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의 교실, 청소당번이 된 애들은 모두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운이 나빴던 나, 이치노세 하즈키(거기다 추가로 당번까지 당첨되는 행운을 맛봤다.)와 친구인 요모다 야에도 같은 얼굴로 청소를 하고 있다.
얼마 뒤면 종업식과 함께 여름방학에 들어가기 될 칠월 하순. 수업 중에 돌아가는 한여름의 구세주 에어컨님도 먼지가 피어나는 청소시간이 되면 (에너지를 절약한다는 핑계로)멈춘다. 열려있는 창문으로 후텁지근한 공기가 커튼을 춤추게 하고 그 너머로 야구부 같은 체육계 동아리의 구령 소리, 매미의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에어컨님의 은총이 사라진 지금 이 공간 어느 곳에도 서늘함은 없다. 피부 뿐 아니라 귀로도 더위가 철푸덕, 하니 들러붙고 있었다.
빗자루에 끝단에 손을 걸치곤 하복 블라우스의 가슴께로 연신 손부채질을 하면서 야에가 신음했다.
"으으, 녹아내릴거같다..."
"그래도 왁스칠 하는 날에 당번이 된 게 아니라서 다행이잖아."
"글킨 한데..."
책상을 교실 앞쪽에 모아놓고 쓰레기를 한데 모아 버린다. 분명 청소당면은 남녀 4명씩이었는데 남자는 어째 두 명밖에 안 보인다. 도망간 남자 둘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청소를 빼먹었고(그런 것도 없이 내빼는 애들도 있다.) 야에도 거기 편승하려했지만 내가 붙들어 매 청소를 시키고 있다. 붙잡힌 야에는 '아이구 어르신,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쇼!'하고 사정했다. 솔직히 누구나 하기 싫은 일이지만(안 그래도 더운데) 이렇게 노동력을 확보해두지 않으면 당번이라 도망갈 수도 없는 내가 고생을 하기 때문에 자비는 없다.
"안내면 진다, 가위바위보! 아싸아아아!!!!!!"
앞쪽에 몰아놨던 책걸상을 제자리에 되돌려놓고, 쓰레기통을 비울 사람을 정하는 가위 바위 보에서 이긴 야에가 호쾌하게 승리포즈를 잡았다. 그리고 더위에 바로 축 늘어졌다. 다행히도 쓰레기통은 내가 아니라 남자들이 맡는 게 됐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책상 서랍에서 학급 일지를 꺼냈다. 일지를 마무리한 뒤 담임 선생님께 제출하면 오늘 일과는 끝이다. 내가 의자에 앉자 야에도 앞의 의자를 끌어안으며 앉았다.
"어이쿠야. 왜 그렇게 열심이야. 하즈킷치? 그런거 '특이사항 없음'이라 메꿔놓으면 끝이잖아?"
그 말에 페이지를 넘겨보니... 야에가 당번인 날은 너무나도 당당한 필체로 '특이사항 없음'아라고 빼곡히 적혀있었다. 야에의 얼굴과 그 페이지를 번갈아보며 나는 바로 한숨을 쉬었다.
"아, 지금 '이렇게까지 바보인 애를 어쩌지'하고 생각한 거지? 근데 6월중에 수요일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고!!"
"아니, 이렇게 써 놓고 잘도 쿠로가와 선생님께 당당히 제출했구나 생각하니 그만."
생각했던걸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바로 말했다. 야에는 '흣!' 하고 주먹을 쥐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쓴게 뭐가 나빠! 아니 것보다 오늘도 아무 일 없었잖아. 하즈킷치도 우리 요모다류 일지작성술을 배우는 게 어때!"
"배우고 나서 선생님께 혼나는 건 나잖아. 혹시 그 유파는 제자의 잘못은 스승이 책임져 주는 거야?"
"훗훗훗, 우리 요모다류의 가르침 그 첫 번째는 바로 '자기 책임'이라는 중요한 정신을 익히는 것으로 시작되지..."
그런 바보 같은 대화를 하면서 나는 일지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적었다. 야에와 나는 매우 친한 친구 -반도 같은 반이고, 주말마다 같이 로드바이크를 타러 나가는- 사이이다. 처음엔 야에에게 영문도 모른 채 이래저래 끌려 다녀서 조금 사이가 어색해지긴 했지만 쇼난 사이클 페스티벌이란 이벤트에 갔다 온 후로 회복했다.
"야에, 여름방학이 되면 뭘 할 거야?"
"글쎄에...이번 여름은 꽤 덥다는 모양인데."
창밖을 바라보며 손으로 목덜미의 땀을 닦아내며 야에가 답했다.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켜고 싶지만 청소도 끝나고 남아있는 학생도 나와 야에를 합쳐 몇 안 되는 교실에선 불가능하다. 일지만 끝내면 이젠 여기랑도 안녕이다. 그때까진 이 더위를 참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쪄대는 날에 롱 라이드는 독이지...새벽이나 저녁같이 열사병 걱정 없는 시간에 샤라락, 하고 타지 않음 햇볕에 타 죽을 거야."
"야에 너 선크림은 제대로 바르고 있어? 팔이랑 다리가 엄청 타서 눈에 띄던데."
야에니까 초등학생 남자애처럼 여름이 되면 새까맣게 탄대도 별 위화감은 없지만 피부 관리 측면에선 악영향이니까. 그러자 야에는 소매를 걷어붙여 내 눈앞에 선명한 투톤컬러를 보여줬다.
"사이클리스트니까 허벅지랑 팔이 타는 건 훈장이나 다름없다고! 뭐, 그렇다고 얼굴이랑 목까지 태우는 건 아니니까 걱정말구. 이 야에 님도 일단은 여자니까 말야!"
다행이네, 하고 안심한다. 밖에서 활동하는 운동부 애들 중엔 팔다리가 탄 애들이 몇몇 있지만 야에처럼 선명하게 경계선을 그리며 탄 애는 없다. 그래서 체육시간에 수영을 하게 되면 몸매가 나빠서가 아니라, 이 선명한 대조 때문에 엄청나게 눈에 띈다.
야에가 그을린 부분의 경계선을 따라 손가락을 그으면서 말했다.
"저기 뭐야, 이번 여름엔 츠치도[각주:1]같은데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이 선이 없어질 때까지 수영을 하면서 태워볼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야."
"자전거로?"
"Of course! 이 동네에서 남북으로 다닐 땐 자전거가 제일이니까."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야에를 보며 '정말 기운차다니까'하며 웃었다. 나도 저만치 먼저 달리고 있는 야요이 언니를 따라잡기 위해 이번 여름에 야에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내 세계를 넓히려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름에 할머니 댁에 간단 이야긴 못 들었으니까 아마 한가할거야. 혹시 해외나간다거나 그런거 있어, 하즈킷치?"
"우리도 딱히 없을걸...? 그리고 난 야에랑 같이 지금보다 더 멀리까지 나갔다오는게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
"오오, 그거 좋은데! 여름이니까 시원한 곳이 좋겠지. 그럼 후지 5호[각주:2]같은덴 어때?"
"아니 잠깐만. 거기 산 넘어야 되잖아!? 힘들거 같은데 점프하면 안 될까?"
머릿속의 지도를 아무리 뒤져봐도 후지 5호의 사이사이엔 산이 들어차있다. 고텐바를 경유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지만...그래도 일단 하코네를 넘어야한다.
"쇼난서 가와구치까지 가는 노선이 없어. 하즈킷치도 이제 본격적으로 업힐을 시작하지 않음 안된다구."
