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은 칙칙한 잿빛에 잠긴 마을과 끝없이 내리는 비.
나, 이치노세 하즈키는 햄버거 가게 2층의 창가측 박스석에 앉아있다. 접은 우산은 탁자에 기대놓고 비바람에 젖은 가방을 닦으며 숨을 돌리는 중이다.
장마가 내리는 6월, 이 시기엔 비가 안오는 날이 적다. 우울한 레이니 데이...같은지라 자주 혼자서 창 밖을 바라보게되곤 한다. 스니커의 밑창이 젖은 타일을 밟아 나는 삑삑소리가 다가온다.
"아으...이맘때는 역시 안되겠다니깐. 하즈킷치. 자리 맡아줘서 쌩유~"
"야에, 이건...?"
"먹을래? 하즈킷치가 먹을만큼은 있어. 감튀는 식으면 맛없으니까 빨리 먹어야겠지만."
트레이 안엔 턱하니 감자튀김 3인분과 L사이즈 콜라, 내가 부탁했던 S사이즈 오렌지 음료가 놓여있었다. 나는 야에의 좋게 말하면 야성적인, 나쁘게 말하면 여자같지않은 얼굴과 트레이 위의 산더미같은 탄수화물 덩어리를 번갈아 보고 신음한다. 아무리 봐도 여자가 아닌 훈련을 마친 야구부원이나 유도부원의 간식 수준이다. 4시를 넘겼으니 배가 고프지 않은건 아닌데, 풋풋한 여중생 두명에게 이 감자튀김은 너무 많았다. 그런데도 감자튀김에서 뿜어나오는 뜨거운 기름 냄새에 식욕이 자극되는게 분하다.
"...조금만이야? 이런거 너무 먹으면 살 찌니까."
아직도 뜨끈뜨끈한 감자를 집으며 말한다. 의기양양해 하는 야에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다. 조금이면 괜찮을거라는 생각으로 감자튀김을 집다가 정신을 차렸을때 기름과 소금 맛에 뇌가 자제력을 잃고 반이나 먹어버릴까 무서우니까. 하지만 야에는 감자튀김을 한주먹씩 집어 삼키며 가슴을 펴고 말한다.
"무슨 말이야 하즈킷치. 살 찌는건 지방과 탄수화물 탓이 아냐! 운동부족이라구. 그러니까 이만큼 감튀를 먹어도 운동하면 문제없단 말씀!:
"그 중요한 운동을 어떻게 할건데? 이 빗속을 자전거로 달릴거야?"
"하긴 그래. 이 빗속을 뚫고 달린다음 뒷처리가 큰일이란 말이지..."
...비가와도 타는구나, 야에는. 폭풍우 속에서 '이얏호~!!'하며 달리는 야에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이상하게도 특이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아~ 로라 갖고싶다아~ 집에 평로라같은거 남는거 없어?"
"로라라니...운동장이나 코트 다지는 그 롤러 말하는거야?"
"아니 그거 말고. 실내에서 자전거 탈수 있게 하는거 있어."
야에는 한손엔 감자튀김, 다론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는 이래저래 만진 뒤 이미지 검색결과를 내밀었다. 기름으로 액정이 번들거리지만 그런거엔 신경 안쓰는 야에였다. 3개의 롤러 위에 올라탄 로드바이크 사진을 보니 봤던 기억이 있다.
"응, 이거 언니 창고에 있어...아마도."
"역시! 역시 그렇구만! 하즈킷치네라면 당연히 있을거라 생각했어! 아아, 어떻게 안되려나~ 조금이라도 타 봤으면싶은데에~ 이왕 빌리는김에 하즈킷치네 언니랑도 사이좋아졌으면 싶은데~에헤, 아하하, 아하하하하하~"
감자튀김을 먹으며 내 얼굴이 심각해졌다. 야에가 집에 온 적은 없지만, 오면 분명 뭔가 큰일이 날것같다. 그 창고에 야에를 데려가도 되는걸까...
"그 로라라는거...그걸로 비오는 날에도 자전거를 타고 훈련하는거야?"
"응응, 나도 하나 갖고싶은데 우리집은 아파트라 층간소음때문에 안된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수납 문제랑 돈 문제도 있고..."
그렇구나. 고민같은거 안할것같은 야에도 나름 고민거리가 있었구나. 나도 아직 따뜻한 감자튀김을 집어들면서 야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방에서 로라를 타면서 숨을 헉헉 내뱉고 등에 땀이 줄줄 흐르는 상태에서 오랫동안 타지못할거같고말야."
"아, 그건 알거같아."
"그러니까 역시 로드의 매력은 도로주행이라니까! 다행히도 주말엔 갠다는거 같으니까 또 데이트하러가자, 하즈킷치!"
야에는 길쭉한 감자튀김을 분필처럼 쥐고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입에 남아있던 감자튀김을 오렌지 음료와 함께 목으로 넘기면서 답했다.
"싫어."
"왜? 왜애!? 설마 하즈킷치는 내가 싫어진거야? 서, 설마 나 말고 다른 여자애를 사귀어서 주말에 걔랑 나가기로 약속했다거나 한거야!?"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럼 마음이 변해서 로드에 질려버린거야? 안돼안돼, 모처럼 얻은 운동할 기회를 걷어차고 과자에 빠지면 뒤룩뒤룩 쪄 버린다구? 턱이랑 볼이 둥글빵실하고 육즙이 좔좔 흐르는 삼겹살녀가 되버려!!"
양손을 붕붕 휘둘러가며 다른 사람들 보기 부끄러울정도로 충격받았단 포즈를 취하는 야에. 반사적으로 있는말 없는말 뱉아버릴뻔 한걸 심호흡으로 겨우 참아냈다. 체중같은건 별로 신경 안쓰거든...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아직 자전거를 포기한다거나 싫어졌다거나 하진 않았다. 야요이 언니와 나를 이어주는건 언니동생이란 혈연관계뿐만 아니라 자전거도 있으니까. 언젠가 내가 언니를 따라잡기위해선 자전거를 탈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야에와 같이 타는건 아직까짐 좀 꺼려진다.
