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자매는 자매라는걸 남에게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이 똑같이 초하루에 태어났다. 언니는 3월 1일에 태어나서 야요이(弥生, 음력 3월). 나는 8월 1일생이라 하즈키(葉月, 음력 8월). 어머니가 어떻게든 우리의 생일을 같은 날로 맞추려고 하셨던건지, 아니면 월말을 생일로 하는 것이 싫어서 그랬던건지는 모르겠다. 설마 아버지의 성이 '이치노세(一之瀬)' 니까 어머니가 그것과 맞추려고 1일에 낳았다...같은 이야기는 아니었으면 한다.
그래도 똑같이 초하루에 태어났단 점에서 언니와 나 사이엔 무슨 운명같은게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릴적부터 언니를 정말 좋아했다. 문제가 있다면...언니와 나 사이엔 무려 7살이란 나이 차이가 있단거랄까. 나, '이치노세 하즈키'와 언니 '이치노세 야요이'가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나이차가 큰 것이다. 언니는 대학교 3학년, 나는 아직 중학교 2학년.
언니는 나보다 한참 앞서 다른 세계를 달리고 있다. 얼마 뒤면 언니는 사회인이 되겠지만 나는 아직 한참간 학생으로 머무르며 언니의 등을 바라보기만 해야한. 아무리해도 언니를 나이로 따라 잡는것은 불가능하다. 나이를 두배로 먹을 수 있는 기계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좋은 기계는 아직 세상에 없다. 남들은 나이를 절반만 먹는 기계가 있다면 얼마든지 그걸 이용하는데 돈을 쓸 테지만 나는 아니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교복을 입으며 거울을 본다.
"언니처럼 미인이 될 수 있을까..."
어머니를 닮아 선한 얼굴상에, 나올곳 나오고 들어갈곳 들어간 어른스러운 언니에 비해 나는 아직도 겨우 어른 흉내를 내고 있달까...좋게 말하면 큐트한 어린애다. 거울속의 이치노세 하즈키는 아침부터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물론 월요일 아침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왜 난 아버지를 닮은걸까..."
우울함이 가득한 담긴 한숨을 쉬며 나는 거실로 내려왔다. 오늘도 이전처럼 계속 반복되는 학생 생활을 해야 하니까. 이런 우울한 생각에 잠겨있으면 좋지않다고 혼난다. 어머니나 언니가 아니라(언니는 나한테 그런 말 할 사람이 아니다.) 내 친구한테서 말이다. 진짜, 어떻게 얘랑 친구가 됐는지 나도 신기할 지경이다.
"오우오우오우, 하즈킷치!! 오늘도 예쁘잖아!! 남자애한테 고백받은겨?"
"안녕, 야에. 그런건 야에 전문 아냐? 남자들이랑 친하잖아, 너."
"냐햐햐, 나 같은게 고백 받는건 엄청 부담스러운데 말이지. '노'라고했다 뒤에 상처입은 모습보면 미안하단 말야~"
조례 전의 교실에 스리슬쩍 들어온 내 친구, 요모다 야에(四方田八重). 시원스런 샤기컷이라 조금은 부럽다. 여튼, 야에는 반 애들 사이에선 여자다운 구석이 드문 상당한 괴짜다. 뭐 그렇다고 남자 교복이 어울정도로 성별을 잘못 고르고 태어났다는것까지는 아니고, 여자라면 보통 갖고있을 '화아~'한 분위기가 없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남자들이랑 잘 어울리긴 하지만 연애대상으론 보이지 않는...대충 그런 느낌이다. 연애같은거 해본 적 없는 내가 할 말은 아닌거 같지만.
"하즈킷치는 남친 안만들거야? 원하는대로 골라잡아도 백퍼 성공할텐데 말이지."
"별로 그러고싶진 않은데. 그게 남자는 다들...그렇잖아?"
"왜애, 건강하니 좋잖아? 아, 거기! 남자라면 한방에 모든걸 쏟고 쓰러져!"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아아, 야에는 항상..."
말을하다말고 교실 뒷편에서 레슬링 놀이를 하는 남자애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야에. 그런 모습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작년부터 야에랑은 같은 반이었지만 우리 둘 사이에 접점은 별로 없다. 동아리도 나는 연식 정구, 야에는 수영부로 서로 다르고, 또 야에는 여자애들 사이에서 좀(아니, 어쩌면 많이) 붕 떠있는 애인지라 극히 평범한 나로선 한동안 이름만 아는 사이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그런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1학년때 '어어? 글고보니 우리 둘 다 이름에 숫자가 가득하잖아? 1이랑 4랑 8인데, 이거 8의 공약수니까 우리 친구 하는거다?' 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듣고 어이가 나간적도 있었었다. 거기다 그땐 이름을 알지도 못했던 때라 더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둘 다 8월생이라 이름이 그리됐다는 걸 알고 나는 야에의 몇 안되는 '여자 친구'가 됐다.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가 이래도 되는건지 잘 모르겠다. 아직 14년도 안 살아본지라 이렇게 말하는것도 뭔가 좀 아닌것같지만...
"아참참, 하즈킷치? 어제 좀 뽈뽈거리다가 재밌는걸 봤었는데 말야."
눈 앞에 있는 의자를 당겨서 야에가 앉는다. 등받이를 가슴쪽으로 끌어앉는, 보통은 남자들이 하는 자세다. 그러면 분명 속이 보일텐데 야에는 아랑곳않았다.
"자전거 이야기?"
"응응, 강둑길에 있는 자전거 도로 타고 오는길에..."