"으으, 야에는 너무 스파르타식이야...지난번에 야비츠때도 엄청 힘들었는데."
"그래도 끌바 안했다는 그 근성은 대단하다고 난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이제 그만 그 쉬운 코스 좋아하는 습관은 버려!"
야에는 날 데리고 산으로 갈 생각인 모양이다. 나무관세음보살... 야에는 손을 퍼덕이면서 즐겁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후지 5호 말고도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방학이 아니라 못 가본 곳들에 이번에 하즈킷치랑 같이 가면 어떨까 싶은 곳들 말야."
"어떤 곳인데?"
"키자키 호수. 나가노 현 북쪽인데 그 근처 아즈미노에서 초여름께에 센츄리 라이드가 재미있다고 같이 자전거 타는 지인들한테서 이야기 들었단 말이지. 그 이벤트는 시기가 시기라 학생은 참가하기 힘들거든. 그대신 방학 때 같은 코스를 달리면 재밌을거 같은데 어때? 거긴 또 캠프장이나 민박도 유명하니까 괜찮지 않아?"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야에의 말에서 '아즈미노'란 단어를 듣고 뭐 하나 생각난 게 있었다. 그래, 그 이야길 해 보자. 마침 여름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좋은 기회다.
나는 일지의 검은 표지를 탕, 소리가 내며 덮었다.
"여행도 좋지만 일일 라이딩 이벤트에 야에랑 같이 나가고 싶은게 있는데 어때?"
"음? 뭔데뭔데? 시가지 크리테리움이라든가 업힐대회같은 뭐 그런류?"
"그런 묵직한 이벤트에 참가할 수 있을 만큼의 자신감이나 각력은 나한테 없는데... 일단 전에 쇼난 사이클 페스티벌에 가자고 해 줘서 고마워."
나는 쑥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며 야에에게 고개를 숙였다. 거기 가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자전거를 싫어하게 됐을지도 모르니까. 야에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그 답례로 나도 야에에게 이벤트를 소개하는 게 좋지 않을까 계속 생각했었어...그래서 이거 말인데."
내가 스마트폰 브라우저에 띄운 것은 GSR컵이라는 자전거 이벤트의 홈페이지였다. 야에는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여기 우리 둘이 나가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데...나 이제까지 레이스 같은 거엔 한 번도 나가본 적 없지만 이거라면 재밌을지 않을까 싶어서."
"음...아, 이거 나 들어본 적 있어. 꽤 특이한 참가자들이 많은 레이스라고 전에 누가 말했었어."
"응, 캐릭터가 그려진 져지를 입는다든가..."
최근 야에랑 같이 다니면서 많은 사이클리스트들과 마주치곤 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다.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를 베이스로 컬러풀한 디자인의 져지를 입은 사람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 쇼난에서 오다와라로 가는 길에 고등학교 자전거부로밖에 안 보이는 져지를 입은 여성 라이더의 수가 많았다. 하코네 인근의 학교 이름이 있는가 하면 치바, 교토 등지의 학교 이름도 씌어 있었는데 입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이 아닌 성인...그 때문에 '뭔가 이상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져지가 애니메이션으로도 방영된 자전거 만화에 나오는 각 고교 팀의 유니폼이란 걸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최근 이런 캐릭터 져지가 늘고 있어서 이것을 입은 사람만 참가할 수 있는 레이스가 나올 정도라는 모양이다.
"지난번 대회 때 참가자 감상 같은게 올라와 있길래 봤는데 꽤 재밌어 보이더라구...그래서 한번 해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
"응, 나한테 알려준 그 사람도 그렇게 재밌는 엔듀로[각주:3]는 없다고 했었었지. 거기다 '보급식 뷔페'가 있단 말에 '정말로!?'라고 했던 기억이 나네."
야에다운 감상에 그만 쿡쿡 웃고 말았다. 우리는 여름 바람을 맞으면서 얼굴을 맞대고 책상 위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손가락으로 액정을 움직이지 형형색색의 캐릭터 져지를 입은 사람들이 서킷을 달리는 사진들이 지나갔다. 모두 진지하고 온힘을 다해서 힘들지만 또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다. 가끔 져지가 아닌 묘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올 때도 있어서 보고 둘이서 웃었다. 야에는 살짝 시선을 들고 나한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근데말야, 나도 하즈킷치도 여기 나가기위한 캐릭터 져지는 없잖아. 설마 하즈킷치 너, 나 몰래 캐릭터 져지 사다놓고 나한테만 안 보여준다던가 그런건 아니겠지?"
"아니, 정말로 없어."
"그럼 왜 여기 나가자고 했어?"
"그게...여기 나갈 수 있을 만큼 컬러풀하고 귀여운 져지를 단둘이서만 입고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나는 야에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솔직히 좀 말도 안 되는걸 말했다는 생각이지만 자전거에 관한 일이라면 뭐든지 환영인 야에니까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야에는 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손가락을 허공에 이래저래 돌렸다.
"자체디자인이라...언제 또 그런걸 알았대? 뭐, 자전거 타면서 한두 벌 정도 그런 게 입어보고 싶어지긴 하지만..."
"저...그게 말이지..."
나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귓속말로 말했다.
최근 언니는 처음 보는 날개와 십자 문양이 들어간 큐트한 져지를 입고 다닌다. 처음엔 또 어디서 새로 샀나싶으면서도 예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언니를 데리러 온 히나코 언니도 같은 져지를 입은걸 보고 어디서 산거냐고 물어봤고, 그런게 가능하다는데에 놀랐다. 히나코 언니는 언니랑 언니와 같이 자전거를 타는 5명이 세트로 져지를 만들어 나가노 센츄리 라이드에 참가했었고, 또 플레쉬라는 수백 킬로미터를 팀으로 달리는 장거리 라이딩 이벤트를 완주하는걸 목표로 같이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언니가 부러웠다. 나도 그런 식으로 우리들만의 져지가 갖고 싶어졌다.
"아항, 그래서 GSR컵에 하즈킷치의 눈이 간 거구만."
그런 내 말을 듣고 야에는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응, 귀여운 져지가 아니면 참가 못하는 레이스니까 여기 맞춰서 만들면 일석이조가 아닐까하고...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 이상한 걸까?"
그런건 아니라는 야에. 하지만 야에의 두툼한 눈썹은 곤란하다는 듯이 치켜 올라가 있었다.
"이거 개최일 언제야?"
"8월 초순인데?"
"아이고...그럼 어렵겠는데."
'왜?' 하고 놀라 나는 숨을 들이켰다.
"지금이 7월 중순이니까 시간은 한 달 정도 남았지? 근데 오리지널 디자인 져지를 만들었던 사람한테 들은 이야긴데..."
야에는 걸터앉아있던 의자의 등받이에 양손을 얹고는 등을 쭉 펴고 스트레칭을 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디자인에서 생산까지 이런저런 공정이 있어서 업자한테 모든 걸 맡긴대도 최소 2개월은 걸린다 하더라고. 그러니까 암만 서둘러서 지금부터 당장 만든대도 완성되는 건 9월이야. 시간에 못 맞춰."
"그래...?"
"그리고 만들기 위한 최소 수량이란 게 있어서 나랑 하즈킷치것 두개만 만드는 건 어려울지도 몰라. 적게 만드니까 더 빨리 완성되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 거기에 맡기면..."
"근데 디자인은 어떻게 할 건데? 애니나 게임 캐릭터 져지에 맞먹는 그림이나 디자인을 하즈킷치가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고...그런거 부탁할 사람은 있어?"