"그런건 아닌데...야에랑 같이 다니는건 좀 그렇지 않나해서..."
"왜, 왜? 같이 페달을 밟은뒤 사가미 만에서 석양을 보며 약속했었잖아~!"
몸을 쭉 내미는 야에에게 뭐라 말을 해야할까. 야에의 성격이라면 일단 생각나는대로 다 말하는쪽이 나을것같다.
".....그도 그럴게, 휴일마다 처음 들어보는 산에 끌려가서 겨우 도착했다 싶었더니 그대로 돌아가게 된다던가해서 그대로 뻗어버릴거 같단말야. 뭘 할지 전혀 모르는채로 라이딩 왕창 시킬거잖아, 야에는."
"윽..."
"중간 휴식도 편의점 밖에서 선채로 할테고... 다른 사람들이 곁눈질로 이상한 애가 있다면ㅅ서 눈치받는것도 싫고, 모처럼 맞이하는 휴일인데 엉딩이는 아프고, 팔과 등은 쑤실때까지 타는...그럴게 뻔해."
이것도 언니를 따라잡기위한 수행이라하면 못견딜건 아니지만 그래도 뭔가 아닌것같다. 야에의 등을 따라가기만 하면서 뭘 하는지도 모른채 녹초가 돼 하루가 끝나는것이 계속된다면 자전거가 싫어질거다, 분명. 그게 싫다. 언니를 따라가기위해 시작한 자전거가 싫어진다니 본말전도다. 라고 생각한걸 야에에게 전부 말할순 없다. 그런 부끄러운걸 말할 수 있을리가 없다.
야에는 감자튀김을 이쑤시개처럼 물고선 생각에 잠겼다.
"으음, 그런가... 나는 하루종일 달리면 행복해지니까 하즈킷치도 그럴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혹시 자전거타는 사람들은 전부 야에같은 사람들이야?"
"응, 거의 그럴걸. 하즈킷치네 언니도 로드레이스가 아니라 롱 라이딩 다니잖아?"
"응, 주말만 되면 자전거타러 나가."
"그럼 휴일에 자는시간 이외엔 안장에 앉아있고싶은 타입이 아닐까싶은데...뭐 난 그정도로 오래 타는 타입이 아니라 상상이긴 하지만."
그런 말을 듣게되니 왠지 내가 잘못한것만 같다. 로드바이크를 타는건 재미없다고 생각한 내가 잘못한건가...하는차에 야에가 고개를 끄덕인다. 야에는 눈썹이 처져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유명한 모 고양이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나도 하즈킷치랑 같이 다니면서 너무 내맘대로 했을지도 모르겠어.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난 하즈킷치처럼 잘 참질 못하니까 엄청 화내서 뭔가 큰일을 냈을지도...미안해."
감자튀김을 한개 더 입에 넣은뒤 야에는 반성의 말을 했다. 나는 비가 좀 잦아든 회색의 거리를 바라보며 할했다.
"뭐가 어쨋든, 이렇게 비가 오는데 주말에 달릴수 있을지 모르잖아.
"일단 확률은 반반이야. 나는 맑았으면 하는데 말이지..."
"그럼 조금은 쉬고싶어. 여러모로 부족한 날 야에가 챙겨주는건 언제나 고맙게 생각해."
나도 손을 모으며 야에에게 감사의 행동을 보였다. 나 혼자라면 어디를 어떻게 다녀야할지 모른다. 로드로 좀 더 멀리, 빨리 다니지 않으면 언니에게 닿지 않는다. 언니를 따라잡긴 커녕 같이 다니는 사람들의 발을 붙잡게될 지금의 나 자신이 싫다.
"그렇다면... 장마가 끝나기 전까진 날씨가 어떨지 모르니 만족스럽게 달릴수 없으니...으음, 빨리 여름아 와라~"
"장마도 싫지만 열사병에 걸릴것 같아서 여름도 별론데."
"이렇게, 져지랑 빕숏 소매를 따라서 팔이랑 허벅지에 탄 자국을 남기는건 로드 라이더라면 당연한거라구? 하지 않겠나, 하즈킷치!"
목과 팔, 허벅지가 갈색으로 익은 내 모습을 상상하다 이상한 꼴을 한 팬더가 생각나 붕붕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런 야구부원같은 이상한 자국을 남기면 수영복 입어야 할때 부끄러워서 어떻게 나가..."
"그러고보니 학교 수영복 말고 딴걸 입은 하즈킷치는 본 적이 없네... 개인 수영복 차림의 하즈킷치를 상상하는것도 재밌겠어~"
므흐흐흐흐...하고 묘한 웃음을 짓는 야에의 반응에 곤란해진 나. 대체 얜 내 수영복을 봐서 뭘 하려는거지.
통, 하고 가슴을 두르리며 야에가 말했다.
"흐흠, 나도 똑같이 태울테니까 하즈킷치도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둘이 같이 순백의 절대영역[각주:1]을 자랑하면서 츠치도나 에노시마에 가는거야!"
같이 바다로 가는건 야에에게 이제 기정 사실이 된건가...근데 하나 걸리는 게 있다. 나는 빨대에서 입을 떼고 의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그 바다까지 자전거로 갈 셈이지?"
"그럼! 자전거와 수영은 궁합이 잘 맞는 스포츠거든! 트라이애슬론 인구는 넘쳐난다구!!"
"그런 혹독한 세계에 날 끌고 가지 마! 자전거를 타고 바로 수영이라니, 그러다 발에 쥐가나서 빠져버리면..."
