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언니."
"응?"
야요이 언니가 뒤를 돌아본다.
수요일 저녁, 집 거실.
어쩌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저 사람 좀 멋있다'하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한테 말을 걸거나, 선생님이 말을 걸어올 때 이상으로 긴장해 버렸다.
그냥 별 일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말 하면 되는데 어느 샌가 턱이 뻣뻣하게 굳어 제대로 말을 하기가 어렵다. 어떡하지, 용기내서 언니한테 말을 해야 하는데.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데 자꾸 불안감이 온 몸을 뒤덮는다.
'언니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언니가 그날 이미 스케줄이 있을 수도 있고, 만에 하나 나랑 같이 다니기 싫을 수도 있다...언니는 히나코 언니랑 다른 친구들이랑 다니는 게 더 좋아서 나 따위는 눈에 안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오간다. '아무것도 아냐!'하고 그대로 방으로 도망가고 싶어졌지만 겨우 참았다. 그랬다간 야에한테 교과서로 맞을 거 같다.
꼴깍, 하고 침을 삼킨 뒤 긴장하고 있다는 걸 언니에게 들키지 않도록 별 일 아니란 표정을 지어가며 겨우 말을 걸었다.
"이번 일요일에...언니랑 같이 자전거 타고 싶은데...아, 그게, 그러니까...ㄴㄴ,나나나, 나 요즘 언니 전에 타던 거 타고 있는데..."
"요즘 계속 그거 타면서 달리고 있었지. 하즈키는 자전거 타는 거, 재미있어?"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나.
"언니나 히나코 언니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이제 조금은 탈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해...같이 다녀도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 말야. 그리고 같이 타는 친구도 있으니까..."
안경 너머 가늘게 떠진 눈이 빙긋빙긋 웃고 있는 거 같은 언니를 보고 그만 '케혹!'이라며 쩍쩍 마른기침이 나올 뻔 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그랬더니 이번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는다. 아, 난 왜 이리도 못난 걸까...
"그러니까...주, 주말ㅇ에 잘 부탁 좀 드리게슙니다?"
그리고 그대로 90도로 뻣뻣하게 허리를 꺾는 나...나 왜 이러지...?
켜져있던 TV에서 아나운서가 '다음 뉴스입니다'라고 말하기까지 시간이 엄청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다. 이대로 숨이 멎어버리는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언니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어서였다.
"그거 괜찮겠다~ 하즈키는 어느 쪽으로 가고 싶어?"
그 말을 들은 직후,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긴장이 풀리면서 그대로 카펫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 말을 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아이 참, 웃지 말래두, 야에...
"저기 있잖아, 하즈킷치. 지금 몇 월인지 알아?"
"9월이잖아. 말 안 해도 알고 있어."
"아아, 그래.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그럼, GSR컵 나가서 용기 내겠다고 말 한건 언젠지 알아?"
"8월 첫째 주..."
"그럼 그 1달 동안 YOU는 뭘 하셨습니까아~?"
쉬는 시간, 내 앞자리를 점거한 야에는 입꼬리를 비틀어가며 질책한다. 갈색으로 익은 야에는 수영부 부원답게 건강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니 분위기가 바뀐 애들도 여럿 있었다. 남친이 생겼다, 깨졌다는 것부터 온갖 소문들이 돌았지만 유일하게 야에는 '초등학생으로 돌아간 거 같아'란 혹평을 받는 중이다. 그것도 남자들로부터.
남자들은 야에한테는 무슨 말이든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뭐, 나도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있고 야에는 그걸 들어도 허허, 하고 넘기니.
다음 시간에 쓸 교과서와 전자사전을 꺼내고 교실을 휘이 둘러본다. 그런 내 시선을 야에가 디펜스를 하는 농구선수처럼 가로막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 하즈킷치 너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그러는 거지? 치사하다! 어른들이나 쓰는 더러운 짓을 하다니!!"
"그, 그런 거 아냐! 1달이나 지나버린 것도 알고 있고 언니랑 같이 타겠다는 것도 포기 안했다구!"
"그래서?"
야에는 일어서서 수사 드라마의 형사처럼 라이트를 비추는 것까지 따라하면서 날 심문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었던 것도 아냐, 도쿄랑 후쿠오카에 사는 장거리 연애 커플도아냐, 같은 집에 살면서 그것도 친언니한테 같이 자전거 타자고 말하기까지 대체 얼마나 더 걸려야 하는 건지 설명해 주실까...?"
"아..."
"GSR컵에서 야에는 엄청 감동했다구? '용기 내서 해볼게'란 말을 들어서. 그래서 언제쯤 가게 될 지 매일매일 9월 스케줄표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기다려왔다고...!"
'야에가 이치노세를 괴롭히고 있어!'란 말이 어디서 들린 것 같지만 잘못한 건 내 쪽이다. 야에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ㅏ.
"완전 함흥차사잖아. 금요일까지 기다리게 하다가 '아 벌써 주말이네, 이번엔 어디로 가 볼까...?'하고 기다린 게 벌써 몇 주라고 생각하시는지?"
"윽...미안......"
"아무래도 이쯤 되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마음으로 조용히 기다리는 엄마처럼은 있을 수 없다구??"
"......야에는 어머니랑 같이 안살아?"
"그건 그냥 말이 그렇단 거고. 그렇게 은근슬쩍 내빼려 해도 소용없어. 있잖아, 하즈킷치...너희 언니한테 나 소개 안시켜줄거야~? 아아, 하긴. 나라도 나 같은 애를 가족들한테 소개하는 건 싫겠지, 그렇겠지~"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괴고 푸우...하고 한숨을 쉬는 양. 이 이상 야에를 기다리게 했다간 둘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갈게 뻔히 보인다. 나 스스로의 나약함에 펀치를 날려가면서 야에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그게 아니라...아직, 고민 중인 게 있어서..."
"호오, 고민이라니 무슨?"
"언니랑 같이 갈 코스도 아직 못 정했고...아무런 계획도 없이 언니를 부르긴 미안하잖아. 그래서..."
"그래, 넌 그거구나. 하즈킷치."
"응?"
"데이트 코스를 정하질 못해서 반한 아이한테 프러포즈도 못하고 저만치 떨어져서 바라만 보고 있는 동정(童貞)"
"푸흡!!!"
무슨 소린가 싶지만 또 그만큼 심장을 꿰뚫은 것 같이 핵심을 찌르는 말에 나는 그만 왼 가슴을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너무해...야에한테 심한 말 들었어!!"
"난 그보다 더 심한 말을 하즈킷치한테서 듣고 있었는데 말이지... 자자, 어서 반격해 보라고. 기브 앤 테이크, 오른뺨을 얻어맞았으니 어퍼컷으로 되돌려주는 게 우정의 기본이다, 하즈킷치~!!"
야에는 말도 안 되는 이론을 말하면서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는 형사에게 심문받는 피의자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러니까 그렇게 고민 할 것도 아닌데 말이지... 내일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정도로 심각한 고민이야? 역 앞에서 7시에 만나서 적당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 되는 거 아냐."
"그치만! 재미없는 곳에 가자했다가 언니가 실망하는 건 싫고, 또 멋진 추억을 만들려면 꼼꼼한 계획이 있어야 하잖아? 근데 그게 정해지질 않으니까 계속 고민하는 거라구. 그러니까 아직도 언니한테 말도 못 하고 있구..."