"우으..."
야에의 지적에 나는 풀이 죽어버렸다. 아무래도 내 제안은 자전거를 잘 아는 야에가 보기엔 너무 어설펐던 모양이다. 야에는 얼핏 보기엔 무책임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전거에 관한 것은 꽤 진지하게 하는지라 절대 적당적당하게 뛰쳐나가지 않으니까.
"그렇구나...그럼 참가는 포기해야겠네."
물론 기성품을 사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뭐랄까, 재미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분명 야에도 같은 생각일 테다.
그런데 야에는 젖히고 있던 가슴을 되돌리면서
"아아아아니이!!"
"힉. 야, 야에!?"
"훌륭한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고!"
난데없는 말을 꺼내면서 야에는 스마트폰을 이래저래 만지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몇 번 까딱거린 뒤에 화면에 표시된 것을 본 야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릭터 져지가 빵이라면 케이크는... 후후후, 역시 있었어. 후히히히히"
야에는 이상하게 웃으며 내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화면에는 참가자 모집 요강이 적혀있었고 내 눈에 어느 한 단어가 들어왔다.
"코스프레 부문"
"하즈킷치, 우리 코스프레 하자!!"
"뭐?"
"이 레이스, 캐릭터 져지만 드레스코드인게 아냐. 코스프레 참가자도 모집하고 있으니까 그걸로 참가하는 거야! 로드바이크를 타고 코스프레라니, 해보기 힘든 거니까 엄청 재밌을거 같지않아!?"
"자, 자자자, 잠깐만 야에! 갑자기 코스프레라니, 나 해본 적 없단 말야..."
나는 당황해서 두 팔을 뻗어 흥분한 야에를 말리려 했다. GSR컵의 참가자 요강엔 캐릭터 디자인 져지 부문과 함께 코스프레 참가 부문이 있었다. 그런게 있다는걸 난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야에는 후후후하며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후훗, 사실 이 야에는 코스프레 경험자란 말이지."
"뭐어!?"
의외의 말에 눈이 동그래진다. 야에한테 코스프레 취미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1학년 때 코스어였던 친구가 유원지서 열린 코스프레 이벤트에 같이 나가보자고 했었단말이지. 근데 그게 생각 외로 꽤 재밌더라고. 만일 로드에 빠져있지 않았음 나도 코스장을 돌아다녔을지도 모르겠어."
"그치만 부끄럽잖아...? 애니메이션 캐릭터 코스프레 하는걸 다른 사람이 봤다간...!"
"무슨 소리야, 이 부끄럼쟁이 아가씬."
당황해하는 나에게 야에는 손을 까딱거리며 웃었다.
"우리도 몸에 착 달라붙는 져지랑 빕숏을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편의점에 들어가고 하잖아. 그거 자전거 라이더가 아닌 사람이 보기엔 거의 속옷이나 마찬가지 인상일 텐데 말이지."
"그, 그러고 보니..."
"근데 우린 거기 익숙해져 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잖아. 빕숏이나 코스프레나 똑같이 변신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 용기가 필요한 거지."
"으우..."
듣고 보니 그럴지도...그래도 그거랑 이건 다르다고 말 할 뻔했다. 하지만 야에의 날 바라보는 상냥하고도 의지가 가득한 눈길에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모처럼 하즈킷치가 용기내서 소개한 거잖아. 그런데 참가 안하는 건 좀 켕긴다구. 거기다 이거 엄청 재밌다고도 하고."
"야에..."
"응, 하즈킷치 혼자만 코스하는거 아니니까 괜찮아! 뭐 물론 귀여운 거랑은 안 어울리는 나보단 하즈킷치가 더 주목받을 테니까 안심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통통 두드리는 야에. '싫어, 내가 코스프레라니 그거 무리~!!'라고 할 수도 없다. 여기 가자고 이야길 꺼낸 게 바로 나니까. 거기다 이렇게 야에가 의욕이 넘치는데 내가 먼발치서 구경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나는 시선을 내리면서 야에에게 물었다.
"그럼 코스프레 의상...어떡할래? 져지 만드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코스프레 의상은 더 오래 걸리지 않아?"
"오호, 그렇게 말한다는 건 하겠단 생각은 있는 거지?"
끄덕,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와 언니 친구들처럼 자체 제작한 져지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어쩌다 한여름에 코스프레를 하는걸로 바뀌었는지. 그런 야에의 엉뚱한 면도 좋지 않다고 내가 느끼고 있으니 뭐라 할 수가 없다. 나에 대해 여기까지 열심인 친구는 야에밖에 없다.
"아키하바라나 나카노[각주:4]에 코스프레 의상 전문점이 있다고 들었어. 출전하려면 어느 정도 화젯거리가 된 애니나 게임 캐릭의 코스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 같으니까 이런데서 기성품을 쓰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라고 보는데."
"그럼 거기에 자전거로 가서 사는 거야...?"
그렇게 물으면서 나도 이제 자덕 물이 많이 들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에는 하하하하, 하고 웃어보였다.
"거기까지 가는 거야 아무 문제될 것도 없긴 한데 아키하바라는 실내 주차장을 전문적으로 터는 놈이 있을 정도로 방범대책이 최악이라고 들었어. 로드로 가는건 자살행위가 아닐까."
"그렇구나...도둑맞는건 싫으니까..."
"그리고 쇼핑을 하면 짐이 생기니까 전철로 가자."
"응, 그럼 참가 신청한 다음에 어떤 코스튬이 있는지 찾으러 가 보자."
방과 후의 긴 대화가 끝나 빨리 학급 일지를 선생님께 갖다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났다.
"아싸아!! 하즈킷치랑 옷 쇼핑이라니, 진짜배기 데이트다!! 이야아아앗호오오어오오오!!!!!"
야에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사이를 마구 내달렸다. '데이트라니, 호들갑은...'이라 생각하며 난 쓴웃음을 지었다. 저렇게나 좋아하는 야에를 보니 말하길 잘한 것 같다. 물론 처음 나가는 라이딩 이벤트에 그것도 코스프레를 하고 달린다는 건 불안하긴 하다. 하지만 처음 가보는 코스를 달릴적에 제대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지, 무사 귀가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거랑 같은걸 거다. 거기다 나 혼자만이 아니다. 야에도 있으니까...할 수 있다.
'오늘도 엄청 덥겠구나.' 하늘색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아침노을로 주홍빛이 도는 햇살, 아직 더워지기 전의 미지근한 공기. 8월 초순의 토요일에 우리는 지금 GSR컵이 열리는 서킷에 와 있다.
포장해둔 자전거를 다시 조립하면서 야에는 크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흐아아암...여기까진 그냥 자전거로 오는 게 나았을지도."
"에? 카나가와에서 여기까지 온대도 아쿠라라인[각주:5]은 자전거 통행 안 되잖아."
대충 머릿속의 지도를 떠올려 봐도 1도 2현[각주:6]을 통과하는 100km이상의 루트다. 만일 그런 하드한 코스를 따라 왔다면 여기서 모든 체력을 소진하고 끝났을 거다. 거기다 다시 돌아갈걸 생각하면...오늘 중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할거다.
야에는 공중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린 뒤, 그 아래를 가로지르는 선을 그으며 말했다.
"쿠리하마에서 카네다니까지 가는 페리가 있으니까 꽤 편하게 올 수 있어...뭐, 그런대도 여기까지 오는게 멀지만. 아, 페리 시간 생각하면 여기 시간을 못 맞췄겠다."