머릿속에서 지도를 그려낸 뒤, '아 거기...'하고 생각한다. 야에는 자전거, 그 중에서 로드바이크를 취미로 하고있다. 약간이지만 나도 그쪽을 알고 있어서 야에가 나한테 친하게 대하는 한가지 원인이 됐다. 그쪽에 대해 깊은 내용을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평범한 여자애가 좋아할만한 화제는 아닌데다 내가 그렇게 자전거에 좋은 감정이 없어서...라고 할까 뭐랄까. 그래도 야에는 내 완곡한 거부 사인을 시원하게 무시하고 자꾸 말을 걸어온다. 일일히 싫다고 하는것도 그렇다보니 일단 응응, 하고 이야길 듣는다.
"길 한가운데서 여자 두명이 녹초가 되서..."
"여자라니...중학생?"
"한명은 그럴지도. 다른 하나는 꽤 어른스러웠는데...아, 대학생일지도 모르겠어. 응 그럴거야."
'자매끼리 자전거 타러 나온건가?' 하고 생각하며 야에의 말을 들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건지, 야에가 무슨말을 하는건지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이럴땐 그냥 느긋~하게 하는 말을 다 들어줄 수 밖에 없다.
"그랬는데 '니코 사이클'이라 적힌 져지를 입은 여자들이 와서 뭐라뭐라 이야기 하다가...뭐라 이야기하는지 엄청 궁금하긴 했는데 바빠서 그냥 와버렸어."
"응?"
'니코 사이클'이 무슨 말인가 싶어 무심결에 반응해버렸다.
'가만, 니코...niko? nico?'
거기에 생각이 다다르자 뭔가 짐작이 가는게 있다. 그거 나도 아는거란 생각이 든다.
"그, 그래서 말이지? 그게 그 니코 사이클 져지 입은 사람중 한명이 이 주변에선 깨나 보기힘든 '오더메이드 마키노 크로몰리'였다구. 와아, 경륜도 아니고 로드를 그것도 여자가 타고있다니 엄청나게 희귀한 구성이라 깜짝 놀랐어."
감격했다는듯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야에. 마키노 크로몰린가 뭔가라는게 그렇게나 보기 힘든건가? 그 마키노란게 영어로 MAKINO라면 나도 본 기억이 있는데....
"저...야에."
나는 살짝 헛기침을 하고 손가락으로 눈가를 당겨 실눈을 해 보였다.
"네가 봤다는 그 사람...혹시 이런 눈 아니었어?"
"어려운걸 묻네, 하즈킷치는... 고글을 하고 있어서 눈이 어땠는지 모른다구. 로드 라이더였으니까 말야."
"그럼 머리가 살짝 웨이브에 여기, 어깨까지 오고 그... 가슴이 크...진 않았어?"
"아 맞아맞아, 그랬었어. 응? 잠깐만, 그 사람 가슴 크기는 어떻게 알고 있는거야?"
나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말했다.
"그럼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머리를 두갈래로 묶은 중학생같은 사람 아니었어? 우리랑 키 비슷한."
"어, 어떻게 그것까지 알고 있는거야!? 혹시 하즈킷치도 그때 보고있었어? 설마 무인 정찰기로 24시간 관찰하고 있었던거야???"
"그런 스토커나 미군같은 짓 안해도 알수 있다구..."
"뭐어어? 어떻게 된 거야, 가르쳐 줘어!!"
의자에서 몸을 쭉 내밀며 야에가 가슴께까지 달려들었다. 야에는 내가 무슨 마법이라도 쓴 것 아닌가 생각하고 있겠지...
"안 가르쳐주면 하즈킷치가 막 벗어놓은 체육복, 남자애들한테 공개 경매로 내놓고 그 수익금은 전부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주는 복지재단에 기부 해버릴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런 말도 안되는 자선행사가 어디있어!!"
그러는 새 예비종이 울려 다른 애들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 이야기가 들렸는지 남자들은 '이치노세가 갓 벗어놓은 체육복!?'이라며 흥분하고, 여자들은 '요모다가 또...' 라는 미묘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하아...
"칫, 하즈킷치의 테니스복(이너웨어 포함)이면 분명 집 한채는 살 수 있을정도 돈이 나오는데...내가 많이 자제해서 체육복으로 해준것도 모르고(투덜투덜)"
"자제라니, 야에랑은 먼지만큼도 안어울리는 말 아닌가... 있다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자리로 돌아가."
"궁금해서 미칠거같은 상태로 한시간동안 참으란거야?"
손을 휘휘 저으며 가라고 하니 야에가 강아지마냥 눈을 글썽인다. 그러면 내가 꼭 나쁜짓을 한 거 같잖아...
"하즈킷치는 사디스트야!! '후훗, 어때 궁금하지? 알고싶다면 3층 여자 화장실에서...그 다음은 뭘 해야 할지 알고있지?'라면서 변태적인 일을 시키려는..."
"그런거 안해!! 것보다 야에 너 너무 남자애들 보는 만화에 빠져있는거 아냐?"
'아냐! 요모다한테 에로만화를 왜 보여줘?', '걔는 그런거 보면 부끄러워하긴 커녕 좋아죽기때문에 재미없다고!'라는 남자들에게 눈총을 줘 조용히 시킨 뒤 야에에게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이야길 마치지 않으면 혼날테니 간단하게 이야기한다.
"...그 사람 우리 가족이거든. 어제도 자전거 탔다는 모양이고..."
"아하!"
야에가 손뼉을 치며 납득한다. 이제 그만 자리로 돌아가겠지했는데...
"그럼 카레라 타던 트윈테일은 동생? 아, 그러고보니 닮은거 같기도... 가슴은 하즈킷치가 더 크지만!"
"그 말, 히나코 언니가 들으면 너 시로야마 댐에 내던져질걸."