"그땐 내가 인공호흡 해줄테니까 걱정 마, 하즈킷치."
"사람이 빠질때까지 방치하지 마! 그전에 꺼내라구!!"
그런 식으로 야에와의 주말 라이딩 이야기가 흘러갔다.
다음날도 여전히 비가 내렸다. 야에가 프린트를 들고 내 자리로 오길래 또 숙제를 안 했구나라고 생각했더니... 팔랑, 하고 그 프린트를 내 책상위에 올린다. 잉크젯 프린터로 인터넷 페이지를 인쇄한 거였다.
"저기 하즈킷치, 우리 여기 안갈래?"
"뭔데? 어디서 과자 박람회라도...하긴 야에가 그런데 관심가지진 않지."
야에가 내민 종이를 들고 읽는다. 쇼난 사이클링 페스티벌...개최일은 이번 토요일이라 적혀있다.
"히라츠카 경륜장에서 하는 자전거 이벤트야. 하즈킷치는 경륜장에 가본적 있어?"
그 말에 얼굴이 찌푸려진다. 경륜이란 말엔 아무래도 좋은 이미지가 없다. 그곳을 찾는 사람은 다들 일확천금을 노리고 욕망에 불타는 눈을 한 어른들이니까.
"그럴리가 있니. 도박은 하면 안되는거잖아, 우린 아직 미성년자니까. 가만, 야에 너 설마 경륜장에 매일같이 드나드는건..."
"에이. 그럴일은 없으니 안심하시게, 하즈킷치. 내가 경륜장에 관심 가지는건 이럴때 뿐이니까. 경륜이랑 관계가 없진 않지만 미성년자도 들어갈 수 있는거야."
야에가 내 앞자리에 앉는다. 웹 페이지를 출력한 프린트로 대체 뭘 하겠단건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고개를 들고 야에에게 물었다.
"사이클 페스티벌이란건 어떤거야?"
"자전거 메이커들이 모여서 전시회를 하는게 제일 큰 특징이려나? 꽤 큰 메이커들의 신차를 보고 시승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야."
"흠...히라츠카에서 그런걸 하는구나. 그런거면 요코하마나 도쿄같은 도시에서 하는줄 알았어."
같은 현[각주:2]내인데 히라츠카는 쇼난의 여름 바다나 칠석, 축구 팀 이외에 뭐 하는게 있나하는 이미지여서 거기서 자전거 이벤트가 열린다니 뭔가 뜻밖이다싶다. 뭣보다 요코하마나 아츠기아 아니라 히라츠카에 경륜장이 있다는건 처음 알았다. 어째서지?
"물론 도쿄도 하지. 매년 11월에 사이클 모드라고 크게 하는게 있긴있어...그건 마쿠하리라 엄밀하게는 치바지만. 치바의 특산물인 '자칭 도쿄 뭐시기'중 하나야."
"야에는 거기도 가?"
"그럼. 관동권 사이클리스트에겐 중요한 정보 수집의 기회니까."
"...자전거로?"
"못할것까진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회장 주위에 비싼 자전거를 노리는 도둑놈이 있대. 내건 루이가노니까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그래도 괜히 가져갔다가 손해볼 필욘 없는게 좋잖아."
자전거 도둑이란 말에 몸이 움찔, 하고 반응한다. 만약 언니에게 받은 로드바이크를 누군가가 가져간다면 난 그자리에서 주저앉아 울것같다. 그런 위험한 곳에 자전거를 가저갈 순 없다는 야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입장한 뒤에도 보통 일이 야냐. 사이클모드는 손님이 많아서 로드나 MTB 시승하려 해도 물건 따라선 세시간 넘게 기다려야하는 경우도 있어."
생각만으로도 큰일이란 얼굴을 하는 야에. 자전거를 타기위해 1시간 대기...난 절대 못한다, 그런거.
"디즈니랜드 대기행렬같네."
"자전거 라이더들에겐 최고급 로드 시승은 빅 썬더마운틴이랑 동급의 즐거움이니 말야.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면 거의 동급 모델을 근처에서 탈 수 있는 히라츠카는 중요한 이벤트야."
"그거 말곤 또 뭐가 있어?"
"자전거 관련 무대이벤트나 모의 경륜 같은거? 아, 경륜장의 뱅크를 체험해 볼수도 있고 의류 직매회도 열려."
하나하나 생각나는 것들을 꼽는 야에. 하지만 뭔가 제일 중요한게 기억이 안나는지 계속 뭐라뭐라 하다 마침내 손을 통, 두들겼다.
"아, 그리고 먹을것도 잔뜩 있어! 그때 쇼난 구르메 페스티벌도 같이 열리거든! 이게 제일 좋은 점! 어때, 하즈킷치. 같이 갈래?"
상체를 흔들거리면 내 의사를 물어본다. 자전거 관련만 있다면 좀...이라 생각했는데 먹을것도 잔뜩이란 말에 좀 흥미가 동한다. 이제 야에도 조금씩 나를 알게됐단걸까.
일단 머릿속으로 지도를 떠올려본다. 경륜장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히라츠카 역 주변과 사가미 강과 해변 정도는 안다. 전철로 간대도 오다큐[각주:3]도 근처는 안 가고 내륙으로 들어가니 아츠기와 치가시키에서 두번 환승해 도카이도선으로 가야한다. 여기서 히라츠카 역으로 가느니 차나 자전거로 바로 가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짝 경계를 하며 야에에게 물었다.
"설마 자전거로 가는거야?
"응, 날이 좀 개면 말이지. 히라츠카역에서 경륜장은 은근 멀어서 걸어가면 시간 걸리니까 자전거가 편해. 그럴거면 아예 출발할때부터 자전거로 가는게 낫지."
야에는 목에서 뚝뚝 소리를 내며 말했다.
