법은
데르프링거가 흡수했다. 마법이 튕겨남과 동시에 지팡이를 빼든 자들이 빛에 휩싸이고, 뒤이어 작은 회오리그 그들을 덮쳤다. 여왕이
말하는 동안, 공작일행은 그 방법에 동의하지 않고 지팡이르 빼드는 사람이 있을것이라 예상하고 여왕이 아닌 그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 그래서 타바사는 사전에 여왕 주변에 에어 실드를 치고 있었고, 양은 데르프링거를 손에 쥐고 있었다.
루이즈는 익스플로전의 영창을 완료했고, 카린느는 지팡이를 빼 들고 있었으며, 시에스타와 롱빌은 후위에서 그들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회오리가 멎고 바닥에 떨어진 사람중에는 만티코어의 자수가 새겨진 망토를 한 현 트리스테인 마법위사대 만티코어대 대장인 드 젯살과 그 부대원 두명도 있었다.
"크윽... 폐, 폐하!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이대로 우리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있을수 없습니다! 이대로 멸망을 기다릴수 밖에 없다면 차라리 명예롭게 죽는걸 허락해 주십시오...!"
넘어져 있던 부대장은 서둘어 일어나면서 여왕에게 번복을 권유했다. 다른 대원들도 몸을 일으켜 여왕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이대로 왕실의 권위가 모욕받아서는 안됩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이제 트리스테인은 망했습니다. 이 이상 구차하게 살바엔 명예롭게 죽는것이 왕족이요, 귀족입니다!!"
그들의 의견은 귀족사회에선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양에게는 그야말로 구역질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동맹정부에게서 암살당할때가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때 날 죽이러 온 장교는 자아도취에 빠져 목소리가 떨렸었지.'
거
기에 생각이 미치자 양의 위가 아려왔다. 하지만 여기는 동맹도, 제국도, 민주주의사회는 커녕 법치국가도 아니었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귀족사회였다. 그들에겐 가문의 명예와 영지를 지키는것이 최우선이었고, 다들 그렇게 행동했다. 양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수 없는 자기독선적인 생각이었다. 그래도 양은 입을 다물고 혹시 또 마리앙느에게 날아올지 모를 마법을 막기위해 장검을 손에
쥐었다. 여기에서는 이곳 사회의 규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맞습니다. 트리스테인 6천년의 역사는 곧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우리는 살아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나라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죽게되면 우리의 명예는
남게 되겠죠. 하지만 남은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그대들은 국가의 명예를 위해 모두둘 죽으라고 말할수 있습니까? 귀족들은 평민의
생사에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이 죽건말건 우리는 우리 자유의지를 따른다...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마리앙느의 말에 무릎을
꿇은 기사들, 그리고 주변의 귀족들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그들 대다수는 귀족이란 자부심에 차 평민을 업신여기고 있었다.
단순히 일을하고, 자기들 멋대로 살아가는 가축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겉으로는 '평민이 곧 국민이고 귀족들이
지켜야 할 존재'라고 떠들었던 것이다. 대놓고 '평민따윈 아무래도 좋아! 그놈들은 그저 우리 발밑에서 버둥대는 동물에 지나지
않아'라고 감히 말할수 없는 것이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신참'이라고 경멸해온 게르마니아와 동맹을 맺으려 했던걸 말입니다. 왕권에 기대지 않고 평민들에 의해 부흥해온 국가에게 우리는 도움을 청했던 겁니다."
이것 역시 사실이었다. 사실, 여기 있던 자들 모두는 오전중에만 하더라도 게르마니아와의 정략결혼과 군사동맹 결의를 축하하기위해 분주했었으니까. 갓 기어올라온 평민들과 손을 맞잡으려고 했던 것이었으니까.
마리앙느가 주변을 돌아보고 말을 이었다.
"다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 영지의 백성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귀족의 의무요, 이를 지킬수 없는자는 귀족이라고 칭할수 없는 것입니다!"