"어, 어어? 아냐? 아, 잠깐만. 하즈킷치, 하즈킷치이~!!"
"으음. 그 사람이 하즈킷치의 언니인 야요이 언니인가..."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우물거리면서 야에가 고갤 끄덕인다. 벤치에서 야에와 같이 점심을 먹고있다. 오늘은 다른 여자애들이 없어서 다행이랄까 아니랄까...솔직히 가족 이야기를 할 때엔 주변에 사람이 없는쪽이 편하긴 하다. 무릎위의 도시락에 젓가락을 가져가면서 아침때 그 이야기를 계속했다.
"응, 그리고 같이 있던 사람은 언니 소꿉친구인 '사이죠 히나코' 언니."
"음? 야요이 언니랑 하즈킷치는 나이차 많이나지 않았었나?"
"맞아. 언니가 대학 3학년이니까 나랑 7살 차."
"그럼 초등학교 2학년때[각주:1] 하즈킷치가 태어났단 건가? 근데 그 히나코 언니란 사람...정말 하즈킷치네 언니랑 동갑이야?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본인도 신경쓰는 부분이니 그 말 안하는게 좋을걸. 나랑 비슷한 나이같다든가, 나이를 속이고 있다든가."
히나코 언니와 만나면 그걸로 자주 싸우곤 하는데 야에에게 거기까진 말 안하는게 좋겠지. 언니와 동갑에 대학도 같은곳인 히나코 언니는 그...나랑은 잘 안맞는다.
야에는 '오오오오...'하고 감탄한 얼굴로 페트병의 홍차를 한모금 마셨다.
"글고보니 언제 들었던거같기도... 하즈킷치네 가족중에 한 사람이 로드탄다고말야. 그게 언니였구나..."
"근데 언니가 타는 마키노란 자전거 말야, 야에가 그렇게 놀랄정도로 희귀한거야?"
"응 뭐 그렇지. 치바의 아비코에 있는 빌더가 만드는거라서. 이야긴 들어본 적 있지만 이 주변에서 실물을 본건 처음이야."
'아비코'라고해도 어딘지 잘 모르는 곳이다. 아마 디즈니랜드 저편 어딘거 같은데 그런 미지의 땅에서 온 자전거였구나, 언니건...
옆에 앉아있던 야에가 슬금슬금 다가와 뭔가 묘하고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으헤헤... 저기 있잖아, 하즈킷치. 혹시 나랑 언니랑 그...다리를 놔 주면 안될까?"
"뭐야, 그 이상한걸 생각하고 있는거같은 표정은..."
나는 팔로 야에를 가로막았다. 눈을 돌리면서 휘파람을 부는듯한 이상한 얼굴로 야에는
"그, 그런거 아닌데에~? '대학생이면서 마키노 풀 오더메이드를 타는 멋진 언니한테 이쁨받으면 안쓰는 휠 같은거 한두짝정도는 받을수 있지 않을까'같은 생각 한적 없다구! 하즈킷치에게 맹세코!!"
"아, 언니 창고에 바퀴가 주렁주렁 매달려있긴한데...그거 남 줘도 될텐데 모아놨단말이지."
"창고! 자전거 전용 창고라니...! 그거 한번 꼭 보고싶다!!"
"저기, 야에가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언니는 그...자전거 관련으론 이상한 사람이라구?"
일단 야에를 말려본다. 언니는 평범한 대학교 3학년이 아니니까. 자전거를 탈 때의 언니는 보통사람에겐 이해가 안되는 이상한 사람이 된다. 그런 언니가 있다는걸 야에가 알아버리는건 좀 그렇지만...그래도 야에의 관심을 돌리려면 어쩔 수 없다.
"주말에 훌쩍 나가선 300km인가 400km타고 오는 사람이야. 그것도 어디 자고 오는것도 아니고. 그런 말도안되는 거리를 논스톱으로 가는게 사람에게 가능할리가..."
"오오오오오오!! 랜도누즈[각주:2]구나!! 그랬구나...하긴, 여자가 매스드 로드레이스[각주:3]를 다니는건 힘들테니..."
하며 야에가 놀라며 뭔가 뜻모를 말들을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들은게 아니라면 지금 야에는 거리에 놀라지 않았다. 설마...하는 싫은 예감이 들어 젓가락이 멈춘다.
"......야에? 혹시 자전거 타고 최대 얼마까지 가 봤어?"
"으음... 센츄리 라이드 완주했었는데?"
"그럼 그 센츄리 뭐시기란건 얼마나 가는거야?"
"160km."
"......"
야에도 언니같은 이상한 부류였다!!! 지금까지 알고 지낸 기간동안 그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나는 얼마나 바보였던거지? 도시락 위로 엎드리는 날 보며 야에가 감탄하며 말한다.
"그만큼 달리는 하즈킷치네 언니가 대단한 거라구. 센츄리 라이드 정도는 하즈킷치도 금방 할수 있는거니 말야."
"그런 말 들어도 '아 그래'하고 수긍할리 없잖아."
"300km 오버는 나도 해 본적 없는데 역시나...마키노 오더메이드를 타는 사람답네!"
"아니, 그 정도 거리는 신칸센이나 비행기를 타고 가는거잖아. 그걸 자전거로 가다니 이해가 안돼."
정신을 다잡고 도시락의 밥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언니가 뭐가 즐거워서 주말마다 자전거를 타러 나가는건지 모르겠다. 그것도 나만 남겨두고 히나코 언니랑만...
"......"
야에가 피클을 물고 내 얼굴을 바라본다. 아차, 다른 사람의 취미를 어떻네저떻네 평가하는건 좋지 않은거였다. '미안'하고 생각할때에 야에가 꿀꺽, 하고 피클을 삼켰다.