손을 휘휘 내저으며 공중의 지도를 지우는 시늉을 하는 야에.
GSR컵이 열리는 신 도쿄서킷은 도쿄만의 저편 너머 치바 현 이치하라에 있다. 여기까지 도쿄만 횡단도로를 타고 거의 질러서 왔지만...그 말은 반대로 하면 차가 아니면 오기 힘들다는 것도 된다. 우리를 여기까지 태워다 준 아버지는 벌써 가신지 오래다. 보소반도[각주:7]의 골프장에 가시면서 중간에 우리를 내려주는 식으로 차를 탈 수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차들이 주차장에 들어서있고, 레이스 참가자들이 하나둘 짐을 내리거나 로드바이크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으음...좋네. 오랜만에 이런 공기를 맡게 되다니 참을 수가 없어."
"야에는 자전거 레이스에 나가본 적 있어?"
"1년 전에. 맞다, 하즈킷치는 처음이구나~"
QR레버를 조이면서 야에는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나도 휠 장착을 끝내고 주차장에서 회장 안을 바라봤다. 같은 자전거 이벤트지만 지난번에 갔던 쇼난 사이클 페스티벌과는 분위가가 달랐다. 이게 레이스의 분위기란 걸까. 꼭 운동회에 온 것 같다. 긴장과 흥분, 의욕이 조용하지만 조금씩, 확실하게 커져가는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돼있었다.
"응, 예상은 했었지만 뭔가 대단하네..."
야에가 앞을 지나가는 참가자의 등을 보며 말했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 저런 옷들은 장소에 따라선 엄청 부끄러운 물건인데 여기선 오히려 당당하게 입는 게 상식인건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별다른 장식이 없거나 프로 팀 유니폼 레플리카, 소속 팀의 져지를 입는다. 몇몇 완고한 사람 중이 보고 야유할만한 '오덕져지'나 '이타챠리'[각주:8]의 비율이 조금씩 늘고있다곤 하지만 아직까진 소수라는데, 이 서킷은 그 비율이 역전돼있다. 사람이 모이면 자연스레 장관이 된다던가, 세계의 법칙이 여기만 다르게 적용돼있을거라 각오하고 있던 나도, 그리고 야에도 이 광경을 보며 깜짝 놀랐다. 물론 우리가 입는 건 그런 캐릭터 져지가 아닌 캐릭터 코스프레 의상이지만.
내 데로사와 야에의 루이가노 옆엔 큰 스포츠백이 놓여있다. 이 안에 우리가 입을 옷이 들어있다.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 야에가 스포츠백의 벨트를 어깨에 멨다.
"자 그럼 진지를 확보하고 엔트리 접수를 끝낸 다음...아니다, 그 전에 갈아입을까? 저기 여자탈의실이 있던데, 사람 몰리기전에 가는게 낫겠지?"
"그렇네, 오늘 여기서...어? 지금 갈아입자고?"
나도 가방을 매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안에 들어있는건 헬멧과 슈즈...그리고 프릴과 레이스, 리본으로 장식돼있고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돌 코스튬이다. 남자애들 입에서 몇 번 나오는걸 들은 적 있고 인터넷에서도 엄청 인기 좋은 아이돌 애니메이션의 무대의상. 이 애니를 야에가 보고 있어서 이걸로 하자는 강력한 주장을 따랐다. 오늘을 위해 도쿄 나카노에 있는 코스프레 전문 의상점까지 가서 사 온 것이다. 유명한 작품인 만큼 중고도 꽤 많아서 우리의 군자금 사정에 맞으면서도 사이즈와 디자인도 맞는 걸로 건져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역시 좀...너무 화려하다. 좀 교태를 부린다 싶을 정도로 여성스럽고 큐트한 미니스커트 의상을 보고 야에가 '이거다!'하고 고른 것이다. '이런 푹신푹신한 스커트로 괜찮겠어!?'하고 물어봤지만 야에는 '이왕 유행하는 거면 이렇게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게 좋잖아!'라고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입어본 모습을 거울로 본 뒤...바로 봉투에 넣어버릴 정도로 엄청난 코스튬이 지금 스포츠백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먼저 서킷으로 가던 야에가 활짝 웃으며 되돌아온다.
"그러엄! 하즈킷치한테 이 귀여운 옷 입힌 다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을 맛폰으로 촬영하고 싶을 정도라ㄱ..."
"노래 같은거 안 할 거거든? 오늘은 그...엔듀로란 레이스잖아."
"응응. 자신의 페이스로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마라톤 레이스지만...순위권 내에 들고 싶은 사람들에겐 레이스긴 하지."
"그래? 다들 조금 느긋하게 서킷을 돌지만은 않는 거구나."
"순위권에 신경 쓰게 되면 아무래도 불이 붙기 마련이고, 또 상위권에 들면 표창이랑 상품이 있으니까."
야에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글타고 무리해서 선두를 쫓아갈 필요는 없어. 하즈킷치는 무리하지 말고 오늘 하루도 사고 없이 무사귀가 하는걸 목표로 하자구. 이런 이벤트에서 다치면 여러모로 손해잖아."
아는 야에 뒤를 쫓아가면서 서킷 내를 걸어간다. 자동차가 달리지 않는 레이스용 코스를 자전거로 달린다는 건 처음 해보는 일이다. 여기를 달리는 건 차나 보행자가 있는 도로와 다르니까 또 어떤 느낌일는지 조금 불안하기도 하다. 그래도 호기심이 더 크게 생기긴 하지만.
여기에서 입을 수 있는 형형색색의 져지나 참가자들이 준비해온 캐릭터가 그려진 휠, 프레임들이 어지럽게 늘어서있는 분위기는 우리들에게 '마음껏 놀 수 있다'는 응원의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다.
데로사를 끌고 가면서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펴보다 면식 있는 참가자들과 인사도 한다. 모두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반겼다.
"여기로 해 볼까, 엇차!"
아직 아무도 들어와있지 않은 빈 피트에 야에가 짐을 내려다 놓았다. 오늘 이곳을 기지로 해서 레이스와 사이클 이벤트를 즐기게 된다. 깔개를 가져올걸 그랬나...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준비성이 좋은 몇몇 참가자들이 캠핑장에서 하듯이 테이블이나 의자를 가져온 게 보였다. 다음번에 좀 여유가 있으면 저런 것도 가져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는 저쪽 스탠드에 걸어두면 되는 거지? 그럼..."
"먼저 코스튬으로 갈아입자! 이얏호! 간만에 입어보는 귀여운 옷이다~!! 이 기회가 오길 엄~청 기대했다구!!"
바로 이 자리에서 춤출 것 같은 야에와 곤란하단 표정을 지은 나. 코스프레와 자전거 레이스. 둘을 동시에 하다니...조금 불안해진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저렇게 신나하는 야에에게도 미안해진다. 이 생기 넘치는 여름날 자전거 축제에 혼자 시무룩하게 있는 것도 안 될 거다.
양 뺨을 손바닥으로 짝짝 두드려 아직 몸에 조금 남은 졸음과 나른함을 쫓아내고 목소리를 높였다.
"좋아, 힘내자────!!"
"저기 야에...? 정말 이 차림으로 달리는 거야...? 우리들 이상한 꼴이라 비웃음 당하는 건 아니겠지?"
"에헤이, 괜찮다는데 왜 자꾸 그러시나. 자전거계 코스프레는 이것보다 더한 것도 많다구. 우린 엄청 무난하면서도 귀여우니까 괜차나!!"