"자전거 이벤트는 자전거로 가는게 제일 좋고, 마쿠하리랑은 달리 여긴 자전거 도둑은 걱정 안해도 되니까 괜찮아~"
물론 자물쇠는 단단히 채워둬야하지만, 이라 덧붙이는 야에. 나는 야에의 제안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제 야에에게 끌려다니는건 싫다고 했었지만 너무 성급했다.
밤이되고, 그땐 말이 너미 지나쳤다며 반성한 뒤 야에에게 사과 문자를 보낼까했지만 결국 보내지 못했다. 야에는 야에 나름대로 내 의사를 존중해서 어떻게 하면 내가 싫어하지 않을지 여러모로 생각해줬다.
목적 없는 라이딩이 싫다고 했으니 가기 쉬운곳에 있는 이벤트를 소개해 준 거다. 편의점에서 쉬는게 싫다고 했기 때문에 회장에서 맛있는 것을 먹자고 했다. 나와 같이 달리고싶다는 야에의 배려를 느끼고 부끄러워졌다.
"비가 오면 어쩔수 없이 전철을 타고 가야겠지. 그리고 비오면 시승도 거의 중지되니까 아쉬워. 이왕이면 토일 둘중에 하루라도 맑았으면...하고 마음 저 깊은곳에서부터 빌고싶어."
손을 목뒤에 감고 기지개를 펴면서 야에는 비가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더. 야에가 이렇게까지 날 신경써주면서도 그걸 생색내지 않는게 고마웠다. 만일 '하즈키를 생각해서 찾아온 거니까!'라고 말 했었더라면 솔직히 거절했을거라 생각한다. 근데 야에는 어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까맣게 잊고선 그냥 이 이벤트에 가자 했을지도 모른다. 야에라면 있을수 있는 이야기긴 하다.
"응, 토요일엔 별다른 일 없으니까 쇼난 사이클 페스티벌에 갈게."
"정말? 아싸!!"
벌떡, 몸을 일으키며 야에는 해냈다는 포즈를 취했다.
"그럼 토요일날 비 안오게 테루테루보즈[각주:4] 만들면서 주말을 기다려야겠다! 아, 그러고보니 한참 로드를 안 타서 안장에 버섯이 자랐을지도 몰라!!"
"암만 그래도 그런데 버섯은 안생겨, 버섯은..."
솔직히 나는 어느쪽이든 상관 없었지만, 자전거로 가면 운이 좋겠다...하는 생각은 들었다.
야에의 기도가 욕심없는 순수한 기도여서였는지 하늘이 그걸 들어준 모양이다.
금요일이 되자 장마전선이 내려가 토요일 아침엔 그간 보기 힘들었던 햇님이 얼굴을 비춰서 요즘 시기엔 귀중한 맑게 갠 주말이 됐다. 일기예보로는 저녁부터 내일 아침까지 날씨가 좀 불안하지만 낮에는 그럭저럭 맑다는 모양이다. 창문으로 하늘을 보고 있으니 문자가 왔다. 굉장히 활기차고 느낌표가 가득 들어찬 문자 내용은 한마디로 줄이면 '자력 주행 결정!'이었다. 내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잘 모르겠다.
일어났을때 언니는 벌써 밖으로 나간 후였다. 히나코 언니랑 대학에서 새로 알게된 사람들과 같이 타러 간걸까. 아직까진 외롭고 쓸쓸한 아침이지만...'언젠가 언니와 함께 달릴 수 있는 그날을 위해 나도 열심히 노력해야지'하고 기합을 다져넣었다.
야에와 약속한 시간은 10시라서 느긋하게 집에서 준비를 했다. 처음엔 폴로셔츠에 치마바지를 입었지만 지금은 몸에 쫙 달라붙는 져지. 야에에게 끌려나와 로드로 달리는 거리가 길어질수록 그 달라붙는 옷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게됐기 때문이다. 특히 엉덩이 패드의 소중함을. 그 모습을 남들이 보는것이 부끄럽단 생각보단 엉덩이가 안 아픈게 나에겐 훨씬 중요했다. 아래위로 져지를 입은 거울속의 내 모습은 어엿한 한명의 로드 라이더였지만 아직 속 내용물은 햇병아리 수준이다. 타이어에 공기를 채운 뒤, 물통에 스포츠 드링크를 넣고 헬멧과 고글을 쓴 뒤 공원으로 나갔다. 분명 문자 내용으로 보건대 야에도 일찌감치 뛰어나갔을거다.
"욧호~!! 맑디 맑은, 자전거 타기엔 절호의 날씨다~! 안뇽~!!"
애차인 루이가노에 올라탄 야에가 웬일로 베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캠프 갈때의 그런 사이즈는 아니고 작은 백팩. 끈이 배와 가슴 앞을 가로질러서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타입니다. 항상 져지 뒷주머니에 모든걸 챙겨오던 야에여서 무슨일인가 싶다. 그래도 일단 태연히 인사를 한다.
"안녕. 좀 길이 젖어있진 않을까했는데 이정도면 괜찮아보이네."
"그럼 히라츠카의 경륜장까지 가볼까~"
"오랜만에 타는거라 해서 내가 못따라갈 속도로 내빼진 마...어? 왜그래?"
안장에 올라타 야에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는데...야에는 페달에서 발을 떼고 지면에 선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뻘쭘하게 바라보던 야에는 손바닥을 펴 보이며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라는 포즈를 취했다.
"아...저기, 하즈킷치. 오늘 선두에 좀 서주라!"
"뭐!?"
"히라츠카는 어디가 어딘지 알고 또 거리도 지금의 하즈킷치에겐 여유롭잖아? 그래서 오늘은 하즈킷치의 빕숏차림 엉덩이를 보면서 달리고싶..."
"......"