"좋아. 그럼 바다에 가자, 하즈킷치!"
"뭐?"
난데없는 야에의 제안에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항상 그랬지만 야에의 뜬금없는 말은 따라가기 힘들다. 바다? 난데없이 나온 화제따라가느라 버벅이는동안 야에가 말을 이어갔다.
"하즈킷치도 로드 있지?"
"어, 어째서 거기까지 알고 있는거야?"
이번엔 내가 놀라고 말았다. 이제까지 야에한테 말한 적은 없지만 사실은 나도 로드바이크를 가지고 있다. 야에가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알아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
"역시 그랬구나."
야에는 다 안다는듯 나를 바라보았다.
"자전거를 타다보면 새걸 산 다음 이전타던것도 남겨두는일이 많거든."
"...그래? 언니가 특이한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런거야. 거기다 하즈킷치네 언니는 창고까지 갖추고 있을만큼 매니아니 분명 이전거를 남겨뒀을거라 생각했지."
"응, 언니가 이전에 타던걸 받긴 했는데..."
"그래? 그럼 프레임이랑 구동계 뭐야?? 아, 그건 직접 보는게 빠르려나... 그럼 하즈킷치, 자네에겐 지금 세가지 선택지가 있네!"
벤치에서 일어나 야에는 내게 손가락을 세게 펴 보였다.
"사가미 만과 도쿄 만, 태평양, 동해. 자, 어서 고르도록!!"
"네개잖아."
"응? 어, 그러네!? 여, 여튼. 이 중에서 하나 좋은걸로 골라!"
야에는 손가락을 하나 더 펴 내 얼굴 근처에서 팔랑거렸다. 뭔가 이야기가 풀쩍풀쩍 건너뛰었는데 아마도 하고싶은말은 그거다. 자기랑 같이 바다까지 자전거를 타자는 거. 그래서 그 목적지를 나한테 물어보는거고.
"...동해, 라고하면 어쩔거야?"
"솔직히 말하면 엄청 곤란해."
그렇겠지...그러면 혼슈를 가로질러야 하니까. 언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다, 다섯번째 선택지로 오사카 만이랑 미카와 만도 있어!"
"...너, 어디까지 사람을 끌고갈 셈이야?
야에는 히죽 웃으면서 손가락을 두개 겹쳐보였다.
"태평양은 가까워서 그리 어려운건 아냐. 그러니까 실제론 양자택일인 셈이지. 자, 도쿄 만인지 사가미 만인지 어서 골라, 어서어서어서!!"
"그럼 남쪽의 사가미 만. 전에 해수욕하러 가 본적도 있고 하니까. 에노시마나 치가사키나 어디든 좋아."
이 근처의 가장 쉬운 해안을 골랐다. 야에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가 바로 곤란해 하는 표정이 됐다. 대체 얜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거야?
"뭐야, 도전 정신이 없네."
"불만이면 혼자 가던지?"
"왜 도쿄 만이라고 안 하는거냐고! 무수한 언덕을 넘는다는 두근거림 가득한 코스인데...!"
"첫째, 일부러 보러 갈 만큼 예쁜 바다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쇼난[각주:4]이 좋아."
"그건 그렇네...뭐 괜찮겠지. 그면 주말에 시간 비워둬, 하즈킷치."
"아니, 근데 왜 내가 야에랑 같이 자전거를 같이 탄다는 이야기가 된 거야?"
야에는 다시 벤치에 앉아 남은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어먹기 시작했다. 내 질문에 야에는 음, 하고 가볍게 생각에 잠기더니
"...이치노세 가문의 야요이 언니를 알고싶어서지. 하즈킷치를 '자전거 대다내애~ 너뮤죠야...♡'상태로 세뇌하면 같이 따라오지 않을까같은 생각은 안했다??"
"그런 생각을 안 했대도 그런 말을 당사자 앞에서 시원스레 하는 야에는 바보를 넘은 무언가인거 같아... 차라리 이러는게 나로선 좋지만."
"헤헷. 칭찬받으니까 부끄러운데. 아이 참! 하즈킷치도 부끄러워서 그러는거지?"
"칭찬한것도 아니고 부끄럽지도 않거든?"
"음. 장난은 이쯤 하고."
이게 장난이라고... 야에의 말에 어이가 달아났다. 그러는 새 야에는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달려보면 알아, 하즈킷치."
"...뭐가?"
"뭐게? 그걸 내가 미리 알려주면 재미 없고, 하즈킷치가 바다 도착하면 자연스레 알게 될거니 말 안할래."
그리 말하는 야에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예뻐보였다. 나는 한번도 해 본 적 없는, 그리고 언니가 가끔 보이는, 뭔가 아득한 표정이었다... 금새 사라졌지만.
"와후, 주말에 하즈킷치랑 데이트다, 데이트! 우오오오오, 벌써부터 흥분되기 시작했다────!!"
남자들이 흥분했을때도 이 정도는 아닐만큼 흥분한 야에가 괴성을 지르고 주변 시선을 모은다. 아아... 야에랑 있으면 언제나 이런 부끄러운 일을 당한다니까.
"그, 그만해. 지금 저기 3학년이 보고 웃잖아..."
"순순히 나와 데이트를 한다면 더이상의 부끄러운 일은 없을것입니다."
"알았어! 알았다구, 주말에 시간 비울테니까...!! 하아..."
마지막은 야에의 노림수에 당한것도 같지만...달리면 알 수 있단 말이지. 대체 뭐길래?
일요일. 오늘은 야에와의 데이트...... 아니아니, 자전거 라이딩 날이다.