"들으면 들을수록 하즈킷치의 동정 냄새가 풀풀 풍기네."
'요모다가 이치노세한테 이상한 소리 하면서 괴롭히고 있어!'란 말이 어디서 들린다. 야에가 말한 '동정 냄새'가 대체 어떤 뉘앙스인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야에는 손을 튕겨 딱, 소리를 내려 했지만 하지만 손에 기름기가 모자라선지 틱, 소리만 났다.
"칫, 하즈킷치가 남자고 그렇게 불안과 걱정으로 질척질척한 데이트 신청을 한대도 난 흥분해서 뒤로 넘어갔을 텐데 말이지... 히힛, '같이 부끄러운 거 많이 하자, 오빠?'하고 말야."
'아니, 성별이 바뀐다면 하즈킷치랑 내가 반대가 되는 게 더 나으려나. 응, 그쪽이 더 나을 듯?' 하고 한가롭게 중얼거리는 야에.
실제로 난 너무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언니와 처음 나가는 라이딩인데 이왕이면 좋은 추억으로 남았으면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슬쩍 스마트폰을 확인해보니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웅성거리는 교실도 수십초 뒤면 조용해진다.
"나도 그 정도로 하즈킷치의 정성이 가득담긴 라이딩 계획 받아보고싶다아~ 여름에 이곳저곳 다닐 적에도 뭔가 허전했었는데에~"
"그거야 '나 생각해 둔 곳 있어!'하고 매번 만나자마자 뛰쳐나가니까..."
"그렇긴 한데...그래도! 이제 날도 서늘해져서 다니기 좋으니까 시월 연휴[일본은 10월 둘째 주 월요일이 공휴일(체육의 날)이라 3일 연휴]때까진 어떻게 좀 해주라."
팔을 모아 간청하는 야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는 대학생이라 9월도 방학중인고로 히나코 언니나 대학 친구들이랑 같이 이곳저곳 다니고 있어서 이때쯤 계획을 잡아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야에는"
"응, 왜?"
"어디로 가고 싶어?"
다음시간 숙제 하는걸 잊어버려서 프린트를 보여달랄 때처럼 애원하는 목소리로 묻는다. 언니와 단 둘이 가는게 아니라 야에도 같이 가는거니 야에가 가고싶은 곳을 듣고 거기서 무슨 힌트를 찾아야겠단 생각에서 한 말이었다. 그리고 자전거에 대한 건 야에가 제일 믿음직스럽다. 어떻게 야에 도움을 받고 싶다는 약한 마음에서 온 거기도 하다.
"어디로 가고싶냐라...응, 그렇네... 가고싶은 데가 있달까, 자전거타고 나가서 해보고 싶은 게 있긴 한데..."
"어디?"
"고기 먹고 싶어. 배 터질 때까지."
"......뭐?"
그 순간 수업 종이 울려서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야에의 주문이랄까, 희망사항은 한층 더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ㅏ.
라이딩 나가서 배가 가득 찰 때까지 고기를 먹는다...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하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다. 자전거로 스테이크 하우스에 들어갈까? 하지만 빕졎차림으로 그런 고급 가게에 가면 쫓겨날 것 같은 의문과 불안이 든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계획은 윤곽도 세우지 못한 채 시월 연휴란 마감까지 시간은 무정히 흘러만 간다.
그 해결책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얻게 됐다.
"오우, 오랜만이다. 하즈키"
"......안녕하세요, 히나코 언니."
부엌에 차를 가지러 갈까 하던 차에 화장실에서 나온 히나코 언니와 만났다. 오랜만에 보지만 정말 키가 변하지 않는 거 같다...오히려 중학생인 내 쪽이 더 큰 것도 같다. 히나코 언니는 언니랑은 사이가 좋지만 나랑은 별로 좋지가 않다.
...솔직히 말해서 히나코 언니의 인간관계는 내가 계속 바라고 있는 건데 말이지. 같은 나이...는 자매가 될 수 없으니 한살 차이정도로 해서. 여튼 오늘도 히나코 언니는 언니랑 놀려고 온 거지만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치 않으면 굳이 찾아가면서까지 얼굴을 보는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히죽, 하고 미소를 지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고 이래저래 터치를 하더니...뭔갈 띄워서 내개 보여준 것이다.
"우후후훗, 봤다구~?"
"뭐, 뭘요?"
"이거. 여름에 GSR컵이란 자전거 이벤트가 있었는데 거기 현역 여중생이 코스프레를 하고 참가한 사진이 한창 인터넷상에 화제였단 말이지?"
"아! 아아! 아아아아아~!!!"
"아아, 야요이한테 보여주고 싶다~ 사진 보면 하즈키도 엄청 즐겼던 거 같은데 말이지~"
히나코 언니의 히죽거리는 미소. 액정에 비치고 있는 건 아이돌처럼 팔랑거리는 코스튬을 입고 헬멧을 쓴 채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나와 야에의 사진이었다. 그날 기분이 업 돼있는 상태를 사진사가 찍은 게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간 모양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홱, 하고 뛰쳐나가 스마트폰을 낚아채려 했지만 히나코 언니는 슥, 하고 잽싸게 피했다. 몸이 작고 날래서 쉽사리 잡히질 않는다.
"아, 아아아아, 안돼요! 부끄럽단 말예요, 보여주면 안돼애애애애애애애애!!!!"
"근데 언제부터 하즈키가 자전거를 타게 됐다냐. 그것도 엄청 어이없는 쪽으로 말야."
"그게 좀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어서...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그런 말 들으면 더더욱 말하고 싶어지는데 말이지, 큭큭큭큭..."
복도에서 쿵쾅거리며 스마트폰을 뺏기 위한 사투를 벌이는 나와 히나코 언니였지만 이후 '무슨 일이야, 히나코?'라는 언니 목소리에 움직임이 멈춘다. 나와 히나코 언니는 서로 마주보고 훅훅하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히나코 언니는 가볍게 어깨를 들며 말했다.
"그렇게나 싫은 거야? 야요이라면 분명 기뻐 할 텐데. 뭐, 그렇게까지 싫다고 하니 어쩔 수 없네."
하고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여기선 언니인 내가 동생의 부탁을 들어줘야지, 안그래?"
"으으...나랑 키도 비슷하고 어쩌면 내가 연상으로 보일지도 모르는데..."
"뭐?"
"아, 아무 말도 안했어요! 그러니까 언니한테만은 보여주지 마세요."
양손을 모아 꾸벅꾸벅 합장을 하는 나. 으으...역시 연상을 이기기는 힘들구나. 하지만 히나코 언니와 대화를 한다는 드문 경험을 해서인지 마음 속 고민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히나코 언니는 언니랑 오랫동안 알고지낸 사이고 자전거로 오만곳들을 다녀본데다 집은 중화요리점이니 맛집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 것 같다. 자전거를 탄 뒤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을법한 곳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히나코 언니. 언니한테 뭐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
"엥? 뭐야 갑자기. 표정까지 바꿔가면서."
말은 그래도 히나코 언니는 '언니'라는 말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혹시 자전거를 타고 가서 고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을만한...그런 곳 혹시 알고 계세요?"
"뭐??"