군
데군데서 오열소리가 생겨났다. 아름답게 꾸민 여자들은 손수건으로 눈매를 훔치고, 명망높은 신사들은 주먹을 꽉 쥐고 벌개진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않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젯살의 의사는 확고했다. 마법위사대의 한 부대 대장을
맡아온 그의 정신력과 책임감은 그의 주장을 굽히는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만...왕권은 시조에게서 받은 신성한것! 나라가 망한다고 그것을 가볍게 넘겨주거나하는것은 안될 일입니다!! 시조께서 내려주신것을 넘겨주는것은 시조의 가르침을 거부하는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그
말에 만티코어 부대원들이 강하게 긍정하고, 주위 귀족들도 눈에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 시조의 가르침은 삶의 근본.
절대적인 가치였다. 그러기에 젯살의 발언은 그들에게 크게 다가왔다. 다시금 양위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여왕의
얼굴에서도 처음으로 주저하는 기색이 드러났다.
"시조의 뜻...말씀이시군요."
공작이 한발짝 나와 젯살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우리들은 시조께서 내려주신 왕권을 수호하는 기사대. 따라서 왕위의 온전이 우리의 첫번째 목표인 것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큰 체구에 걸맞는 큰소리로 답했다.
"다른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에 다수가 고개를 그덕이며 동의했다.
그
러자 공작이 뒤로 돌아서 루이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즈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빼어 들었다. 그리고 그입에서 그자리에
있는 그 어느누구도 들어본적 없는 주문이 영창되었다. 다들 이건 뭔가, 대체 무슨 마법을 쓰려는 것인가 하며 분홍머리의 소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루이즈가 지팡이를 벽으로 돌리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잠시뒤, 밝은 빛이
퍼지면서 다들 눈부심에 고개를 돌렸다.
빛이 사라진 자리엔 석양이 있었다. 벽이 있던자리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듯 공백만이 있었다. 벽 너머 성벽에도 구멍이 뚫려 석양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 구멍으로 루이즈가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에 그녀 주변을 감싸던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서고, 벽이 있던자리에 도착한 소녀는 빙글 하고 귀족 무리를 향해
돌아섰다. 오른손에 지팡이, 왼손에 더러워진 책...다시 소녀의 입에서 들어본적 없는 주문이 울려 퍼졌다.
" '일루전!!!' "
루
이즈의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선선하게 빛나는 그 환영은 양손을 뻗은 모습. 할케기니아의 백성이라면 모두 알고있는 바로 그
시조 브리밀의 모습이었다. 석양을 등지고 빛나는 그 환영은 마치 후광을 발하는 신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모두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루이즈가 가슴을 펴고 소리높여 선언했다.
"나는 루이즈 프랑소와즈 르 블랑 드 라 발리에르! '허무'를 계승한 자입니다!"
'
허무' 그동안 잊혀져 왔던 시조의 계통. 이 자리에 있던 그 누고도 모르는 마법으로 이제까지 없었던 마법을 보여준 그녀에게,
사람들은 시조가 겹쳐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고갤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귀족들에게 루이즈가
말했다.
"이 땅에 평화를!!"
그 말에 숙여져있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추기경과 여왕 마리앙느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공작이 그녀의 딸 옆에 섰다.
"여러분들! '허무'는 시조의 마법. '허무'의 계승자는 '시조'의 계승자! 즉 지금 시대에 환생하신 시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평화를 가져와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공작의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왕은 왕위를 건네는게 동의했다.
추기경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다.
왕권을 내려준 시조의 비법(허무)을 계승한 사람이 양위를 통한 평화 추구를 인정했다.
이제, 양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공작부인이 소리쳤다.
"자! 시간이 없습니다!!"
그말에 다들 정신을 차리고 당황하면 일어난다. 공작도 그들을 채찍질했다.
"일단 서둘러 연판장을 만들겠습니다! 어디, 모두의 이름을 적을수 있을만큼 큰 종이 갖고계신분 없습니까?"
하
지만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트리스테인의 귀족이었다. 그만한 종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갑작스런 발언에 시족들도
어쩔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나마 흙 계열 메이지들이 몇몇 모여 종이를 연성할 방법에 대해 의논을 시작했다.
"아! 저건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롱빌이 천장을 가리켰다. 거기엔 '사냥터의 백작부인', '아모르의 무기를 꼬나쥔 레쿠진스카'등의 거대한 태피스트리가 있었다. 여왕이 이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좋습니다! 빨리 저것을 내리십시오. 거기에 모두의 연판장을...아니, 혈판장을 작성하겠습니다!"