피트 레인을 나설 때의 위세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탈의실 문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어 시가전 중의 병사처럼 좌우를 살폈다. 먼저 탈의실에서 나와 왁작왁작한 회장 내에서 항상 입고 있던 져지차림이 아닌 엄청 귀여운, 그리고 그것대로 문제인 차림을 한 야에가 날 보고 손짓을 했다.
파니에[각주:9]로 부풀어 오른 스커트, 리본과 프릴로 장식된 스타일리쉬한 블라우스가 야에를 감싸고 있었다. 물론 그 아래엔 검은색 빕숏 - 이것도 없이 로드를 탔다간 뒷사람에게 엉덩이를 다 보여주고 마니까 - 과 하이힐이나 부츠가 아닌 사이클 슈즈라는 뭔가 묘한 코디긴 하다. 그리고 머리 위엔 모델이 된 캐릭터의 머리 색깔 가발이 달린 헬멧. 옛날부터 헬멧은 패션이랑은 안 어울리는 아이템이라 생각했던지라 유난히 이상한 느낌이었다. 코스프레와 로드바이크의 조합이라니, 패션적으로 허용 되는 걸까 싶은 기묘한 스타일이라 옷을 다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정말 이대로 사람들 앞에 나서도 되는 걸까?'하며 불안해졌다. 그런 나와는 달리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만만하게 밖으로 나온 야에. 그런 끝없는 자신감은 질릴 정도로 잘 알지만...
야에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자자, 거기 죽치고 앉아있음 다른 사람이 탈의실을 못 쓰잖아~ 하즈킷치도 얼른 나와!!"
"꺅! 자, 잠깐만 야에에!! 싫어어어어어어~!!!"
각오를 다질 새도 없이 야에에게 팔이 붙들려 끌려나왔다. 클릿슈즈라 어떻게 멈춰 세울 수도 없다. 그렇게 무의미한 저항과 함께 여름 햇살 속으로 끌려나온 나는...
"와아아아..."
무심결에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갈아입는 동안 늘어난 참가자들과 행사장 내에 들어선 부스가 이곳의 분위기를 확 바꿔놓고 있었다. 오프닝 준비를 진행 중인 서킷은 조용하면서도 긴장감 돌던 아침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운동회날 탈의실을 나왔을 때의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
"오오, 엄청난데~ 완전 축제나 마찬가지잖아!"
"6월의 히라츠카같아...아니, 조금은 다른가."
무대와 참가 기업부스 앞에 놓인 레이싱 카. 이것도 아이돌 캐릭터의 이미지 컬로 도색된 화려한 ...이타샤[각주:10]랄까, 그 대장 같은 물건이었다.
천막 아래에 부스들은 쇼난 때처럼 자전거 관련 메이커들이 있었다. 거기에 캐릭터 굿즈...다른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캐릭터 져지의 제작사들도 많이 나와 있었다. 참가자들은 다들 손에 카메라나 스마트폰을 들고 이곳저곳을 오가고 있었다. 쇼난 때도 사이클리스트가 이만큼 모일 수 있구나 했었는데 오늘 레이스는 그 사람들이 한데 농축 된 것같이 사람들로 들어차 있었다. 그 참가자의 8할이 화려한 캐릭터 져지 차림이란 광경은 말 그대로 '대단했다'. 이정도 까지 되니 뭔가 카니발 같은 화려함까지 느껴졌다. 나머지 2할도 인형 탈이나 가장, 코스프레 - 사이클 인구 성비 때문인지 여장 코스프레의 비중이 높았다 - 라 제3자의 눈으로 봐도 독특한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 중에서 화려하고 여자다운 귀여운 의상을 입고 있는 나는 어떻게 보이는 걸까?
"이거..."
그렇다, 이 공간에선 지극히 '평범'했다. 그 증거로 주변에 오가는 사람 중 아무도 이쪽을 '뭔가 특이한 사람이 있다'는 눈으로 보는 사람이 없다. 져지 차림으로 편의점에 들어갔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이 짓던 놀란 듯한 시선이 여기엔 없었다.
손으로 가슴을 가리듯이 움츠리고 있던 나는 조금씩 몸을 펴고 주위를 살펴봤다.
"비웃음당하는건 아닌가 했는데...그렇진 않을 거 같네. 그 정도로 엄청난 곳이 됐어..."
"나도 몇 번 레이스에 나가본 적 있지만 이건...진짜 굉장하네. 자, 그럼 얼른 접수하러 가자!"
피트로 돌아오는 중에도 돌아다니는 참가자들은 모두 화려한 져지 차림에 당당하고 즐거운 모습이었다. 지나가면서 피트를 보니 게임 캐릭터가 그려진 휠을 단 로드는 물론 프레임까지 캐릭터의 이미지 컬러로 통일한 사람도 있었다.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만이 다른 곳보다 한발 먼저 학교 축제를 여는 것 같았다. 애니메이션 노래가 흘러나오는 무대, 캐릭터 져지 판매대가 나와서 그런지 진지하면서도 날이 서있는 그런 분위기는 없었다. 그런 우리 옆으로 흰색의 레이스 퀸 코스프레를 한 여자가 웃으며 지나갔다. 무심결에 나와 야에가 멈춰 서 눈으로 따라갈 정도로 예쁘고, 대담하고, 멋있었다.
"와아...방금 전 사람들 프로 같았지? 저 사람들도 레이스에 나오려나...?"
"그렇진 않을걸? 그래도 저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평범하지."
뭐라고 할까, '우리랑 같은 일본인?'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어느 레벨을 넘어서면서 질투보다는 경외심이 들 정도였다.
야에는 하아아...하고 한숨을 쉬었다.
"전에도 코스프레 할 적에 화보집 내는 세미프로한테서 '넌 이런데 안 어울려'란 이야기를 들었었단 말이지... 뭐, 우린 저런 사람들과 댈 수도 없는 평범한 애들이니까 그냥 신경 쓰지 말고 이 유쾌한 분위기에 취해서 오늘하루 그냥 즐기자!"
그렇구나하고 긴장된 표정을 풀어주려 미소를 지으려고 했을 때였다.
"어, 혹시 야에...? 너 오늘 여기 온 거야?"
"그거 보니 너, 오늘 코스프레 참가구나! 그럼 진작 말 좀 해 주지~ 피트에 자리 깔 적에 같이 하면 됐었는데."
정답게 말을 거는 어른들의 목소리. 그리고 이와 함께 우득, 하고 굳어버리는 야에.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돌아보니 애니메이션 캐릭터 져지를 입은 어른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 이 사람들 전에 쇼난 사이클 페스티벌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다. 서로 전에 만났을 때랑은 다른 모습이라선지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는 되지 않았달까...오히려 아는 사람이라서 마음이 놓였다.
"아,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런 모습으로 달릴거에요! 저 이런거 처음이라 여러 가지로 폐를 끼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도 어떻게 좀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와아, 오늘 엄청 귀엽게 하고 나왔네? 이런 행사에 아이돌 코스 하는 놈들은 무지하게 많지만 리얼 여중생이 하는건 꽤 볼만한 가치가 있지."
"그럼 그럼, 저기 혹시 평소에도 이런데 다니니?"
"아뇨, 코스프레는 처음이에요. 야에는 몇 번 했었다는 모양이지만요."
"응? 그건 우리도 처음 듣는데... 야에도 코스어였구나. 이번에 스튜디오 빌려서 촬영회 하는데 혹시 시간되면 같이 나올래? 하즈키도 괜찮다면 지금 코스로..."
"헬멧이랑 슈즈도 그대로 해도 괜찮을까요?"