"...은건 아니고!! 그게, 항상 내가 앞에서 끌어줬었는데 하즈킷치는 그게 재미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해서 말야. 그러니까 오늘은 쇼난 사이클링 페스티벌까지 끌어줘!"
"무, 무슨..."
이런 말이 나올거러 전혀 예상하지 못해 당황한다. 무조건 나는 야에 뒤를 따라가는게 맞다고만 생각했으니까.
남쪽으로 쭉 가면 치가사키와 히라츠카가 나오니 길을 잃을 걱정은 없겠지만...어디를 어떻게 가면 좋을지 경로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야에에게 의지만 하고 있었기에 나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달릴 능력이 부족하다는걸 체감했다.
"아, 알았어...일단 길 찾아볼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아, 어떤 루트로 가는건지는 보여줘."
스마트폰의 지도 앱을 켜서 현재위치에서 남쪽으로 스크롤 해 히라츠카의 전철역을 찾았다. 경륜장도 금방 찾았지만 사가미 강에서 가깝고 역이랑은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일단 내비게이션 모드로 길을 찾아보니 넓고 직선도로로 가는 코스가 나와 안심하고 야에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이렇게 가면 될까? 다행이다, 길이 알기 쉬워서..."
"아, 역시나. 이대로 가면 하즈킷치는 죽어."
잠깐 지도를 본 것 만으로 거침없이 무서운 말을 꺼내기에 깜짝 놀랐다.
"죽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응, 내비 안내대로라면 그렇게 되지않을까 생각했어. 이 안내대로라면 에비나의 시모이마이즈미로 해서 246번 도로를 타고 사가미 강을 건너지?"
야에의 손가락이 지도를 스크롤 해 노랗고 굵은 도로를 가리켰다. 파란 내비게이션의 경로가 그 위를 따라가고 있다.
"...그럼 안돼? 이대로 쭉 히라츠가로 가니까 좋지않을까 하는데..."
직선 성애자인 야에라면 분명 이리로 갈 거라 생각했는데 야에는 싫다는 표정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246번은 말이지, 요금 안받는 고속도로같은거라구. 자전거에게 친절하지 않다고나 할까, 차는 어깨를 씽씽 스치고 지나가지, 갓길은 좁지, 주위에 편의점도 없지, 돈주고 가래도 무서워서 달리고싶지 않은곳이라구~"
그런말 들어도 나도 몰랐으니까...하다가 뭔가 떠올랐다. 그동안 야에에게 이곳저곳 끌려다녔지만 한번도 246번 도로를 탄 적이 없다. 야에는 내가 위험한곳엔 데려가지 않았었구나...
"아츠기의 인터체인지 출입구같은데는 사고나기 쉬우니까 위험하다구. 이런건 경로 짤 적에 초보가 하기쉬운 실수니까 하즈킷치도 이제 슬슬 이런쪽으로 조금씩 공부하는게 좋을거야."
야에가 스마트폰을 가져가선 지도상의 포인트를 옮겨 다른 경로를 찾았다. 나는 야에와 아깨를 나란히 대고 야에가 새로 찾은 경로를 봤다.
"자전거 코스에 정답같은건 없지만 나라면 이렇게 갈거야. 246번은 패스하고, 아츠기까지 내려가서 사가미 대교서 반대편으로 건너가. 그럼 601번이랑 602번 도로 둘중 아무거나 타고 남쪽으로 가면 경륜장으로 가는 129번 도로랑 만나."
"아츠기까지 가는건 알겠는데, 강 건너 이 도로...다니기 쉬워?"
"246번보다야 낫지. 아, 하즈킷치가 선두로 달리는건데 내가 너무 따진건가? 미안미안, 혹시 기분 상했다면 풀어주라."
야에는 스마트폰을 돌려주고 한손을 얼굴앞에 세워 사과하는 포즈를 했다. 야에의 지적에 별로 화나거나한건 아닌데. 오히려 아직 내가 모자란 부분을 알게돼 부끄러웠다. 멋모르고 위험한 길로 들어가지 않아서 야에의 배려가 고마웠다. 이번주는 정말 야에에게 도움만 받고 있구나...나 자신의 미숙함이 부끄러워진다. 다시한번 액정위의 경로를 머릿속에 넣은 뒤 등 뒤의 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나도 아직 이렇다보니까...괜찮겠어? 내가 선두에서 달려도..."
"일단 뭐든 경험해보는게 제일이니까. 오늘은 잘 끌어줘, 하즈킷치!"
맑은 날이었지만 아직 장마철이라 공기중엔 습기가 가득했다. 달리는 동안은 바람이 느껴져서 괜찮았지만 신호대기로 설때마다 조금씩 찌는듯한 더위가 느껴진다. 갓길쪽은 아직 젖은 부분이 있고 비 때문에 모래도 조금 깔려있지만 미끄러져 핸들을 놓칠정도는 아니다.
브라켓을 잡고 페달을 밟는다. 평소와 같은 라이딩이었지만...기분은 전혀 달랐다. 앞에 야에의 등이 없다. 시야가 확 트여서 달리는 길과 주위의 여러가지 정보들이 눈과 귀로 들어온다. 아츠기까지 몇번 탔던 51번 도로지만 내가 앞장서서 달리니 전혀 다르게 보이는게 신기했다. 그 말은, 야에 뒤를 따라갈때 나는 야에의 등밖에 보지 않았단 걸까. 그리고 등 뒤에 딱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은 애매한 거리에 야에가 있으니 뭔가 간질간질하다. 등 뒤를 보여 몸이 위험을 느끼는건 아니고 그냥 간질간질한 느김이었다. 빨간불에 멈추게되자 나는 참지못하고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너무 느려서 '심심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지?"