내가 물어봤지만 솔직히 뜬금없는 질문이긴 하다. 히나코 언니도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다. 아무래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어떻게 된 일인지 격정적으로 토해내는 나를 히나코 언니가 한손을 들어 제지한다. 뭔가 장난감을 얻은 듯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적당한 곳이 하나 있긴 하지. 가르쳐 줄 순 있지만 대신..."
"뭔갈 해야 하나요...? 설마 GSR때 코스프레를 하고 언니랑 히나코 언니 앞에서 춤추고 노래해야 하는 건가요...!?"
긴장감에 오들오들 떨며 말하는 나.
"그런 이상한 짓 시켰다간 내가 눈 둘데가 없다구...그리고 하즈키한테 그런 짓 시켰단 걸 알면 야요이도 가만있진 않을 거구."
뿌욱, 하고 뺨을 부풀리는 히나코 언니.
"그래, 자전거로 간단 말은 야요이랑 같이 간단거야?"
"네, 언니랑 같이 라이딩하고 싶어서... 고기는 같이 가는 친구가 주문한 거구요."
"'그래, 그렇구나...그럼 거기가 괜찮겠다. 그러고 보니 아미도 처음엔 그쪽으로 갔었지."
히나코 언니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사지마에 라이트하우스란 가게가 있는데..."
"사지마...요코스카에 있는 섬이요?"
"거긴 사지마(猿島)고, 내가 말한 사지마(佐島)는 즈시 남쪽에 있는 어항(漁港)이야. 나도 아직 가보진 못했는데 자전거쟁이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곳이야. 아마 야요이도 안 가봤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나는 '사지마'와 '라이트하우스'란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뒀다. 미우라 반도라... 거기라면 어떻게 다녀볼만한 곳이라 생각하고 있자니
"거기서 1200엔에 파는 햄버거가 있는데 그거 먹는 사진을 야요이한테 찍어 달래서 나한테 보낼 것. 그게 이번 정보료야."
"햄버거 단품이 1200엔요!?"
체인점에서라면 5개나 살 수 있는 가격이라 무심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히나코 언니는 태연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제대로 된 아메리카 디너 스타일 수제 버거는 그 정도 하지. 나 다니는 대학 앞에 유명한 가게는 런치메뉴가 2000엔이라고. 1200엔이면 싼 거지."
"와아...중학생한텐 아직 머나먼 세계의 이야기에요...
"나도 그런 럭셔리한 점심을 매일 먹는 건 아닌데...여튼 기대하고 있을게, 우후후후후후..."
히나코 언니가 눈을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는데...모르겠다. 언니가 다시 히나코 언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나와 히나코 언니는 서로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나는 히나코 언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이것저것 가르쳐 주셔서..."
"에이, 뭐 이정도갖구."
히나코 언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실로 돌아갔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진 모르겠지만 덕분에 목적지를 찾은 게 기뻐서 나는 히나코 언니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이제야 언니와 함께 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으니까...
"으음...어쩌지."
나는 지울 수 있는 형광펜을 들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책상 위엔 도시락과 도서관에서 복사해온 지도가 놓여 있었다.
점심시간,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쳐놓고 생각에 잠겨있자니 책상을 들고 이쪽으로 야에가 왔다.
"오? 언니한테 이야기 했어? 그래서 지금 코스 짜는 거야??"
"아니, 아직... 먼저 어딜 어떻게 갈 건지 정해놓지 않으면 말 못한다구..."
"아이고, 왜 이리 답답하실까, 이 아가씬... 그래, 어디로 갈 건진 정한거야? 키요가와무라로 해서 미야가세로 국도 따라 가는 건 어때?"
야에는 젓가락 끝으로 자마 역에서 서쪽방향으로 줄을 그었다.
"그런 힘든 코스로 하면 언니한테 버림받는단 말야! 그리고 여긴 산 속이라 야에가 한 주문도 들어주기 힘들다구."
"주문...?"
야에는 입으로 김을 얹은 밥을 밀어 넣으면서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야에 너 기억 못하는 거야?"
"뭐 부탁받았던 기억이 있긴 한데, 뭐더라..."
"이왕 간다면 고기를 배불리 먹고 싶다 했었잖아."
"아아아아아, 맞다. 그랬었다."
왼손으로 주먹을 쥔 뒤 가볍게 이마에 갖다 대며 혀를 빼 무는 야에. 설마 난 본인도 기억 못하는 주문에 너무 머리를 싸매고 있었던 건가?
"이런걸 기억해주고 있었다니, 하즈킷치는 정말 믿음직스러운 친구야!"
"그리고 아는 사람한테 들은 정보가 사지마에 가면 고기를 잔뜩 먹을 수 있단..."
"사지마?"
나는 형광펜으로 사가미 만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야에는 그걸 보고 호오...하며 놀랐다.
"미우라 반도의 사지마라, 의왼데."
"그래?"
"미우라 반도라 하면 즈시랑 미사키, 아부라츠보, 죠가시마잖아. 기본적으로 생선과 해물로 유명한 곳이구. 보통 '고기'란 주문이 나오면 여기가 아닌 다른 데라고."
"그건 그렇지. 참치회로 유명하니까, 미사키는."
"아, 근데 하야마규라고 일본 흑우도 유명하니까 고기랑 아주 관계없는 건 아니네."
그렇게 말한 직후, 야에는 갑자기 배가 아픈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들오들 떠는 것처럼 보이는 야에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하즈키 씨는 사장 영애셨죠. 엄청난 금수저시라고..."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왜 갑자기 존댓말인데?"
"그게, 고기를 잔뜩 먹을 수 있는 곳이라 했으니까 A5와규[한국의 1++급]가 나오는 곳이라 휠은 물론 결전용 타이어 앞뒤세트로 살 수 있는 가격을 내야하는 고급음식점인건 아니지!? 고기 먹고 다음 달 재정이 파산되는 그런 곳은 아니지!?!?!?"
야에는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져 새파랗게 질린 채로 소리를 질렀다. 교실 안의 모두가 '아 또 요모다가 발작한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다.
나는 급히 히나코 언니의 말을 떠올려 야에를 진정시키기로 했다.
"아니, 그런 고급 음식점은 아니야. 햄버거가 1200엔인 곳인데...어때?"
"천! 이백!! 땡큐!!! 아, 근데 햄버거 하나가 1200은 좀...아아. 그 정도는 괜찮을지도."
내가 히나코 언니 말을 들었을 때처럼 '비싸!'라고 말 할 줄 알았는데 야에는 목을 손가락으로 긁적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 주변은 관광객들 대상의 멋들어진 가게들이 많은데...그런 디너카페면 그 정도 햄버거가 나올 만도 하겠다."
"거기가 어디냐면...여기, 라이트하우스란 곳이야."
"흠흠."
"여기서 점심을 먹는 코스로 하려는데...어느 쪽으로 몇 시에 만나서 얼마큼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자망서 미우라 반도까지 코스를 짜려면 항상 문제가 되는 게 바로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다. 미우라 반도의 뿌리인 쇼난·가마쿠라 쪽으로 가서 사가미 만을 따라 반시계방향으로 돌아 요코스카에서 산을 넘는 코스와 먼저 반도를 가로질러 요코스카로 간 다음 시계방향으로 도는 코스가 있다. 미우라 반도를 낮 동안 일주! 라고 한다면 좋겠지만 점심에 사지마에 도착한다는 계획이다 보니 어렵다.
야에는 우걱우걱 밥을 입에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사가미 만 따라서 내려간 다음 사지마에서 점심 먹으면 안 돼?"