언니의 창고 한구석에 놓여있던 내 로드바이크를 오랜만에 꺼내왔다. 언니는 몸은 하나밖에 없으면서 자전거는 엄청 많단 말이지... 이러는 언니를 이해할 수 없다. 일단 타이어에 공기를 다시 채우고, 장갑에 헬멧(구멍이 뻥뻥 뚫려있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을 써 어디 불편한곳 없는지 체크한 다음 집을 나섰다. 언니는 벌써 새벽부터 나가서 안 보인다. 주말은 항상 이렇다. 언니와 함께 주말을 보내는건 집에 무슨 행사가 없는 한 불가능했다.
가볍게 한숨을 쉬곤 시청 옆 현립 공원까지 갔다. 오랜만에 탄 로드바이크는 평소에 타는 보통 자전거와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핸들이 멀어서 앞으로 푹 숙이게 되는지라 같은 자전건데도 여러모로 달라서...조금 무섭기도 하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를 확인해 본다. '먼 곳을 자전거로 가는일은 무섭구나.'하고 생각할 즘에...
"이이이이이야야야야야야얏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기다리게 해서 미얀해애, 하즈으킷치이이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무장한 야에가 달려들었다. 그 수영복같은 복장, 몸 라인이 다 드러나서 부끄럽지 않나? 하긴, 야에니까 별로 신경 안 쓸지도 모르겠다. 나는 스마트폰의 시계를 확인하고 야에에게 말했다.
"제시간에 왔네? 야에가 왠일이래."
"아니아니, 오늘은 그...하즈킷치랑 데이트니까 평소보다 한시간 일찍......어?"
"왜?"
야에가 날 보고 굳었다. 마치 파티 드레스에 운동화를 신은 엉뚱한 차림을 본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최대한 스포티하게 치마마지에 T셔츠라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역시 그 져지란걸 입어야했나? 그치만 내 져지는 없으니 좀 봐줘.
"저, 그...하즈킷치! 지금건 완전 안되겠는데!?"
로드바이크에서 내린 야에가 내 주변을 빙빙 돌면서 구석구석을 살핀다. 왠지모르게 진정되질 않아서 나는 야에에게 되물었다.
"뭐, 뭐야 갑자기...안된다니 뭐가?"
"아...하즈킷치는 지금 자기가 뭘 타고 왔는지 모르는거야?"
"로드 바이크...잖아?"
"아, 그거야 그렇지. 그치만! 하즈킷치의 이런 맹한 점은 나도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거시 이정도일줄은 전혀 생각도 못해서 지금 이 야에는 당황하고있다 그런거죠."
야에가 당췌 무슨 말을 하는건지 모르겠어서 무심고 인상이 찌푸려진다. 야에가 놀란건 내 패션이 아니라 자전거인 모양이다.
"이 하트마크 자전거...안되는거야?"
"아니 나쁘기는 무슨, 그럴리가! 이건 그러니까..잇츠! 투!! 익스펜시브!!!"
"난데없이 왜 또 영어야?? 그러니까...비싸다?"
"예쓰, 오브코스!! 거기다 구동계는 캄파 레코드니까 가격이 두배에...으헤에엣! 휠은 샤말이다! 역시 이탈리아 브랜드는 캄파로 조립해야지, 뭘 좀 아시네..."
쭈그려 앉은 야에가 뒷바퀴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뭔가 말한다. 아까부터 꼭 무슨 오타쿠처럼 이것저것 뜻모를 말들을 읊는다. 이게 외제라서 그렇게 놀란건가? 그치만 야에가 타고온 것도 외제같은데.
"야에의 자전거도 루이스 구...여튼 그것도 외국거 아냐?"
"루이가노. 프랑스계 캐나다인 챔피언 이름이 붙긴 했는데 엄연한 국산이야. 전통과 품격의 이탈리아 3대장[각주:5]과 비교하는기엔 격이 낮아도 한참 낮아."
'그래?' 하고 묻자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야에. 그럼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는 물으면 안될거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탄 로드바이크는 꽤 무서웠었는데 이게 또 깜짝 놀랄만큼 비싼 거였다니...금괴를 잔뜩 지고서 다니는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핸들쪽을 유심히 지켜보던 야에는 앞바퀴를 손으로 콕콕 몇번 찔러보고는 구부렸던 등을 일으켰다.
"와아, 타던 헌 자전거라기에 어떤걸지 머릿속으로 몇개 짚어보긴 했었지만 예상을 한참 뛰어넘을줄은...하즈킷치네 아빠는 큰 회사 사장님이랬지?"
"응. 그렇다고 하던데."
"역시 사장 영애가 타는 자전거는 다르구만! 마키노 풀 오더메이드를 타는 하즈킷치네 언니는 역시 레벨이 다른 사람이었어! 하지마아안!!"
야에의 루이...뭐였지, 여튼 자기 로드바이크쪽으로 달려가 그걸 끌고와선
"사이클리스트의 레벨을 정하는건 프레임도 휠도 뭣도 아냐! 바로 타는 사람의 다리힘인 거시다!!! 라고 야에는 힘껏 패배자의 변명을...!!"
"평소에 타는 야에랑 전혀 안타는 나랑은 비교가 안되지않아? 여튼 오늘 길안내 잘 부탁해."
그 말대로 내 다리로 야에를 따라갈 수 있을지도 솔직히 걱정이 된다.
야에는 다리를 들어 안장에 올라타면서 얼굴을 들곤
"조아! 그럼 마치다를 넘어 타마가와를 지나..."
"잠깐만. 너 대체 어디까지 갈 거야?"
"그야 당연히 태평양이지!"
"언제 그런말 했는데!?"