"괜차나괜차나. 이쪽은 오히려 하즈킷치가 끌어주는 감회에 푹 젖어있으니 말야~ 오히려 나한테 신경쓰느라 평소보다 평속도 올라가고 있으니까 알고있어~"
지금까지 뒤에 누가 달린적이 없어서 그만 떼 놓으려는듯이 달려버린거 같다. '너무 당황해하지 않아도 괜찮아'하고 마음을 다잡지만 야에 앞에서 꼴사나운 주행을 보여주고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어서 이상하게 긴장하게된다.
아츠기 역을 지나 사가미 강의 다리를 건너면 그 다음부턴 한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 곧장 남쪽으로 가면 헤매진 않는다지만 그래도 지금 내가 어디를 어떻게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달리면서 곁을 지나가는 간판들을 보고 아는 야에에게 소리치며 말했다.
"이 주변은 왜 이렇게 라멘 가게가 많아─!?"
"트럭이 많이 다니거든. 이 주변엔 공장이 많으니까 트럭 운전수들이 왔다갔다하면서 들리지 않을까~?"
사가미 강의 서쪽을 달린다. 129번 도로는 내가 사는곳과는 풍경이 완전히 달랐다. 공장과 창고가 죽 늘어서있고 간간히 대형마트와 파칭코 가게가 턱하니 있다. 그곳을 지금 쭉 질러서, 경사도 거의 없는 길을 따라 달린다. 앞장서서 모르는 길을 달리니 머릿속의 백지상태였던 지도가 점점 채워지는 재미가 있다. 야에뒤에 붙어서 갔다면 이 지도는 새하얀채로 였을거다. 모르는 곳을 헤쳐 나가면서 나는 이제서야 자전거로 달린다는게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아"
풀 장비로 우릴 추월해가는 라이더가 있었다. 오늘은 그 수도 많다. 야에랑 달릴적엔 가끔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다. 우리랑 똑같이 남쪽으로 간다는건...역시나?
"저기, 방금 전 사람도 경륜장에 가는걸까─!?"
"그렇겠지. 도쿄에서 자전거로 온 사람도 많을걸~"
"도쿄에서!? 왜 굳이 그런데서 자전거로 오는거야??"
"그만큼 자전거쟁이들에게 오늘은 중요한 행사란거야! 좀만 더 가면 돼, 하즈킷치! 도카이도선을 지나가면 바로 골이야!"
속도계에 찍힌 주행 거리는 20km도 되지 않았다. 이정도 거리라면 아직 지치거나하진 않을거다.
야에 말대로 도카이도선과 도로 아래로 지나가자 바로 공기로 부풀린 파란 인형이 보였다. 뒤에서 야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가 히라츠카 경륜장, 오늘의 목적지야. 수고했어!!"
경륜장, 이라는건 학생은 가면 안되는 공영 도박장이니 들어가면서 살짝 긴장했지만 그곳은 뭐랄까...꼭 학교 축제같은 분위기였다. 경륜장의 버스차로에 사람들이 죽 늘어서서 경쾌한 음악과 함께 곡예를 선보이는 BMX를 보고 있었다. 그 뒤에는 경찰이 경찰용 오토바이와 순찰차를 전시하고있고, 돌고래를 닮은 히라츠카의 마스코트 캐릭터 인형이 삐약삐약 소리를 내며 주변을 걷고 있었다. 이런것만 보면 지자체 주관 축제처럼 보이지만 가장 다른점은 바로 손님들의 모습들이었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 깜짝 놀랐어."
'우리 지역에 이렇게 로드를 비롯해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많구나!'할 정도로 헬멧을 쓰고 져지를 입은 손님이 많다. 가족관람객도 있지만 한 40퍼센트는 자전거 라이더가 아닐까싶다. 도로를 달릴땐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들을 이렇게 한데 모아두니 수가 많다는게 놀라 좌우를 둘러봤다. 야에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흐흥, 하고 웃었다.
"쇼난에서 미우라까진 달리기 쉬우니까 자전거 인구가 많은거야."
우리는 자전거 스탠드에 자전거를 걸고 경륜장을 걸어다녔다. 경륜장 자체는 아무일도 없을때 간다면 좀 후줄근한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우람한 체격의 경륜선수 포스터나 어째선지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 경륜 선수가 인쇄된 깃발이 눈에 띄었다. 평소엔 한방을 노리는 어른들이 여기 모여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축제 노점들이 죽 늘어서있다. 저쪽에선 철판위에서 야키소바가 익어가고, 여기엔 화과자를 파는 먹거리 부스들이 있는가하면, 저쪽편엔 자전거들이 줄지어 세워져있는 자전거 메이커들의 부스가 있었다.
"우와..."
자전거가 가득 늘어선 모습은 언니 창고를 봐서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학교 운동장정도되는 곳이 전부 자전거로 가득한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야에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곳저곳의 자전거를 보며 돌아다니고 있다. 부스들을 천천히 돌아보다가 눈에 익은 로고가 새겨진 로드가 있었다.
"아, 언니가 타는 마키노도 있어."
"응, 아비코에 있는 마키노 씨도 여기 왔어. 본래는 경륜이 본업이라 로드를 실물로 보거나 시승해볼 기회는 잘 없단말이지."
"그럼 언니도 여기서 산걸까...?"
"아니, 여기선 판매는 안해. 그리고 풀 오더메이드니까 치바에 있는 가게까지 갔을거야. 아, 하즈킷치가 타는 데로사도 있어!"
하즈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하트마크가 붙은 로드가 가득 줄지어서 있었다. 뭐랄까...엄청 예쁘고, 엄청 대단했다. 외제 로드 주변엔 수많은 사이클리스트들이 열기를 내뿜으며 서 있었다. 그 뒤를 빠져나와 호기심으로 탁자에 놓인 카탈로그를 집어들고 휙휙 넘겨디봤다.