와하하하하고 어른들이 웃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야에는 꼼짝도 않고 가만히 있길래 뭔가 좀 이상하다. '야에도 인사 해야지'라고 말 하려는 순간...
"흐갸아아아아아아────────────!!!!!"
하고 야에는 청소를 빼먹을 때처럼 뛰쳐나갔다. 평소처럼 나는 야에의 손목을 붙잡고...클릿때문에 불안정해서 뭔가 요상한 포즈가 됐다.
"야에! 왜 도망가는 거야!?"
"그, 그그그그그그게, 부부부부부끄럽단말야!! 이거 놔아아아아아아!!!"
"코스프레는 용기다, 여기선 평범한거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한건 야에였잖아?"
"그래도!! 생판 모르는 사람이면 몰라도 자전거 지인들한테 이런 꼴 보여주는 건 좀 그렇다구!! 평소때 내 이미지랑 갭이...싫어어어어어 이거 놔줘어어어어어어어어───!!"
"설마 너...아는 사람이랑 여기서 만날 줄 몰랐다 그런거야?"
야에의 머리가 살짝 끄덕였다. 흠...자전거에 관련된 것 치고는 야에답지 않은 실수다. 혹시 자전거가 아니라 코스프레란 생각에 평소와 같은 생각을 못한걸까?
"으으...이쪽 세계는 좁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데......좀 더 참가 리스트를 꼼꼼히 봤어야했어..."
버둥대며 손길을 벗어나려는 야에를 말리면서 쿡, 하고 웃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당황해하는 야에가 귀여웠다. 아침부터 당당한 모습이었던 야에도 수치심이나 남들 이목에 신경 쓰는걸 보니 같은 또래 여자애는 맞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속에 조금씩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딱딱하게 굳은 야에의 팔을 끌어안고 나란히 어른들 앞에 섰다. 수줍어하는 야에를 보니 왠지 모를 우월감이 느껴진달까...딴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뭐랄까 그...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럼 오늘하루, 아이돌 코스프레 라이더 하즈키랑 야에를 잘 봐주세요~!!"
"아, 아아! 사진 찍지마요, 사진!! SNS에 올리는 거 금지─!!"
"아, 사진 그거 보내주실 수 있어요?"
"하즈킷치... 갑자기 분위기타서 뭔가에 눈 떠버린 거야? 내가 널 각성시켜 버린 거ㅇ...히이이이이, 찍지 마!!"
우리가 출전한건 2시간짜리 엔듀로 레이스의 코스프레 부문이었다. 한 사람당 한 시간이란 계산을 하면 논스톱으로 못 달릴 것도 없지만 30분 간격으로 교대하기로 했다.
애니메이션 음악이 BGM으로 울려퍼지는 가운데, 1번 주자로는 내가 나섰다. 서킷의 행렬 속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긴장이 되면서도 뭔가 재밌어지는 것에 신기함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이돌 의상에 헬멧이란 특이한 조합은 시내에서였다면 분명 웃음거리가 될 거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캐릭터 져지나 메이드복 차림, 게임 캐릭터의 코스프레에 적잖은 사람들이 여장을 하고 출전한지라 내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부끄럽기는커녕 뭔가 뿌듯해지는 거 같다. 지금 이곳에 없는 건 로드바이크에 탄 마스코트 캐릭터 인형탈 정도일 만큼 특이한 광경인 것이다.
1바퀴에 1km인 이 서킷은 높이차도 없는데다 다니면서 길 잃을 걱정이 없다는 점에서 좋다. 그런 것보다는 일교차에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발하고 나니 의외로 달리기 어려웠다. 코너가 많은 고 카트용 서킷은 햄스터 쳇바퀴처럼 몇 번이고 빙빙 도는 것 같아서 쉬기는커녕 인터벌 트레이닝 같아서 정신적으로 지치는 곳이었다. 거기다 캐릭터 져지를 입은 참가자들은 의외로 잘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코스 위에선 생각보다 빠른 속도 때문에 느긋한 페이스는 커녕, 꽤 열심히 속도를 내는 쪽이 되고 말았다.
다른 사람에게 추월당하니까 그만 오기가 생겨 그 등을 쫓아가고 만 것이다. 비슷한 각력의 사람들과 같이 다니게 되면 왠지 모르게 화가 나서 피트로 누군가 들어갈 때까지 쫓고 쫓기는 것을 반복했다. 공기저항이 큰 의상으로 달리는 나는 하아하아 하고 거칠어진 호흡으로 페달을 밟았다. 물통의 물도 소모가 빨랐다. '져지랑 빕숏이 아니라서 몸에 열이 빨리 차는 건가'하면서 백 스트레이트[각주:11]에 접어드니...
"하아즈킷치이이이이~파이티이이이잉~~~~"
갤러리들의 함성 속에서 야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발 전엔 코스프레 차림을 보였다면서 비명을 질렀던 야에. 하지만 레이스가 시작되니 응원에 정신이 없어서 자기 차림엔 신경이 안 가는 모양이다. 피트에서 손을 모아 날 향해 응원하는 야에의 모습이 뒤로 사라져간다. 야에는 이제 좀 괜찮은 모양이네...하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
방금 메이드에게 추월당했다. 치마를 펄럭이며 달리고 있지만 남잔지 여잔지 구분이가지 않는다. 아니, 남자였던 것 같다. 뭐지 이 끓어오르는 이 감정은...?
"읏!"
그리고 곧장 코너에 들어서게 돼 감속하고 말았다. 서킷에 와서 알게 된 건 코너에서 가감속 하는건 제법 체력을 소모한다는 거였다. 평소에 다닐 적엔 코너링엔 별로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차가 있는 차도에서 속도를 내며 코너를 돌 일이 없으니까. 롱 라이딩이라 해도 별로 신경쓸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코너링에 서툴다는 걸 서킷에 오고 나서 알게 됐다. 하지만 나를 제치고 지나간 순위권내의 사람들은 거의 브레이크도 하지 않고 휙휙 돌아 나간다. 어떻게 하면 저런 식으로 다닐 수 있을까? 몇 번이고 코너들을 드나들면서 감속과 가속을 반복. 거기다 코스 길이도 짧다보니 3분도 안 돼 다시 출발선에 돌아온다. 똑같은 로드바이크 주행이지만 일반도로에서의 라이딩 때와는 전혀 다른 주행감각이, 지금 서킷에서 치러지는 엔듀로에 있었다. 즐겁지만 심박수가 내려가지 않으니까 금방 지친다...!
"허억...다음번에 바꿔줘─!!"
"오케~!!"
손가락을 하나 세워 피트에 사인을 하며 갤러리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 야에에게 교대를 부탁하니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다행이다...이제 좀 쉴 수 있겠어.하고 생각했더니 상자 같은걸 뒤집어 쓴 사람에게 추월당했다.
'어? 저게 게임 같은데 나오는 건가? 헬멧은 어떻게 돼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고 있자니 이번엔 도너츠 가게의 캐릭터가...전신에 쫄쫄이를 입은 채로 로드바이크를 타는걸 보니 타임 트라이얼 선수처럼도 보이지만 머리에 공기저항을 많이 받게 생긴 도너츠가 잔뜩 있어서 뭔가 엄청 이상하다.