"하즈킷치의 자전거는 대단하신 자전거님이시니 치카사키 같은 곳에 가봤자 좋은점을 전혀 못 느끼겠다싶어서...안돼?"
뒤를 돌아보며 여전히 엉뚱한 말을 하는 야에. 대체 저 머릿속은 어떻게 된 건지, 밖에선 전혀 알 수 가 없다는게 무섭다.
"태평양이라면 치바를 지나 저 너머까지 간다는거잖아? 무리무리무리무리!!"
"자마에서 이누보사키쪽으로 쭉 직진한다 생각하니까 나 가슴이 쿵덕거리기 시작했는데? 좋았어, 바다로 갈까 아님 도심을 통과해서..."
"오늘 가는건 사가미 만이었잖아? 도쿄 만으로 바꾸면 나 안갈거야!"
야에에게 강하게 거부 사인을 보내자 헬멧 아래에서 분하다는듯이 핏, 하는 바라보는 야에. ...이제까지 이야기는 장난이었다고 믿고싶다. 만약 저게 진심이라면 나는 친구를 고르는 기준을 저 바닥부터 새로 고쳐야 할 테니까.
"......하즈킷치가 그렇게까지 말 한다면 어절수 없지. 오늘은 사가미 만으로 봐 주겠지만...사가미는 바다 사천왕 중에서 최약체. 녀석은 우리의 수치다..."
"이상한 소리 하지말고 어서 출발해...하아."
출발부터 다사다난한 자전거 라이딩이다. 저 요모다 야에랑 같이 다니는거니 만사 순조로울리가...
사가미 만으로 가는 길은 사카이가와 자전거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갈거라 생각했는데 야에의 코스 선택은 달랐다. 자마에서 에비나를 지나 사가마가와 강변도로, 46번 현도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 코스였는데...왜 자전거도로를 안 타냐고 물었더니 야에는
'곧장 바다로 가는게 아닌데다 지름길도 없잖아.. 히라즈카로 해서 129번 국도는 도로도 똑바르고 좋긴 한데 왕창 돌아서 가게되니깐...'
...그래, 역시 야에다. 이 직선 사고 회로는 누가 뭐라할 것 없이 야에다. 그런 야에가 앞에 서고 그 뒤를 따라가는 나...얘한테 내 운명을 맡겼다고 생각하니 도박에서 대박이 날거같은곳에 전재산을 털어넣은거랑 같은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아..."
날씨는 초봄이라 쾌청. 햇살이 눈부시다. 하지만 차도를 로드바이크로 달리는건 좀...익숙하지 않아서 무섭다. 그래서 그냥 야에 뒤를 그대로 따라간다. 도로에 여유가 있으니 차가 갑자기 끼어든다거나 하는 무서운 상상은 안 해도 될거 같다.
야에가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하즈킷치, 오늘은 느긋한 포터링이니까 보급이랑 휴식도 많이 할거야!"
"포터링?"
"응! 즐겁게 타는라이딩 같은거야~!!"
바람 가르는 소리에 지지 않겠다는듯 우리 둘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맞바람이란게 좀 걸리지만 선두에 선건 야에라 뒤에 있는 나는 편하다. 이 정도는 초보니까 누려도 괜찮겠지. 야에는 편의점이 보일 때마다 서서 휴식을 했다. 이렇게 자주 안 서도 괜찮지만 바다까지 얼마나 더 가야할지 모르니 그냥 하자는대로 하고있다. 그렇게 가면서 조금씩 팔이 뻐근해질 쯤
"아, 지금 여기를 달리고 있었구나..."
신호 대기동안 옆에 선 입간판을 보고 놀랐다. 야에가 음? 하고 뒤를 돌아본다. 입간판엔 '참배는 이쪽, 주차장은 저쪽'이라고 적혀있었다.
"사무카와 신사라니... 여기 참배하러 사람들 많이 가지?"
"아하, 하즈킷치네도 사무카와파? 신년되면 북적거리지~ 몇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밀어닥쳐서 꾹꾹 밀리니까...흐우, 생각하는거 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냐."
사가미 국 제일의 신사라 불리는 사무카와 신사. 이 일대에서 제일 유명한 신사다. 신년 참배때엔 참배객이 몰려들고 포장마차가 줄지어서서 걷기조차 힘들만큼 붐빈다. 지금 달리는 도로도 주차하려는 차들로 가득 들어찬다. 내 기억속의 사무카와 신사는 목도리를 입가에까지 끌어올릴정도의 추위와 자칫 미아가 될 수 있는 무지막지한 인파로 둘러싸인곳이지만
"....뭔가 거짓말같아."
오늘 신사 주변은 인적없이 한산하다. 분명 같은 신사인데 이세계로 빨려드는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멍하니 신사의 경내를 들여다보다 신호가 파란불이 되고...야에는 교차로를 지나지 않았다. 그대로 딱, 하는 소리와 함꼐 페달에서 발을 빼고(어떻게 돼 있어서 저런 소리가 나는거지?) 손을 뻗어 좌회전하잔 신호를 보냈다. 신사로 가자...는 건가?
"이왕 여기로 온거, 참배나 하고 가지 하즈킷치!"
"그래도 돼? 이대로 바다로 가는거 아니었어?"
야에니까 이대로 바다까지 한눈 안 팔고 그대로 쭉 갈줄 알았는데.
"여길 들른다고 해도 바다로 안 가는건 아니니까! 그리고 오늘은 포터링이니까 이렇게 한눈 팔지 않으면 재미 없잖아?"
하지만 야에는 괜찮다는듯이 손을 흔들며 답했다. 야에답지않게 괜찮은 제안이었다. 왠일이야? 라고 묻는건 참기로 하자. 야에가 레크리에이션한 기분이 될 때도 있을테니까. 응, 얘도 결국은 여자니까.