......거기 적혀있던 로드바이크 가격에 순간 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왜그래?'하는 얼굴로 들여다보는 야에에게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저기 있잖아...나 지금 비싼 자전거 타고 있는거야?"
"이제와서 그러기야, 하즈킷치? 처음 봤을때 '데로사 님이잖아, 이 부자녀석!' 이라고 말했었잖아!"
"그렇긴해도 그게 이정도로 비쌀줄은 몰랐지... 가만, 그럼 언닌 대체 자전거에 얼마나 돈을 쓰고 있는거야!? 으으, 보지 말걸 그랬어..."
이 가격...통장을 탈탈 털어도 부품 조각 하나 못 살만큼 비싼 자전거를 평소에 아무렇지도않게 타고 있었다 생각하니 돌아올때 무서워서 차도를 못 탈것만 같다. 그런 내 등을 팡팡 두드리며 야에가 마음 편히 가지라며 위로해줬다.
"이것도저것도 다 좋은 공부인거지, 뭐. 모처럼 좋은 기회니까 비싼 자전거도 팍팍 시승해보는게 좋다구? 하즈킷치네 언니랑 프레임이 어쨌다 저건 저쨌다 하는 이야깃거리가 생길지도 모르니까말야!"
그러면...될까? 그래,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즐기지 않으면 손해다. 야에가 모처럼 권유해준 곳이니까.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잠시 휴식.
야에는 시승하고싶은 로드가 많다면서 부스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모양이다. 시승으로 경륜장을 달려본건 좀...아니, 흔히 하기힘든 체험이었다. 벽처럼 우뚝 선 뱅크를 올라가보는건 감히 해 보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아스팔트랑은 다른 느낌이었다. 여성용 사이즈로 나온 로드바이크는 수가 적었지만 지금 타고있는 데로사랑은 뭐가 다른거같으면서도 그렇게 바뀐게 없는것도 같아서 신기했다. 야에에게 물어보니
'음... 프레임이라기보단 체인이나 타이어가 신형인지 구형인지가 더 영향을 준다고 봐. 여기 있는건 다 새거니까 그런거 아닐까?'
라며 가차없는 대답을 했다.
"이제 어쩔까..."
오늘은 야에 뒤를 따라서 온게 아니라 내가 선두에 서서 여기까지 왔다. 목적을 모른채로 이곳저곳 끌려다닌게 아니라 이 축제에 놀러왔다. 평소랑은 다른 휴일을 보내면서 충실감을 느끼고있다...는생각도 든다.
그치만 뭔가 부족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있으니 양손에 먹을것을 잔뜩 든 야에가 오는게 눈에 들어왔다.
"하즈킷치~ 밥먹자아~!!"
"어, 벌써 시승 끝난거야?"
"좀있다 모의 경륜 시합이 있대서 끝낸대. 좀 늦긴 했지만 배를 채워야 이 뒤도 즐길수 있으니까~"
야에가 준 음식 포장을 펼쳐보니...응, 전체적으로 학교 축제와 똑같다. 농어 미소시루에 도너츠, 카레빵, 그리고 야키소바.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든다.
"내 몫은 돈 줄게...미안. 물건 사오게 해서"
"노노, 내가 고른거니까 칼로리는 좀 많지만 이 뒤로도 달릴거니까 무죄!"
그러고선 야에는 베이컨 꼬치를 입에 물었다. 아무래도 운동 직후에 저런 기름진걸 먹을정도로 내 위장은 튼튼하지 않다. 종이봉투 안에 든 도너츠는 설탕이 가득 묻은 고칼로리 집합체인데 이상하게도 맛있어보인다. 이런건 다이어트의 적이지만...오늘은 괜찮을것 같다. 있다가 자전거 타니까. 우물거리며 카레빵을 베어물던 야에에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어라, 야에잖아? 오늘 여기 와 있었어?"
"나이토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럼 후지와라 오빠도 오늘 왔어요? 하긴 간만에 날이 이렇게 맑으니까 안타면 아깝죠~"
우리...아니, 야에를 향해 몇몇 어른들이 걸어왔다. 야에는 폴짝 일어서서 손을 흔들며 대화를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와서 순간 방어자세를 취한 나랑은 달리 야에는 스스럼없이 나가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도너츠를 쥔 채로 혼자 남아버렸다. 야에에게 이런 자전거 지인이 있을줄은 몰랐다. 그건그렇고 꽤 나이차이가 많아보이는데 어떻게 알고 있는거지?
"이쪽 애는 처음보는데...야에 친구?"
어른들의 시선이 나에게 몰리자 긴장해서 몸이 떡, 하고 굳어버렸다. 야에에게 이 사람들은 누구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야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몇몇분은 알고계실 그 이치노세 야요이의 동생이자 제 친구인 하즈키에요."
"뭐, 야요이 동생!? 그럼 설마 쟤도 저 나이에 벌써 이토이가와[각주:5]까지 달리는 수준이라거나 하는건 아니지? 하하하하."
어른들이 웃었다. 하지만 나는 깜짝 놀랐다. 언니 이름이 나오자마자 바로 롱 라이딩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언니를 아세요!?"
"그럼, 아시가라 랜도너스때 체크포인트에서 같이 있었거든. 꽤 유명하다구, 너네 언니는. 이 근방에서 여대생 라이더는 야요이랑 히나코 뿐인니까."
"거기다 사키는 전국구 레벨이고 말이지."
"난 아시노코에서 만났었어. 저쪽은 하마마츠에서 오는 중이었고 난 이즈 찍고 돌아오는 길이었지."
"그러고보니 그 아가씨들 이번에 어디 나가는지 들은사람 있어? 타이밍봐선 아즈미노려나? 나도 참가신청은 했는데 숙소 잡기가 영..."