여
왕의 말에 몇몇이 '플라이'로 천장으로 뛰쳐 올랐다. 태피스트리가 바닥에 깔리자, 다들 잇달아 무명지를 그어 자신의 피로 이름을
적어 나간다. 워터 메이지들은 이름을 적어낸 귀족들을 치유하고, 시종들이 다른데 묻은 피를 깨끗한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렇게
태피스트리는 점점이 피로 물들어 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양에게 데르프링거가 말을 걸었다.
"어이, 양."
"...응?"
양의 대답에선 어딘가 힘이 없었다.
"어이어이, 전부 네 말대로 돌아가다니 너 진짜 대단하잖아....그러면 좀더 가슴을 펴라고. 기뻐해야 할 일 아냐?"
"아니 뭐...이건 그러니까, 루이즈의 '허무'와 귀족들의 결정 덕분이지 뭐."
귀
족들을 설득하게 위해 시조 브리밀에 대한 신앙심을 이용했다. 시조의 환영을 만들고 그들의 판단력을 빼았았다. 루이즈가 가진
'허무'란 이름의 카리스마를 정치적 으로 이용했다. 마리앙느와 마자리니 추기경을 희생시켰다. 이는 루이즈가 주장하고, 양이 동의한
것이었다. 루이즈가 평화를 위해 할수있는 모든것을 다하겠다는 말에 공작도 마지못해 동의했다. 더 이상 귀여운 딸아이를 품안에
품어놓을수만은 없었던 것이었다. 양도 현재 상황때문에 생기는 '허무'의 가치를 알고 동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상황이 돌아가는것을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대체 난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자
신은 마약에 세뇌된 지구교도에게 암살당했다. 그때의 상황을 보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자신이 시조의 신앙심을 이용해 사람들을
세뇌한 것이다. 루이즈의 마법, '일루전'을 이용해 귀족들을 현혹하고 그들의 의사를 한쪽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이제껏 양이
혐오하던 선동정치였다. 딸처럼 생각해 오던 루이즈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녀를 지켜야 한다면 오히려 '허무'는 숨겨야 할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평화를 지키겠단 명목으로 '허무'를 공개하고 루이즈를 위험한 곳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마리앙느와 마자리니를
희생시켜 평화를 지켜내는것도, 동맹정부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희생시키려 했던 자신이 이번에는 그들을 희생시켜 평화를 챙기려고
한다. 애시당초 양은 지금까지 귀족들이 은연중에 '희생 강요'를 하도록 몰아온 것이다. 다들 희생양이름의 폭탄을 차례차례로 주고 받은 것이다. 그 폭탄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면서 거기에 권력, 정, 이론이 얹혀져 폭탄이 가지는 압박감은 점점 커져간다. 그리고 폭탄을 넘기기 위한
모든 변명이 바닥나고,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거대한 폭탄을 처리해야 하는 결말에 다다랐다. 이런 촌극을 지켜보면서, 양은
자신에게 뭐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것인지 생각했던 것이다.
"어~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장검이 챵, 하고 소리를 냈다.
"세상에 죽고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평화롭게 살고 싶은 거잖아? 그러니까 다들 저렇게 최선을 다하는 거라고~!!"
"아아, 그렇구나. 음 그런거겠네. 그렇다면 이왕 이렇게 결정난거 다들 할수밖에 없는 거구나."
"그래 그런거야. 그러니까 세세한건 따지지 말자고!"
양
은 고개를 흔들고는 머릿속에 있던 고민을 떨쳐냈다. 현 상황은 최악이다.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평화를 지키지 못하면
마리앙느와 마자리니 뿐 아니라 루이즈, 롱빌, 시에스타, 공작부부, 그리고 모두가 전란에 휩싸이게 된다. 고민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그렇게 양은 스스로를 타일렀다.
사실, 양에게는 이 전란을 태개할 방법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시조의 계승자,
루이즈에게 양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도 루이즈도 이 방법을 도저히 실행에 옮길수는 없었다.
"미쳤다고 그런 바보신이 만든 나라를 받겠어!?"