"마침 또 여기가 오늘 코스 중간쯤이잖아. 여기 입구에 찻집이 있었지? 거기서 좀 길게 쉬다가..."
"다행이다... 저기 발코니에서 쉴수 있겠네. 편의점 밖에서 그러잘까봐 살짝 걱정 했었는데."
"그리고 이것저것 사무카와서 소원도 좀 빌고~"
"거기서 우리 언니랑 친해질 수 있도록 해달라 할거지?"
"드, 들켰다~? 아, 근데 그거 하즈킷치 소원 아냐?"
"어?"
"아, 파란불 왔다! 좌회전 좌회전[각주:6]!!"
야에가 황급히 뛰쳐 나가고 나는 그 뒤를 따른다. '언니와 친해진다'는게 내 소원이라니...무슨 말일까? 야에가 그냥 적당히 던진 말일지도 모르겠다. 여기 신사의 신이 정말 그걸 들어준다면 돈은 얼마든지 넣어 줄 수 있다...는 기분은 조금은 있지만.
남쪽으로, 남쪽으로... 검은 쫄바지 뒤꽁무니를 따라간다. 신년 참배때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고요한 경내에서 참배하고, 찻집에서 한가롭게 과자까지 먹은 다음 라이딩을 재개했다.
46번 현도는 산업도로라 넓고 직선으로 뻗어있어서 차도 꽤 다니는 도로지만 야에 뒤에서 달리니 그렇게 무섭지만은 않은것도 같다. 내가 탄 탈것에서 별다른 소리가 안 나는것에 뭔가 신기한 느낌도 든다는걸 달리면서 알아차렸다. 차나 전철을 탈땐 자기 주위에 기계소리가 가득하다. 하지만 자전거는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지나는 것 외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정적이 몇번이고 찾아와서... 의식이 그대로 녹아버리는듯한 기분도 들었다.
"어~이, 하즈킷치. 혹시 지쳤어?"
"아직...괜찮아. 엉덩이가 약간 그렇지만."
"그래...뭐 무리하지 말고 느긋~하게 가자구."
야에가 내가 따라올 수 있게 조금씩 페이스를 늦춰주고 있다. 달리면서 점점...뭔가 화가난다.
"하아, 하아, 으, 으음..."
내가 야에의 발목을 잡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내가 야에에게 방해가 된다면...언니에게도 나는 방해되는걸까? 지금 내 앞을 달리는게 언니가 아닌건 그래서인걸까...? 단조로운 직선도로라 핸들을 잡고 페달을 밟는동안 명상같은 감각으로 그런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야에도 달리는동안 계속 앞을 보고 있어서 대화를 못하다보니 더 그렇다.
왜 우리 자매는 7년이나 떨어져서 태어난걸까. 왜 언니는 나를 내버려두고 늘 어딘가로 뛰쳐나가는걸까. 왜, 왜, 왜 나는 언니를... 쫓아가는걸 그만뒀을까.
지금 이렇게 로드바이크를 타는건 대체 왜? 오늘 이러는건 야에가 그러자고 했으니까. 하지만...그것뿐만은 아닐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리가 아파오고 점점 엉덩이의 감감이 없어지는데도 계속 페달을 밟는 이유가 설명이 안된다. 이대로 돌아갈 순 없으니까? 아니면......
"하앗... 으응!"
"아핫, 바람에서 소금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걸...조금만 더 가면돼~"
야에는 달려나가면서 민감하게 환경의 변화를 읽어냈다. 그것조차 못하고 그저 뒤를 따라가기만 하는 내가 점점 비참하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수도 없고...
"수고했엉~! 여기가 바로 사가미 만...이 아니라 아직 하구(河口)지만!"
"와아..."
눈 앞에 펼쳐지는 짙은 남색의 광경.
우리는 치가사키와 히라즈카의 사이에 놓여있는 큰 다리의 보도에 서 있었다. 약간이지만 촉촉히 들러붙는 바닷바람이 머리카락과 얼굴을 어루만졌다. 로드바이크에서 내려 난간에 기대본다.
크게 숨을 쉬며 바닷바람을 마시는 야에 옆에서 나는 헬멧을 벗고 바다를 바라본다. 어릴적에 몇번이고 왔었던 낯익은 경치일텐데...
"......."
"응? 왜그래 하즈킷치?"
"뭔가 이상해. 사가미 만은 몇번이나 봤는데 이제까지랑 전혀 다르게 보여."
이제야 바다에 왔다...그 순간 고민의 늪에서 머리가 빠져나왔다. 힘들었던 탓인지 계속 네거티브한 생각에 빠져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말 자전거로 바다에 도착했다는 성취감이 점점 퍼져 나가고, 눈에 들어오는 것들과 살갗에 닿는 신선한 느낌에 그간 뭐 때문에 끙끙 앓고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내 옆에 야에가 같이 난간에 기대섰다.
"응, 다 그런거야. 이게 즐겁지 않으면 롱 라이드는 할 수 없지."
병을 들고 물을 마신 야에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도 야에가 내민 병을 받아 한모금 마셨다. 안에 있던건 물이 아니라 스포츠 드링크였지만 청량음료 만큼이나 달게 느껴졌다.
우리 뒤를 달리는 차 때문에 파도 소리는 안 들린다. 아니, 이 다리 위에선 본래 안 들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리 신경쓰이진 않는다.
"그렇구나. 자기 발로 직접 오지 않으면...이런 경치는 못 보는 거구나. 그래서 언닌..."
오래 타면 탈 수록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그래서 믿을 수 없을정도로 먼 거리를 자전거로 달리는 걸까. 그걸 지금까지 비밀로 해 왔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 억울한 감도 든다.