어른들이 각자 자기 이야기들을 하면서, 언니를 친근하게 언급했다. 내가 모르는 자전거 세계가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멍하니 서 있던 내 어깨를 야에가 통통 두르렸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세계는 좁거든. 대부분 지인관계라 조금만 건너면 누가 누군지 알게 돼. 여기 나이토 아저씬 샵에서 알게된 사람이고, 저기 사사키 아저씬 SNS에서..."
그렇게 한사람한사람 소개하는 야에의 말을 나는 반쯤 넘겨들었다. 언니를 쫓아가고 싶은 내게 무엇이 부족한건지, 여기와서 왜 뭔가 부족하단 생각을 했었는지, 이유를 알게된것 같다.
언니와 야에는 단순히 자전거를 타고 멀리까지 가는게 아니었다. 그렇게 가서 여러 사람과 만나 자신의 세계를 넓히고 있었던 거다. 하지만 나는 언니밖에, 야에의 등밖에 보지 않았다.
너무나도 작은 세계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던 좁은 시야에 갇혀서 재미없다고 생각한 거다.
하지만 야에는 달랐다. 나보다 한발 먼저 먼저 넓고 활기찬 세계를 보고 그곳을 유유자적하게 달렸기 때문에 목적없는 라이딩도 그렇게 즐겁게 다닐 수 있었던 거다. 언니도, 히나코 언니나 언니의 다른 친구들, 이런 사이클리스트들과 같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넓은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거겠지. 나는 나 혼자 남아 뒤쳐져있었다. 날 버리지 말라고, 두고가지 말라고 울고 보채며 누군가의 연민과 자비를 바라고 있었던걸까.
아니, 나도 뭔가 한 것이 있다.
언니나 야에처럼 로드를 타기 시작했다. 오늘도 야에 뒤를 따라가는게 아니라, 선두에 서서 여기까지 왔다. 내가 하고 싶은것은... 넓은 세계를 알고싶다면 이렇게 하는게 제일인 거였다. 자전거를 타고싶다. 더 멀리, 더 많이.
"어? 여기서 돌아가지 말고 더 가고싶다고...?"
오후 3시가 지나 스탠드에서 로드바이크를 내리는 야에에게 그렇게 말했다. 무대 공연을 보고, 사이클 웨어의 염가 판매 부스를 돌아보고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하는 흐름이 됐을때의 일이다. 야에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데 미안함을 느껴 조금 머뭇거리긴 했다. 이제까지 야에가 더 가고싶다고 해도 나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돌아가자고 했었으니 그 반대는...왠지 불안하다.
"응.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어서. 오랜만에 보는 해기도 하니까 좀 더 달리고 싶달까......선두는 내가 할거니까...안될까?"
"아니, 하즈킷치의 그런 의욕은 대환영이지. 이대로 돌아가기는 솔직히 좀 아쉽기도 했구. 그럼. 사가미 만까지 왔으니 이대로 오다와라까지 가는건 어때?"
야에는 휙, 하고 공중에 선을 죽 그어보였다. 오다와라라면 전철 종점...굉장히 먼 곳에 있는 역이란 이미지다. 그런곳까지 가도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내가 더 타고싶다 말해놓곤 다시 소심해지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젔다.
"여기서 대충 20km정도 거리고 길도 134번이랑 1번도로 타면 되니까 헤매는 일도 없을거구. 뭐...측풍이 좀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해안도로라 기분좋게 다닐수 있을거야."
"그치만 돌아올땐...내 페이스대로면 밤에 돌아가게 될 지도 모르는데?"
유월의 가장 낮이 긴 날이지만 지금부터 오다와라에 갔다 오는건 시간이 늦어서 불안했다. 라이트는 있지만 이걸로 차와 함께 밤중의 도로를 달리는데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야에는 신난다는듯 웃으며 베낭을 벗었다.
"그러니까 오다와라로 가잔거야. 실은 말이지..."
거기서 나온것은 작은 나일론 꾸러미였다. 자전거용 물통보다 조금 큰 그것을 보고 내 목소리가 커진다.
"그거, 설마...?"
"맞아, 캐링백. 비 오면 전철 점프뛰려고 하즈킷치 것도 챙겨왔는데 괜히 가져온게 아니게되서 다행이야."
로드바이크를 분해해 봉투에 넣고 이동한다는 점프라는게 있다고는 들었지만 직접 해보는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 오늘 처음 해본게 많으니 이런것도 나쁘지 않겠지. 캐링백 두개를 야에는 오재미들듯 들었다.
"'오다와라에 도착하면 저녁이 되겠지만 점프해서 가면 되지.' 그렇게 다닐 수 있도록 열차 시간이 맞춰진 역이니까."
"오늘은 정말 야에한테 이것저것 도움받네...고마워, 같이 다녀줘서. 정말로......"
"아니, 하즈킷치가 이 뒤로 로드를 안타겠다 말할까싶어서 무서웠든. 나도 이것저것 생각해서 이렇게 했는데 좋아해줘서 다행이야. 그럼 가볼까~!"
베낭을 다시 멘 야에가 안장에 올라탔다. 오다와라까지의 추가 라이딩, 선두는 나......가슴이 설렌다. 오늘 아침이랑은 다른 의욕이 가슴에서 솟아 온몸으로 퍼진다. 흐르는 땀을 훔치고 핸들을 쥐었다.
"응, 가자 야에. 더 멀리, 더 즐거운 곳으로 말야!!"
그곳에, 언니를 쫒아갈 수 있는 장소가 있다고 믿으면서......
중학생이 대학생보다 낫네! 아미가 착하고 또 의욕이 있어서 그렇지 사키랑 히나코가 하즈키한테 이랬다면 바로 의욕 뚝 분질러졌을걸?
근데 왜 저는 자꾸 백합백합한 시츄에이션의 전초단계로 보이는건지... 너무 그런류를 많이 봤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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