"그럼 점심 먹고 나서 시간이 늦잖아. 집에 올 때쯤이면 밤이 될 걸."
내가 고민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일출 전인 새벽 5시에 출발해 한나절간 미우라 반도를 돌아 점심에 사지마에 도착, 이후 식사시간을 포함해 느긋하게 5시간을 보낸 뒤 일몰 전에 돌아온다는 점프 없이 짐을 최소로 하는 바람직한 계획이다. 하지만 아침 일찍 출발한다는 꽤 힘든 스케줄에 고기를 먹기 전까지 80km 가까운 거리를 달려야 하니 정작 도착하고 나선 지쳐 밥맛이 없어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반대로 사가미 만을 따라 시계 반대방향으로 가면 거리는 45km. 타임 로스나 휴식을 포함해도 4시간 정도면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지만 요코스카에 도착할 때쯤이면 일몰이다. 그리고 밤타임에 후지사와와 아야세를 달려야하고 지친 다리로 미우라 반도 뿌리 부분의 산을 지나야하는 고행길인 것이다...솔직히 밤길을 다니는 건 질색이다. 그래서 어쩌면 좋을지 자전거 선배인 야에한테 묻고 싶었다.
"무리하지 말고 그냥 요코스카서 점프해서 오면 되잖아. 너무 자전거에만 집착하면 시간에 신경 쓰느라 정신적으로 지친다구."
야에는 웬일로 그런 말을 했다. 분명 '기합 넣고 달리면 괜찮아!'라든가 '야라 경험도 해 봐야지!'라고 할 거라 생각해서 좀 놀랐다.
나는 소요시간을 계산한 뒤 점프...전철에 로드를 싣고 다니는 방식을 포함한 계획에 대해 물어봤다.
"그럼 요코스카까지 점프한 다음 남쪽으로 가서 칸논자키, 우라아, 죠가시마....이런 식으로 시계방향으로 도는 거 어때?"
요코스카에서 출발해 사지마에 점심께 도착하도록 미우라 반도를 시계방향으로 반주(半走), 이후 하야마, 즈시,가마쿠라를 지나 북상한 뒤 밤이 되기 전에 돌아오는 코스다. 처음에 점프 때문에 준비해야할 게 좀 있지만[일본은 전철 점프시 반드시 분해 후 포장해야함] 이쪽으로 가나 반대쪽으로 오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 하지만 야에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즘 시기에 아침에 요코스카로 가는 건 추천하기가 그런걸."
그렇게 말하며 야에는 젓가락 끝으로 미우라 반도의 남동쪽, 카네다 만으로 커다한 곡선을 그어 해안도로를 가리켰다. 의외였다. 그냥 지나가는 곳 중 하나로밖에 생각하지 않아서 여기가 문제가 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질 않았다.
야에는 젓가락을 다시 도시락으로 옮기면서 말했다.
"그리고 쇼난을 달리려면 석양 속에서 다니는 것도 좋지만 이왕이면 오전중의 기분 좋은 시간대였으면 좋겠어."
"응...."
"나라면 느긋하게 반시계방향으로 가는게 낫다고 보는데 어쩔래?"
"그렇다면...이런 식으로 가는 거지?"
"오, 하즈킷치도 이제 대충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는 거 같ㄴ."
야에는 형광펜 자국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트를 짜는데 굳이 지도를 복사해서 온데엔 이유가 있다. 스마트폰 지도 어플을 이용하면 일단 가장 크고 빨리 갈 수 있는 간선도로를 위주로 가게 되기 때문에 로드바이크로 다니기엔 너무 무서운 코스가 나오거나, 너무 짜잘한 길들을 이은 복잡한 최단코스가 만들어져서 기억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도를 앞에 놓고 기억 속의 교통 상황과 차로폭, 경사도 등을 검토해가며 손으로 루트를 짜는 게 자전거로 다니기에 더 낫다. 지난번에 야에에게 배운 것이다.
내가 짠 루트는 자마에서 42번 현도를 따라 중간에 크랭크 모양으로 꺾어 43번을 탄 다음 후지사와에서 휙, 하고 꺾어 바다로 가는 467번 국도로. 그 다음 에노시마까지 해안선을 따라 134번 국도로 이어가는 루트다. 그대로 134번을 타고 가면 사가미 만을 따라 쭉 가기 때문에 하야마와 즈시를 지나 사지마까지 가진다. 거기서부터는...얼굴을 들고 야에를 바라보았다.
"미우라 반도 다음엔 어떻게 가야할까? 바다를 일주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아쉬운데..."
"그럼 죠가시마 근처에 있는 미야카와 공원이지. 거기 경치도 좋고 하니까 이 기분 좋은 계절에 안 가면 손해라구."
"그럼...이렇게 해서 우라가 찍고...이렇게 하면 일주코스 완성이지?"
복사한 지도에 형광펜으로 선을 그어 나가...다가, 야에가 저쪽이 더 낫다고 얘기해서 펜 반대편 끝으로 지운 뒤 다시 선을 그었다. 마무리로 요코스카에 ☆을 그린 뒤 '골'이라고 썼다. 거리는...나중에 컴퓨터로 찾아보자. 야에는 손을 컴퍼스처럼 접었다 펼쳤다하면서 눈대중으로 거리를 재 본 뒤 말했다.
"대충 100km정도 되려나. 이러면 아침에 천천히 나와도 OK일걸. 오히려 기합 넣고 빨리 나왔다간 개점시간 전에 도착해서 한참간 근처를 어슬렁거려야 할지도."
그 말을 듣고 하하하 하고 웃다가 무서운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만일 연휴 때 라이트하우스도 쉬는 날이면 어떡하지? 정말 그렇게 된다면 아마 한심함과 부끄러움에 나는 사가미 만에 뛰어들지도 모르겠다. 응, 쉬는 날이 언젠지 확인하고 하는 김에 예약도 해 두자.
"돌아올 때 다른데 들렀다가 간대도 요코스카에서 점프하는 거니 완전 여유롭지. 그럼..."
야에는 지도를 들어 올려 내 눈 앞에서 팔랑, 하고 흔든다. 마치 차용증을 흔들어 보이는 빚쟁이 같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캐릭터 상이 야에에게 겹쳐져 보였다.
"라이딩 계획도 다 짜졌겠다, 어서 빨리 일정을 확정지어주지 않겠나, 하즈키 씨?"
"아으으...그게 제일 긴장된단 말이지, 언니한테 말 거는 게..."
"왜 그 부분에서 부끄럼 타는 건데? 무서워?? 나도 같이 가서 와 달라 부탁해 줘!?"
"거, 거기까진 안 해줘도 돼! 용기내서 해 볼 테니까!!"
불쌍한 사람을 바라보는 표정을 하는 야에에게 나는 주먹을 쥐어 보이며 외쳤다. '저 둘 왜 저러는 거야?'하며 주변에서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지만...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결국 언니에게 고백...아니, 라이딩 권유를 했다.
시월 연휴 마지막 날인 체육의 날. 언니는 스케줄이 없다고 했다. 이후 그날을 대비해 이것저것 준비를 했다. 이제야 언니 뒤를 따라 같이 다니는 날이 온 것이다. 용기를 낸 덕분에 소원을 이뤄지는 날이 기대가 되면서도 한편으로 무서워지기도 하는 이상한 기분을 맛봤다.