여기에 대해서는 주종의 마음이 일치했던 것이다. 과연 공작부부는 이에대해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딸의 성격을 잘 알기에, 국가를 짊어질 그릇인지도 잘 알고 있었겠지.
"좋아, 이걸로 마지막이다."
추기경이 마지막으로 사인을 했다. 총 다섯장의 태피스트리 뒷편엔 귀족들의 혈문자가 빽빽히 적혀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서둘러 풍룡대를 불러 오세요!"
여왕의 명을 받은 위사가 달려나갔다. 곧이어 영기사 연대가 홀에 들어왔다.
"그럼 저와 같이 게르마니아로 갑시다. 더이상 지체할수 없어요, 꽤 긴 비행이 될겁니다!"
이에 용기사들은 각자 태피스트리와 여왕을 안았다. 추기경도 여왕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이는 발리에르 공작이 저지했다.
"추기경님! 지금 그 몸으로 비행은 무리입니다. 일단 성에서 기다리십시오."
"그럴수 없네! 조금이라도 빨리 내가 목을 내놓아야만 황제의 분노를 진정시킬수 있어!"
추기경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추기경의 모습에 여자들이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해서 더더욱 여기 계셔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몸을 그르치게 되면 모든것이 틀어집니다! 일단 황제와의 협상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공작과 추기경은 잠시 눈을 마주치고, 추기경이 먼저 눈을 돌렸다.
"후우...이런 내가 한심스러워 지는군."
"아닙니다. 양위에 대해선 제가 잘 설명할테니 걱정마십시오."
그리고 공작은 등을 돌려 홀 밖으로 나섰다.
"여보" "아버님!"
카린느와 엘레오노르, 그리고 루이즈가 공작을 불러 세웠다.
"아버님..."
또 어딘가에서 부르는 소리. 거기에는 시녀의 부축을 받는 카틀레아가 서 있었다. 카틀레아는 숨을 몰아쉬고 비틀거리면서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카틀레아! 설마 또 발작이..."
둘째 딸의 몸을 염혀하는 공작의 손을 카틀레아가 감싸 쥐었다.
"모쪼록, 무사히 돌아와 주셔요."
그리고는 곧바로 기침을 했다.
"...알았다. 안심하렴. 반드시 협상을 성공시키고 돌아오마."
공작은 아내와 딸들의 미소를 받으며 홀을 뒤로 했다.
성
에 남은 귀족들도 각자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또 누구는 가족들을 피난시기키 위해, 다른 누구는 영지
주민들의 의사 통일을위해서, 각자의 사정을 위해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게르마니아에 대한 방침은 결정됐다. 이 이후는 마리앙느와
발리에르 공작에게 맡길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남은 사람들은 눈앞의 위기, 대 알비온 전쟁에 대처하기 위해 트리스테인 각지로
달려나갔다.
석양이 비추는 추기경 집무실에 발리에르가 사람들이 모였다. 침대에 누운 마자리니가 힘겹게 말을 걸었다.
"이제 남은건, 알비온 함대를 막아낼수 있을지인가...제발 늦지 않기만을 기도할수밖에 없군."
그 말에 루이즈일행은 불안한 시선을 주고 받았다. 엘레오노르는 어이가 없다는듯이 양에게 따지고 들었다.
"참 잘 했어요. 그 짧은 시간안에 저런 사기를 생각해낼줄은 몰랐는걸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그 말에 양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사실, '2초 스피치'말고 다른 별명이 있습니다."
방안의 사람들의 이목이 양에게 모였다. 그리고 양은 당당하게 자신의 다른 별명을 거론했다.
"사기꾼입니다."
이제 그들은 생각하기를 관뒀다.
추기경이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물어가는 태양의 붉은 빛이 남쪽 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너머에선 트리스테인 함대가 알비온 함대와 포탄을 주고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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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아아. 한창때 동방맹월초를 번역하면서 4개월에 한편씩 CLR(소설판)이 나올때마다 진을뺐었는데 이번편을 하고 있자니 그때가 다시금 생각이 나네요.
분명 SS를 번역하는 아마추어 번역자들은 마조히스트거나 그 작품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일거에요. 네 저도 그중 한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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