"어째서 언닌 날 데리고 다니지 않는걸까."
"내 생각엔... 야요이 언니는 하즈킷치가 자기 스스로 따라오길 바랬던게 아닐까하는데?"
"......."
야에의 말에 나는 깜작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슥, 하고 야에는 난간을 등지고서선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즈킷치의 데로사, 그거 평소에 많이 안타고 다녔지?"
"응..."
"그럼 항상 타고 다니는 내 루이가노랑 다르게 방치되있었단 거잖아. 근데 변속기랑 브레이크 케이블이라든가, 휠같은게 제대로 정비돼 있었어. 피팅도 하즈킷치에게 딱 맞춰져 있었구."
야에가 출발 전에 자전거를 봤던건 보기힘든 비싼 자전거여서가 아니었었구나. 보면서 그런것까지 확인했을 줄이야...
"그렇단 말은 비싼 자전거니까 미련이 있어서 그랬던건 아니란 거지."
"그럼 언니가...?"
"응, 하즈킷치가 언제 타도 문제없게끔 정비해왔다고 생각해."
야에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물통 이리 달라는 제스처를 했다. 벌컥벌컥 드링크를 마신 뒤 야에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하즈킷치가 언니한테 이것저것 복잡한 기분인거같아서 '자전거 타고 달리다보면 풀리겠지...'싶은 생각으로 이렇게 달리자고 이야기 꺼냈었던거야."
"역시 체육계다운 발상이네... 꽤나 말도 안되는 소리같은데."
"내가 해 줄 수 있는건 이런거밖에 없으니까 말야~ 근데 생각지도않게 야요이 언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됐단 말이지. 그래서말인데 하즈킷치."
야에는 일어서면서 나와 마주본뒤...손을 내밀었다.
장갑을 낀 오른손을 나는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계속 같이 타자. 평소엔 솔플이었지만 오늘은 같이 타서 정말 즐거웠어."
"야에...?"
"하즈킷치를 제대로 자덕후로 타락시키면 분명 하즈킷치네 언니랑도 사이좋게 될수 있겠지? 장수를 잡으려면 우선 그...여튼 대충 그런 말도 있잖아. 아는 말인데 잠시 생각이 안나서 그러는거야, 이거?"
"야에의 솔직함을 칭찬해야하다니, 왠지모르게 조금 분하네."
아하하, 하고 야에가 웃는다. 그래도 야에는 진지한 얼굴로
"같이 다니면서 야요이 언니를 따라가는거야. 분명 언니도 하즈킷치를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따라잡을수 있어. 7년이란 차이가 있어도 언젠가 분명...아니, 지금 바로도 가능할거야."
"그렇, 구나..."
만일 여기까지 같이 자전거를 타고오지 않았는데 그런 말을 들었다면 나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쓸데없는 참견 하지 말라면서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바다를 보면서 야에의 말을 들으니 야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잘 이해됐다. 언니가 자전거를 타면서 어떤걸 느끼고 있는지도 조금이지만 알게 됐다. 그리고 언니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야에의 시선에 답했다.
"아직 언니를 따라가기엔 모자라지만 그런것도 감안해서 이것저것 많이 가르쳐 주기야? 언니를 따라잡게 됐을때 창피당하긴 싫으니까."
"무슨, 나야말로 이것저것 잘 부탁해. 하즈킷치."
우리들은 꽉, 하고 악수를 하며 친구란 관계에 다른 하나를 더 추가했다. 롱 라이딩 파트너라는 관계를... 둘다 기쁘면서도 쑥스러워 왼손으로 어깨를 두드린다거나 멋쩍게 웃거나 하면서...
그런데 요모다 야에와 함께 다닌다는게 이런 감동적인 엔딩일리가 없다. 지금까지 너무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가는건 뭔가 이상한 것이다...
"자, 그럼 다시 살살 밟으면서 돌아가 볼까!"
...가만, 지금 뭐라고?? 야에는 물병을 케이지에 꽂은 뒤, 안장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걸 멍하니 바라만 보는 나...
"어...저기 오늘은 이걸로 끝, 아냐?"
감동에 젖어있어서 나 스스로도 멍청한 말을 했단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여기 이 다리가 종착지가 아닌건가? 여기서 차를 불러서 돌아건 아닐테니 이상한건 야에가 아니라 나라는건 알겠는데...
"여행은 집에 돌아갈때까지가 여행이라고 초등학교때 안 배웠어? 롱 라이드도 마찬가지라구?"
헬멧의 턱끈을 고쳐 매면서 야에가 말한다. 성취감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주저앉을정도로 피로감이 가득한데...하긴, 자전거를 이정도로 탄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 돌아가는길도 달려야 한다는걸 깜빡하다니...실수했다!
"저, 저기 잠깐만. 지금 나 다리도 엉덩이도 내 몸이 아닌거같이 아픈데..."
"내가 할 수 있는말은...힘내라, 이상!! 그럼 돌아가는길은 지름길로 쭉 간다~!!"
"흐아아아아앙!!"
언젠가 한다고 했던 하즈키와 야에의 이야기, 퍼슈터즈입니다. 한동안 가나를 그대로 읽어서 '파 슈터즈'라고 하고 뭐지뭐지 무슨뜻이지하고 있었는데 지금 찾아보니 Pursuiters(따라가다는 뜻의 pursuit+er)였습니다. 분명 투어링가이드 1권 나왔을때 하즈키가 야요이를 따라간다는 내용 읽어놓고서도 거기서 pursuit을 연상하지 못하다니, 의무교육 12년에 그 이후로 십년가까이 공부 헛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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