캐릭터 져지를 입은 사람들은 다들 즐거워하면서도 진지하게 달리고 있었다. 이색저색 화려한 져지의 뒷면을 보면 오타쿠같은 것부터 '와, 저거 멋있다...'싶은 것까지 여러 가지 디자인들이 있어서 꼭 패션쇼를 하는 것 같았다. 서킷은 진지하면서도 한편으로 우습기도 하고, 또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 공간이 돼 있었다. 더 멀리, 모르는 곳으로 발을 내딛는 롱 라이드와는 또 분위기가 달랐다. 그렇다고 어느 쪽이 더 좋고 나쁘다는 건 아니다. 전부 다 재미있고 가슴이 설렌다.
아이돌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나는 어떤 식으로 보이는 걸까? 야에도 지금은 즐기고 있는 걸까? 하고 생각하다보니 피트 레인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해 내 첫 주행은 끝이 났다.
덥기도 덥고 체력도 꽤 소모했다. 다음에 나갈 땐 꽤 힘들겠단 생각을 하고 있으니 루이가노의 핸들을 잡고 헬멧을 쓴 아이돌 코스프레 차림의 야에가 보였다. 그 앞에서 나는 자전거를 세웠다. 곧장 피로감에 쓰러질 뻔 했지만 가까스로 버텨냈다.
"허억, 허억...그럼 30분 뒤에 교대하는 거지?"
"조아쓰! 후닥닥 달리고 올게~"
계측용 밴드를 옮겨단 뒤 안장에 걸터앉아 피트에서 뛰쳐나가려다 말고
"아 참, 하즈킷치."
야에가 말을 걸어왔다.
"왜?"
"...아니, 하즈킷치가 코너 돌 적에 말야. 앞바퀴 쪽으로 고개를 숙였었지?"
"음...그랬을지도."
"고개를 들고 앞을 보지 않음 속도가 떨어져. 노면상태가 궁금해서 보고 싶어지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건 아닌데...아무튼 보면서 어려워하는 게 보이더라고."
야에가 그런 것까지 보고 있었구나 싶어서 놀랐다. 야에는 헬멧 턱끈을 손가락으로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이 코스는 브레이크 없이 달려도 괜찮다구?"
"그렇구나..."
"그리고 하나 더. 팔을 딱 붙이고 허리를 푹 수그리면서...아 이건 말로 하면 어려우려나."
"응."
"그럼 내가 코너링의 기본자세를 보여줄 테니까 응원하면서 잘 보고 있어!"
그러면서 야에는 페달을 밟고 피트를 뛰쳐나갔다. 자전거를 타니 지금 입고 있는 귀여운 의상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나는 데로사를 스탠드에 세워놓고 펜스 옆의 관전구역으로 갔다.
"우와..."
야에는 의상을 펄럭이면서 호쾌하게 코스에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샥샥, 하고 속도를 붙인 채로 로드를 이래저리 기울이면서 코너를 도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잘 탄다싶다. 그러고 보니 야에가 달리는 모습을 뒤에서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멀리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이돌 캐릭터의 의상에 헬멧, 고글, 클릿슈즈라는 독특한 코디네이트지만 지금의 야에는 무척이나 활기차 보여서 왠지 모르게 멋있어보였다.
"하즈킷치이이이~ 보고있어어어~?"
"으응~!! 교대하면 똑같이 해 볼게에~ 화이팅~!!"
"오케오케─!!"
야에는 눈앞의 직선주로를 내달리면서 외쳤다. 직후, 코스에서 면식이 있는 남성진의 우렁찬 구령이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아이돌 콘서트 장에서나 볼법한, 야광봉을 들고 붕붕 휘두르는 것처럼 점프를 하면서 내지르는 열광적인 함성이었다.
" " " "싸랑한다아아아, 야에쨔아아아아으으으으응" " " "
"푸흡!!?"
" " " " L! O! V! E! YA-E!! GO!!! GO!!!" " " "
"히이이이이익!?"
야에의 비명소리가 도플러 효과 때문에 점점 멀어져간다. 놀라서 낙차하는건 아닌가 했지만 다행히도 야에는 소리만 지르면서 멀리 멀어져갔다.
"다다다다다다 다들 그만해! 이거 언젠간 복수할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몇 배로 되갚아주고 말겠어어어어─!!!"
야에의 분에 찬 목소리를 듣고 그만 배를 잡고 웃어버렸다.
재밌다. 둘이서 이곳저곳 다니는 것도 좋지만 이런 것도 뭔가 즐겁다. 캐릭터 져지와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로 가득한 이 서킷은 긴박한 경쟁이라기 보단 어지러울 정도로 축제의 열기로 가득했다. 처음은 부끄러웠던 코스프레도, 지금은 이 차림으로 있다는 게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내 안에서, 여름이 되기 전까진 없었던 뭔가가 껍질을 깨고 태어나고 있었다.
뭣보다 이곳은 온화하고 뜨거우면서도 즐거웠다.
야에를 응원하고, 코너링 요령을 유심히 바라보다보니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야에~ 곧있음 교체시간인데 어쩔래~?"
"다음번에 들어갈게~!!"
나는 피트로 돌아가 헬멧과 로드를 챙기고 급히 교대 구역으로 향했다. 코스가 짧아선지 야에는 금방 돌아왔다. 숨이 거칠었지만 피로보다는 매 바퀴마다 큰소리로 응원당한 부끄러움이 더 큰 모양이다.
"자, 교대...! 그럼 난 이제 그 바보짓하는 어른들을 한대 걷어차 주고 올게!!"
"그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내 코너링을 봐줘! 야에처럼 해 볼 테니까!!"
"응! 너무 열 내서 들이대다 넘어지지 말고─!!"
타임 계측용 밴드를 감은 뒤 달려 나간다. 서킷에 합류하자마자 나는 최대한 낮은 자세로 멀리를 보며 다가오는 코너를 돌았다. 어렵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어설픈 움직임은 줄어서 화려한 져지로 물든 축제 행렬에 몸을 실었다. 여기저기서 응원을 받고, 그렇게 응원해주는 사람에게 미소지어주면서 달리는 게 즐거웠다. 롱 라이딩 때처럼 해가 질 때까지 이대로 계속 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즐거운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지나간다.
"......뭐, 역시 시상대는 무리였나."
저녁이 돼 축제가 끝나고 모두가 무대 앞에 모여 시상식을 기다리고 있다. 코스프레 부문 2시간 엔듀로에서 우리 순위는 11위였다. 상위팀은 남여 혼성팀이어서 여자 둘인 우리는 평속이 꽤 빨랐는데도 더위 때문에 후반에는 페이스가 떨어져 꽤 되로 밀려나고 말았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지만 아직 공기는 더웠다. 코스프레 차림이다보니 주변의 져지를 입은 사람들은 시원해서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여기 물을 뿌려서 열을 식히는 것도 말이 안되는 일이니 일단은 참는다.
"음... 그래도 꼴찌는 아니니까 다행인가...?"
"애초에 이기려고 참여한건 아니잖아. 순위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아도 돼."
집계에 시간이 걸려서인지 예정보다 늦어지는 무대를 바라보며 야에는 웃고 있었다. 나도 야에와 함께 서서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기 올라가보고 싶긴 하다..."
"레이스에 나왔으니 이기고 싶었던거?"
"아니."
나는 고개를 가만히 흔들면서 말했다.
"용기를 내서 이런 귀여운 옷을 입었던 만큼 저기 서서 모두의 주목을 받고싶달까..."
"호오...?"
"있지, 달리는 중에 응원을 받으면서 이런 차림을 하고 있을게 뭔가 기분이 좋아졌거든. 이상하지? 부끄러워서 죽을 것같이 굴었었는데 막상 하고나선 더 돋보이고 싶다고 생각 하다니 말야."