체육의 날은 옛날엔 10일로 고정돼 있고 항상 해가 쨍쨍했다는 기후적으로 특이한 날이었다는 것 같다. 만일 그런 특별한 날이었다면 나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사흘 연휴가 되게 시월 둘째 주 월요일이 체육의 날로 지정돼 있어서...토요일인 10일은 묘하게 추운 흐린 날씨, 그리고 11일엔 추적추적하게 비가 오는 불길한 예보가 나와 있었다.
예정 전날 밤엔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다. 일기예보에선 갠다고 했지만 만일 비가 오게 되면 중지되는건지, 아니면 그대로 가는 건지...또 비오는 날 언니를 억지로 끌고 나와도 괜찮은 건지, 야에는 어떻게 생각할지...연기하게 되면 또 언제 스케줄을 맞춰야 할지 등등을 생각하자니 위 언저리가 욱신거려 왔다. 내일 입고 갈 빕졎을 꺼내놓고 체력 보존을 위해 일찌감치 자려고 했지만 도저히 잠이 안 와서 한시간 간격으로 스마트폰으로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등 계속 딴짓을 했다.
사락사락하고 창 밖에 내리는 가랑비 소리를 들으며 일기예보에 새벽 4시부터 햇살 마크가 뜨는 걸 본 나는 어떻게든 잠을 청했다. 야에한테 톡을 할까 하다가도 분명 이 시간엔 푹 자고 있겠다 싶어서 그만뒀다. 내 불안감을 전염시키면 안 될 노릇이기도 하니 미래를 열어 나갈 내 용기가 악천후도 물리쳐 줄 거라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침이 됐다...
"안녕, 언니!! 날씨 좋아졌으니까 오늘은 문제없이 갈 수 있겠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비치는 부엌에 빕졎차림으로 뛰어 들어가는 나. 일어났을 땐 '이겼다!'하고 방의 창문을 열고 승리 포즈를 취하고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오늘은 탈 수 있을 거 같다. 날씨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날이 좋으니 비옷을 준비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게 기뻤다. 비 때문에 미세먼지도 다 씻겨 내려가서 아침 햇살이 어제의 어둑어둑한 날을 잊게 할 정도로 상쾌했다.
"응. 컨디션도 괜찮아 보이네. 어제 밤엔 잘 잤니?"
"좀 걱정이 되서 밤 샐 뻔도 했는데 여섯시 간정도 잤으니까 괜찮아!"
언니도 져지에 빕숏 차림이었다. FORTUNA라는 로고가 써진, 언니와 히나코 언니, 그리고 언니 지인들이 같이 만든 그거였다. 아아, 나도 저거 입고 싶다...나도 저런 식으로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하고 있지만 아직 만들어진 건 없다. 그 대신에 코스프레 주행을 하게 됐지만...뭐 그건 인생의 경험 중 하나라는 걸로.
"자, 아침 먹어야지?"
식탁 위엔 잘 구워진 토스트와 샐러드, 우유에 간단한 요리 몇 개가 올려져 있었다. 나는 언니와 마주 앉아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 예정은 어떻게 되니?"
그렇게 물어보는 언니에게, 나는 마가린과 잼을 듬뿍 바른 토스트를 베어 물면서 답했다..
"점심에 사지마에 도착할거니까 8시에 출발해서 야에...내 친구랑 합류할거야. 그 다음 히나코 언니가 가르쳐 준 가게서 점심 먹을 거야."
"그러고 보니 히나코가 거기서 톡 하라고 말했었지."
1200엔짜리 햄버거를 먹으란 히나코 언니와의 약속. 근데 대체 왜 그랬던 걸까? 가게는 오늘도 영업한다고 전화로 확인 했지만 햄버거가 어떤 건지 물어보는걸 깜빡했다.
"사지마까지라면 중간에 보급하는 건 따로 안 챙겨도 되겠다. 그럼 차분하게 아침식사로 칼로리를 채우자."
"응! 아직 시간 많으니까...배부르게 먹고, 점심때까지 열심히 라이딩 해서 배를 꺼트려야겠네!"
"어머나..."
언니가 웃는다.
오늘 하루는 정말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다. 나는 그런 기대에 찬 마음으로 아침을 먹었다.
"오늘 요모다랑은 여기서 보기로 한 거니?"
언니가 물었다. 나는 언니 창고 한구석에 서 있는 데로사를 꺼내 체크를 하면서 답했다.
"아니, 집이 가는 곳이랑 반대편이라서 42번 현도에 있는 세븐일레븐...타치노다이점 주차장에서 8시 반까지 모이기로 했어."
나는 속도계의 시간을 슬쩍 확인했다. 아직 30분정도 시간이 있다. 야에가 이리로 오는 것도 좋지만 언니는 분명 야에가 오면 차라도 한잔 하자며 안으로 들일 거고, 야에는 야에대로 창고 구경하겠다고 시간을 허비할 가능성이 높다. '일분일초도 헛되이 보낼 순 없다!'는건 아니지만 점심에 사지마에 가는게 늦어지면 그 이후 계획을 맞추는 게 힘들어질 것 같다.
"어...?"
스포츠 드링크를 채운 물통을 두개 꽂고 나니 뭔가 이상한걸 알아차렸다. 평소에 쓰던 공구와 스페어 튜브가 들어있던 안장가방이 어느 샌가 작은 배낭처럼 생긴 큰 사다리꼴모양의 가방으로 바뀌어있던 것이다. 그런 날 보고 언니가 말했다.
"그 안에 캐링백도 넣을 수 있어."
"정말? 그럼...배낭 안 메고 다녀도 되는 거야?"
"응. 그러는 게 더 편하잖아? 오늘 예정을 듣고 바꿔달았어."
그러면서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가 메고 있는 가방 안엔 캐링백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걸 안장가방에 넣으면 스마트폰과 지갑, 교통카드를 져지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다.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게 없다는 건 정말 가뿐하게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체인에 기름칠도 돼 있고 공기압도 충분하다. 라이트도 앞뒤 다 사이즈가 큰 걸로 바뀌어있다. 그러고 보니 야에도 터널이 많은 코스니까 라이트를 번쩍번쩍한 걸로 하라고 했었다. 언니는 코스를 듣고는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이만큼이나 장비를 맞춰준 것이다. 너무 고마워서...그만 나는 풀이 죽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언니...그, 이런 건 내가 미리 해 놨어야 하는 건데...저기, 해 줘서, 미안..."
어젯밤, 잠을 못 이루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동안 언니는 미리 내 자전거 정비까지 해 둔걸 알게 되니 동생이면서 뭐라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언니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니까."
오늘 언니가 타는 건 MAKINO 스틸 프레임. 다운튜브 아래 툴캔과 커다란 안장가방, 여러 개의 라이트로 중무장한 롱 라이드 사양이다. 헬멧과 고글, 클릿슈즈까지 착용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다.
"하즈키, 그런 얼굴이 아니라 웃는 얼굴로 가자, 알았지?"
언니 말을 듣고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짝, 하고 글러브를 낀 손으로 양 뺨을 두드렸다. 응, 좀 기분이 풀리는 것 같다.
언니 말대로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것 보단 언니와의 첫 라이딩을 성공하는데 집중하는 편이 낫다.
"응! 그럼 나도 곧 준비 끝낼 테니까 오늘 하루 잘 부탁할게!"
"나야말로 오늘 기대하고 있어."
언니가 웃으면서 답한다.
우리는 거의 정각에 집을 나와 미우라 반도 라이딩을 시작했다.
"그럼 야에랑 합류하러 가자!"
내가 선두에 서고 언니가 따라오는...뭔가 기쁘면서도 조금은 부끄러운 그런 기분으로 오늘 하루가 시작됐다.
집에서 나와 합류 지점인 편의점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이 주변은 남북으로 다닐 때면 몰라도 동서로 이동할 땐 꽤 급한 언덕을 오르내리게 된다. 워밍업도 없이 업힐을 하게 돼 초장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어 숨을 몰아쉬다가도 언니가 뒤에서 보고 있다 생각하니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42번 현도에 들어서자 경사도 좀 완만해지고 차도 적다. 평소엔 큰 트럭이 달리고 있었으니 확실히 오늘이 연휴란 느낌이 든다.
이렇게 나오니 정말 오늘은 하늘이 푸르고 공기는 건조하고 차가웠다. 신호 대기로 멈추니 바람막이를 입고 올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뒤에서 언니가 말 했다.
"응, 점심까지 사지마에 가면 되니까 천천히 가도 되고...아!"
내리막 도중에 세븐일레븐 간판이 보였다. 보도 단차에 앞바퀴가 엇나가지 않도록 조심히 들어가 주차장에 들어서니
"요호~!! 얼추 시간에 맞춰서 왔네!"
"안녕, 야에...지금 뭐 하는 거야?"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 단팥빵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야에가 있었다. 또래 여자 아이가 할 만한 행동이 아니잖아...근데 나도 피곤하면 이렇게 있으니 뭐라 하기가 그렇다. 만약 교복차림이었다면 말 할 것도 없이 꼴사나워 보였겠지만 이게 또 빕졎차림이면 그렇지도 않단 말이지.
"뭐긴, 아침밥이지. 부모님은 피곤해서 아직 주무시니까, 깨워서 내 밥 만들어 달래기도 미안해서 이렇게...아, 오오오!!!"
야에는 빵을 입에 욱여넣다 말고 일어나 손으로 구석구석의 빵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야에가 내 뒤에 있는 언니를 본 것이다. 언니가 멈추고 딱, 하고 클릿 푸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니랑 야에는 이번에 처음 보는 거지. 어어...언니. 얘가 나랑 같은 반이고 평소에 같이 자전거 타러 다니는..."
"요모다 야에입니다! 동생에게 언제나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응, 그렇네..."
"아! 왜 거기서 한숨이야!? 거기선 '아, 아냐! 내가 오히려 야에한테 계속 미안한 일 하고 있으니까 언제 선물로 카본 하이림 선물하려고 생각하고 있어'라고 해야지!!"
"나 그런거 없거든!? 나도 그런 비싼 건 안 갖고 있다구!!"
"아니, 언니가 이것저것 갖고 있으니까...에헤헤, 여튼 동생이랑 평소에도 이렇고 지내고 있어요."
손을 마주 쥐고 뭔가 억지웃음을 짓는 야에. 그런 모습을 보며 언니도 인사를 했다.
"안녕, 이치노세 야요이야. 앞으로도 하즈키랑 친하게 지내줘."
"아뇨아뇨, 저야말로 앞으로 계속 하즈키랑 지내면서 어떻게 그, 안 쓰시는 10단 구동계라든가 남는 안장이나 핸들 같은 거라든가 반 정도 쓴 오일이나 디그리셔 같은 거라도 받을 수 있으면 싶은데요...어떻게 좀 잘 부탁드립니다!!"
양손을 비벼가며 아양을 떠는 야에를 보자니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다.
"왜 첫 대면에서부터 그렇게 나오는 거야, 야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건 나쁘지 않다고? 그리고 '오호호호, 앞으로 이것저것 많이 배우겠습니다.'같은 번드르르한 말로 마음을 숨기는 것 보단 솔직하게 털어놓는 쪽이 더 원하는걸 얻기 쉬운 것 아니겠어?"
야에가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하는걸 듣고 있으니 그게 또 틀린 말도 아닌 것처럼 들려서 무섭다.
"그런가..."
"그리고 오늘은! 1200엔으로 고기를 배터지도록 먹을 수 있으니까 더더욱 욕망을 불태워야 하는 거 아닌가 싶네, 나는! 봐봐, 저 하늘의 태양처럼 말야!!"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동쪽 하늘에 떠 있는 새하얀 해를 가리키며 야에가 외쳤다. 직후 '윽, 눈부셔!'하고 눈을 감싸 쥐었지만.
언니는 우리 대화를 들으면서 쿡쿡 웃고 있다. 아, 언니가 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하고 생각하고 있으니 언니가 진지하게 말했다.
"둘이 사이가 좋네. 하즈키가 요새 엄청 밝아진 이유는 이 친구 덕분이었구나."
"그, 그런거 아냐. 난 예전부터..."
"아니, 정말 밝아졌는데? 처음에 하즈키를 봤을 땐 누구도 가까이 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껌 좀 씹을 줄 아는 그룹한테 괴롭힘 당할 거 같은 아가씨 같아서 묘하게 침침한 그런 분위기였다고."
"아, 정말! 그런 이야긴 하는 거 아냐!! 자, 야에도 아침 다 먹었으면 바로 출발하자!!"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선두는...하즈킷치가 하는 걸로."
"혹시 길 잘못 들면 말해줘. 뭐, 에노시마까진 몇 번이나 갔다 왔으니까 그러진 않겠지만."
야에가 벽에 기대둔 루이가노를 가져오는걸 보면서 편의점에서 따로 보급은 안 해도 되겠단 생각을 했다. 가을이라 물도 이정도면 충분하다.
"비가 그친지 얼마 안 돼서 쓰레기나 작은 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응, 자칫 잘못해서 펑크가 나기 십상이니까."
"셋이나 있으니 무슨 일이 생겨도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거 같지만...그래도 아무 일도 없는 게 좋겠지."
"이렇게 날이 좋은데 점심에 사고도 돌아가긴 싫잖아."
"그럼 언니, 오늘 하루 잘 부탁드려요! 수신호는 이게 정지고 이게 감속 맞죠?"
내 뒤에서 가운데에 서게 된 야에가 뒤돌아 언니와 수신호를 확인한다. 사람마다 수신호가 조금씩 다르다보니 이렇게 확인하는걸 보고 확실히 야에는 자전거를 많이 탔구나 싶다.
"응, 그러면 돼."
"네, 그럼 출바아알! 오늘 하루, 즐겁게 렛츠 고!!"
야에가 큰 소리로 외치는걸 들으며 나는 조심스레 좌우를 확인한 뒤 차도로 들어섰다. 아직 발은 가볍고, 그대로 휙 하고 속도를 내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우리 셋의 미우라 반도 라이딩이 시작됐다.
자로 동서로 선을 그은 듯한 246번 국도와 남북으로 뻗은 467번 국도인 후지사와 가도와는 달리 고속도로 직전에 크랭크 모양으로 꺾어 43번 도로로 들어가는 42번 현도는 지도로 보면 뭔가 오묘한 선형으로 후지사와까지 이어진다. 이곳을 달리다보면 알게 되는 건, 이 길은 꽤나 업힐을 타게 되는 길이란거다. 그래도 경사는 완만한 편이라 살짝이 옆을 보면 아침 안개에 싸인 주택가를 내려다 볼 수 있다. 도로 사정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갓길도 꽤 넓어서 로드바이크로 다니면서 무섭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뭣보다...