기분 좋은 피로감에 취하면서 나는 큭큭 웃는 야에에게 처음의 불안감과 지금의 충실감을 전했다. 야에도 푸근한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역시 재밌었네, 이 이벤트."
"그러게."
"성우 사인회나 프랑크 소시지랑 같이 먹는 밥, 뷔페... 나도 롱 라이드나 레이스가 자전거의 즐거운 점의 전부가 아니란 걸 알게 됐어."
노을이 차차로 하늘을 붉게 물들여가는 가운데, 나는 아직도 후끈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기 와서 정말 재밌었어. 져지 맞추는 게 안돼서 참가하지 않는 쪽을 고르지 않아서...정말 다행이야."
"응. 그리고 이런 귀여운 코스프레까지 하고나니 어때? 뭔가 좀 알게 된 건 있어?"
야에는 다정하게 내 심정을 물어봤다.
"알게 된 것...?"
"아니, 오늘따라 하즈킷치가 엄청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말야. 뭐, 오늘 여기서 뭔가 내가 도움이 됐다면 기쁘긴 하겠지만..."
가슴에 손을 대본다. 거기엔 어제까진 없었던 것이 깃들어있었다. 코스프레를 하고 달리면서 느꼈던 것이 있다.
"나에게 모자랐던건...용기였어."
"용기라..."
"응, 이런 차림으로 저 위에 서서 모두에게 주목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용기."
나는 시상대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언니를 따라잡고 싶다고 항상 생각은 했지만...사실 나와 언니의 사이는 그렇게 멀지만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같이 갈래!'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나는 안 돼', '언니와 점점 멀어져버려'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야에는 슬쩍 내 얼굴을 보곤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시상대를 바라봤다.
"언니가 친구들이랑 같이 귀여운 져지를 만들었을 때 용기를 내서 '나도 그거 갖고 싶어. 그거 입고 같이 다니고 싶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용기가 없어서 그러질 못했어."
거기서 나는 언니를 따라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망설임이랄까...언니와 언니 친구들에게 뛰어들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우리끼리의 져지를 만들겠다면서 이 GSR컵에 나가는걸. 생각하고...용기가 없었으니 곧장 갈 수 있었던 길을 빙 둘러 온거야."
그리고 져지를 만드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취소하잔 생각부터 했었다. 용기가 없어 멋대로 좌절하고 나는 달려 나가는 것을, 언니를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만 것이다.
"그치만 야에가 코스프레라면 참가할 수 있다고 해줘서, 코스프레는 용기라고 말해줘서 이렇게 같이 달릴 수 있었고...덕분에 정말 즐거운 하루였어. 용기를 내 달리기 시작하니 이렇게 즐거운 일을 경험할 수 있었어. 겁쟁이가 되서 금방 포기하려고 했던 나는 정말 바보였다는 생각이 들어."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오르면서 나는 야에에게 계속 말을 했다.
"자전거는 역시 즐거운 거야. 용기를 내서 코스프레를 하고, 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봐서 다행이야. 용기가 있으면 어디든, 어떤 일이 있어도 달릴 수 있단 걸 이제야 알게됐어."
즐겁지 않으면 자전거는 탈 수 없다. 오늘 서킷에서 달린 거리는 불과 수km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수십, 수백km를 달렸을 때처럼 만족감이 있었다.
즐거움을 낳은 원천 중 하나는 용기였다.
겁쟁이처럼 소극적으로 굴어선 재미있지가 않다. 아이돌 애니메이션의 코스프레라는, 평소에는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않은 옷차림으로 서킷을 달렸을 때의 쾌감이 그것을 내개 가르쳐 준 것이다. 야에는 이걸 알려주고 싶어서 내게 코스프레 참가를 권한걸까.
그런데 날 보는 야에는 뭔가 재밌는걸 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 용기 만빵인 하즈킷치는 다음엔 어떤걸 하고 싶어? 오봉[각주:12]지나고 일본 종주 해볼래? 같이 갈 거지~?"
"그것도 좋겠지만, 용기를 내려면...먼저 해야 할게 있어."
나는 심호흡을 한 뒤, 가슴속의 말을 뱉어냈다. 가슴 속이 서킷 위를 달릴 때처럼 두근거려왔다.
"이번에...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언니한테 같이 라이딩하자고 말해보려고. 야에를 소개시켜주고, 언니 친구들이랑도 같이 타고 싶다고 부탁해 볼 거야. 지금까지 용기가 없어서 말하지 못했던 거지만 지금의 나라면 말할 수 있을거 같아."
말을 끝내자 손발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용기를 내면 따라갈 수 있다. 그런 용기를 끌어낼 힘을, 그동안 자전거를 타면서, 이것저것 배워가면서, 코스프레까지 해 가면서 겨우 익히게 된 것 같다.
"오오, 이제야 날 언니한테 소개시켜 주는 거야?"
"응. 좀 더 일찍 했어야 했는데...미안, 야에. 내가 용기가 없어서 계속 기다리게 했지? 그치만 야에가 가르쳐준 용기를 가지고...해 볼게!"
내 말은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자신감이 생겨있었다.
겨우 시작한 시상식, 무대 위의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는 MC와 갤러리들의 함성 속에서 야에는 내 어깨를 안고 끌어당기면서 이마를 맞대고 남자처럼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엄청 기대된다! 하즈킷치, 나랑 언니랑 같이 라이딩 할 수 있게 스케줄 제대로 비워놔야 된다?"
"그럼! 같이 달리면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까. 나도, 야에도, 언니도...그러니까 해볼래!"
이후 나와 야에는 아무 말 없이 시상대를 올려다봤다.
오늘 하루는 짧았지만 즐겁고 화려했던 코스가 지금 막 끝이 났다. 하지만 내일로 이어지는 긴 코스가 우리 눈앞에 놓여있다. 그런 기분을 우리 둘은 느끼고 있었다.
엥 쟤네 완전 호노린 아니냐!?
식 올리기 직전의 알콩달콩한 커플 모습을 보여주는 하즈키와 야에였습니다(?)
실제와 조금 맞지 않는 내용이 있는데, 신 도쿄 서킷에서 열린 GSR컵은 1회뿐입니다. 15년 4월에 열린 2회 GSR컵은 모바라 서킷에서 치뤄졌는데 반영이 안된걸로 봐 14년 해 넘어가기 전에 3화가 써진 모양입니다.
구글서 검색해보시면 하즈키의 감상대로 GSR컵의 유쾌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끼실 수 있습니다.
- 카나가와 현 후지사와 시(가마쿠라 인근)의 지명. 해수욕장과 수영장이 있음. [본문으로]
- 후지산 부근에 있는 5개의 호수 [본문으로]
- 정해진 시간 내에 가장 많이 달린 사람이 이기는 방식. 대개 몇시간짜리 장거리 대회이다. [본문으로]
- 아키바, 오토메로드와 함께 도쿄의 덕질의 3대 성지 [본문으로]
- 도쿄만을 가로지르는 해저터널 [본문으로]
- 카나가와 현→도쿄 도→치바 현 [본문으로]
- 치바 현이 있는 반도 [본문으로]
- 애니·만화·게임 캐릭터로 장식된 자전거 [본문으로]
- 치마 속에 넣어 모양을 잡아주는 프레임 [본문으로]
- 캐릭터로 꾸며진 자동차 [본문으로]
- 서킷에서 골 직전에 있는 직선 주로 [본문으로]
- 양력 8월 15일. 한국의 추석 격인 명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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