"우왓하~! 오늘 날씨 최고다아~!!"
이렇게 야에가 외치면서 뛰쳐나올 정도로 오늘은 라이딩 하기 딱 좋은 날인 것이다. 바람도 아직 부드럽고, 공기는 건조한데다 차차로 따뜻해지는 기온, 지금 이렇게 달리고 있는 게 꼭 신의 축복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빗속이었다면 절대 이런 기분은 아니다.
이렇게 맑은 날에 같이 라이딩을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다. 평평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또 힘든 것도 아닌 업힐에서 내가 선두에 서 쇼난으로 가는 길.
"선두 바꿔줄까?"
"아니, 괜찮아. 오늘은 내가 에스코트 해야 하니까."
"너무 무리하진 마."
뒤에서 언니와 야에의 목소리가 들린다.
교통법규를 지키며 빨간불이 보일 때마다 신호대기를 하니 평속 20km/h정도로 느긋하게 가는 중이다. 공장이나 창고, 그리고 녹색 천으로 덮은 퀼트 같은 밭들 사이에 도로가 누비고 지나간다. '후지사와까지 몇km'란 간판의 숫자가 한자리수가 되니 반대편 차선이 북쪽을 향하고 우리를 추월해가는 로드 수도 늘어난다.
"오오, 역시 오늘은 다들 자전거로 가는구만...."
그리고 그때마다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하는 야에.
"안됐다, 오늘 같은 날 못 타는 사람들은."
"후지사와는 자전거 가게가 많네...하긴 이 정도로 타는 사람이 많으니 당연한가."
"최근 들어 부쩍 늘고 있는 도쿄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라는 모양인데...아, 이제 시가지에 들어서니까 조심해. 하즈킷치!"
파란불이 들어와 우리는 남쪽으로 향한다. 1번 국도의 아래쪽을 지나 43번 현도는 좌측으로 크게 방향을 틀어 북쪽에서 내려오는 467번 국도와 후지사와 역 북쪽에서 만난다. 467번 국도에서부터 에노시마까진 그대로 쭉 남쪽으로 가면 된다.
간간히 물통의 음료수로 마른 목을 축이지만 소비량은 여전히 적다. 다만 기온은 좀 올라와 있다. 어쩌면 일기예보에 나온 기온보다 더 올라서 오늘은 여름처럼 더울지도 모르겠다.
사카이가와 다리를 건너니 공기가 확 달라진 게 느껴졌다. 건조한 가을 고기 사이로 미묘한 습기와 유기물 냄새가 섞이는 것이다.
"바다 냄새...조금만 더 가면 바다야!!"
"이 앞에 있는 에노덴[에노시마 전철. 슬램덩크, 미나미 가마쿠라고교... 등에 나오는 초록색 전차] 건널목은 알아차리기 힘드니까 조심해서 전진~!"
"그 주변이 복잡하긴 한데 그게 또 쇼난의 묘미야."
그 말대로 이 주변은 주택가인 자마와는 꽤 다른 풍경이었다. 에노덴 선로를 지나 살짝 업힐을 타니 카타세히가시하마 삼거리에 도착해...환호성이 절로 나왔다.
"바~다~다~아~!!"
푸른 하늘과 푸른 하늘이 눈앞에 좍 펼쳐지는 개방적인 풍경의 에노시마. 몇 번이나 봤는데도 비가 그치고 깨끗해진 공기로 본 경치는 또 다르게 보였다. 바다에 기대선 녹색 테이블 같은 에노시마 너머로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후지산이 보였다. 맞아, 그러고 보니 아침에 첫눈이 내렸다고 뉴스에 나왔었지.
키타세의 백사장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야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와, 아직까지 수영하는 사람이 있네, 이제 10월인데..."
"응, 서퍼들도 엄청 많네."
30도까진 아니지만 이정도로 더우니 수영하고 싶은 마음도 은근슬쩍 생긴다. 그렇게 바닷가를 부럽다는 듯이 보고 있자니 야에가 음료수를 마시며 물었다.
"그러고 보면 하즈킷치한테 바다에 수영하러 가자고 말 했었는데 결국 못했었지..."
"로드타고 온 다음 수영하고 다시 자력귀가라니, 그런 트라이애슬론 같은걸 했다간 한 며칠 제대로 걷지도 못하니까 말야."
우리 이야기를 들으며 언니는 쿡쿡 하고 웃었다.
오른쪽에 아직 활기찬 해변을 두고 우리는 주행을 재개했다. 오늘은 놀러온 사람들이 많아서 쇼난 해안을 따라 가는 134번 도로엔 차가 많았고, 사이클리스트들도 후지사와보다 훨씬 많았다. 우린 이대로 해안가를 따라 가마쿠라, 즈시, 하야마를 지나 미우라 반도를 돌게 된다. 바닷바람을 끼고 달리며 언니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도로는 정말 자전거로 다니는 게 최고야."
"정말... 이런 날씨에 경치도 좋으니까."
오른편엔 완만히 호를 그리는 백사장과 푸른 하늘. 왼편엔 에노덴과 바다에 뛰어들 듯한 푸른 언덕.
"아하, 아하하하하하!"
핸들을 쥐고 페달을 돌리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자전거를 타면서 다른 건 다 훌훌 날아가고 '즐겁다'는 것만 남아있어서 행복하다.
134번 국도를 따라 늘어선 카타세에노시마, 가마쿠라, 즈시 같은 명승지 지형은 다들 비슷비슷했다. 아치형태의 모래사장 좌우를 가로막는 곶이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안 돼'하고 업힐에 만들고, 곧이어 다운힐과 평지를 지나 다시 업힐을 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단순반복이라 질린다는 느낌은 없었다. 교차로나 신호가 적어서 멈췄다가 가는 스트레스도 적고, 뭣보다 기분 좋게 달릴 수 있다. 이 해안도로를 따라 다니는 사이클리스트가 많은 것도 이해가 간다. 뭐, 우리가 그 사이클리스트긴 하지.
즈시 해안을 지날 때 쯤 야에가 뒤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휴식 안할래? 이 앞에 하야마에 맛있는 케이크 가게가 있다고 들었는데."
단맛의 유혹에 슬쩍 마음이 움직인다. 주행거리는 이제 30km, 살짝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언니와 함께 라이딩 후 케이크와 차를 먹고 마시는 다과회. 아아,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 될 것 같다.
하지만... 꾸욱, 하고 브라켓을 움켜쥐며 어깨 너머로 대답했다.
"점심때 배를 텅 비우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으니까 패스!"
"그래그래~ 아하하, 역시 단 건 들어가는 배가 다르...엥?"
"봉크 안 나게 조심 해야 해?"
언니가 걱정스럽게 물어봤지만 아침도 든든히 먹었고 물도 부지런히 마시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 본다. 다만 생각 외로 기온이 올라가서 어디서 보급은 해야겠다 싶다. 그때, 134번 국도가 하야마에 들어서면서 해안에서 내륙으로 꺾어 들어가 눈앞의 시야가 확 바뀌었다.
마치 산 속을 달리는 듯 살짝 업다운이 있는 도로가 됐다. 미우라 반도는 바다와 산이 번갈아 나오는 모양이다.
"여기서부턴 후미등을 켜는 게 좋을 거야."
"응."
신호를 받고 멈춰선 뒤, 잠시 안장에서 내려 스위치를 켰다. 뒤돌아보니 언니는 말없이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다. '잘하고 있어'라며 나를 칭찬하는 것 같았다.
"에헤헤..."
"하즈킷치, 뭐 좋은 일 있어? 혹시 속도계에 3이 주르륵 섰다든가?"
"왜 내가 슬롯머신 같은 일을 좋아 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시간도 거의 맞게 사지마에 가질 거 같으니까 좀 조심히 가 볼까."
지금 시간은 11시 쯤. 사지마의 가게도 11시부터 개점이라 했으니까 딱 좋을 때다. '히나코 언니가 말한 햄버거...대체 어떤 걸까?'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라이딩 중의 기분 좋은 생각으로 다시 머릿속이 가득 차 버렸다. 초록빛 언덕을 오르는 길과 바다를 낀 해안도로가 번갈아 나온다. 해수욕장이 있긴 하지만 가마쿠라나 에노시마처럼 수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우리는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기분 탓인지 바람이 역풍이 된 것 같다. 주의 깊게 교차로마다 걸린 표지판을 보면서 가다 우회전 하기위해 멈췄다.
"사지마 입구...여기서 들어가면 되겠지?"
"좀 돌아가긴 하겠지만 그래도 제일 알기 쉬운 건 이런 거지."
134번 국도는 이 근처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니 해안에 있는 사지마로 가려면 여기서 빠져야 한다. 미우라 반도에 들어와 첫 교차로...이것도 어찌 보면 대단한 일이다. 사지마 입구는 살짝 오르막처럼 보였지만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거 같다...조금 피곤해지기 시작했지만 점심때 휴식하면 괜찮아 질거다.
뒤에서 야에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지마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데...이게 이렇게 돼 있구나..."
"나도...평소엔 가 본 적 없네. 큰길에서 벗어나니까."
"요트 계류장이 있어서 아버지 회사의 아는 분이 자주 이쪽으로 간다나봐."
"아, 나왔다. 금수저 대화! 서민은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시려오는 대회다!!"
"우, 우리 집엔 배 없어! ......어어?"
오른쪽의 해안을 따라 콘크리트 암벽처럼 어항(漁港)... 오오쿠스 수협이란 간판이 달린 사각형 건물과 정박한 어선이 줄지어 늘어선 광경이 푸른 하늘 아래 펼쳐져 있었다. 역시 바다를 보려면 바닷가라고, 쇼난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도로를 낀 어항의 반대편엔 아침에 잡아 올린 생선을 하는 활어식당이 늘어서 있고 저절로 그 앞에서 멈춰선 우리 셋은 멍하니 가게 앞을 바라보았다.
"생선 사서...갈 수는 없겠구나. 로드니까."
"갈치가 엄청 싸! 100g에 350엔이라니!!! 그래도 못 산다니 엄청 아깝다... 여기서 사서 바로 먹는 것도 아니고."
"어머, 나중에 여기 와서 바비큐 하는 것도 괜찮겠다."
소라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며 언니가 말했다. 물이 들어있는 통과 수조가 가득 늘어서 있었지만 봐도 봐도 뭔가 질리지 않는다. 속도계의 시계를 슬쩍 보고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겨우 틀어쥐었다.
"좀 더 빨리 와서 둘러보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정보 수집이 부족했어."
"그렇네~ 아, 뱅어다...훈제 만세기도 있어...맛있겠다......?, 하지만 우리에겐 고기가..."
뭔가모를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안장에 올랐다. 항구에 왔으니 라이트하우스(Lighthouse, 등대)는 조금만 더 가면 있을 거다.
항구 도로를 조심스레 달린다. 태양이 눈부시게 내리쫴서 기분이 좋다.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어, 하즈키! 고기, 고기는 아직이야!? 아─직─이─야─!!?"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이상하다?"
해안가에 큰 요트가 나란히 늘어선 계류장이 있다. 이 안에 그 가게가 있을 거다...아마도. 주변을 가로막는 펜스와 '관계자외 출입금지'란 경고가 붙은 간판 때문에 안에 들어가 볼 엄두가 안 난다는 것.
이상한데, 하고 야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저기 아닐까? 저기 깃발 있는 곳."
언니가 목소리를 높인다. 그 쪽을 보자
"저건..."
계류장 반대편의 빨간 깃발엔 흰 글씨로 '라멘'이라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게 세워진 주차장과 흰 컨테이너 박스. '응? 라멘 가게??'하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으니 뒤편에 빨갛고 까만 글씨로 '햄버거'란 글자와 '런치 메뉴 있습니다.'란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이다, 제대로 찾아 왔구나하는 안도감과 함께 조사했던 정보랑 좀 다르단 불만이 생겼다.
"여기...구나! 으으, 인터넷 지도랑 전혀 다른 곳이잖아."
"아하하하, 그런건 자주 있는 일이야! 보급 없이 온지라 이제 위가 꾸륵꾸륵 울고 있단 말이지...그럼!"
"아, 야에!"
자갈이 깔린 주차장에 로드바이크를 세워두고 언니가 자물쇠를 거는 동안 배가 고파 죽겠다는 야에는 메뉴가 써진 간판으로 달려들었다. 히나코 언니에게 이 가게를 들었을 땐 바닷가에 있는 좀 세련된 카페 같은 이미지였는데 메뉴를 보니 전혀 달랐다.
메뉴의 아래쪽 절반은 라멘과 야끼소바. 햄버거는 간판의 1/4정도고 나머진 함박스테이크 덮밥과 카레, 샌드위치, 핫도그 같은 게 적혀있는 꽤 난잡한 구성이었다.
"바닷가 매점...같아...팥빙수는 없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햄버거는...이건가? 음, 가격이 아닌데??"
야에가 가리키고 있는 건 스탠다드 버거 900엔...'어? 300엔 싸네? 이상하다?'하고 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게 안에 또 메뉴판이 있지 않을까?"
"그럴지도... 식당을 하는 히나코 언니가 음식에 관해 잘못 알고 있단 것도 이상하니...오늘 점심은 여기서 먹자!"
"오케! 실례합니다아~!!"
그렇게 우리들은 오늘의 제 1 목적지인 사지마의 라이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시간도 예상했던 거에서 살짝 늦은 정도로 너무 일찍 온 거에 비하면 훨씬 낫다.
......그리고 여기서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사지마 계류장에 있는 라이트하우스란 가게는 디너카페라기 보단 해수욕장 매점에 가까운 가게였다. 컨테이너 박스를 조립해 만들어진 가게는 마루가 깔린 구역과 흙바닥에 벤치를 내놓은 구역으로 나뉜 개방적인 구조로, 겨울이 되면 추울 것 같지만 또 그걸 위해 장작난로가 있어서 매점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주된 손님은 계류장을 이용하는 요트 손님들과 오토바이 동호회 회원들이란 걸 카운터 한편에 꽂혀있는 오토바이 잡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가게 안엔 아직 손님이 없어서 우리 셋은 벤치에 헬멧과 장갑을 벗고 제각기 적당히 둘러보면서 요리가 나오는걸 기다렸다.
히나코 언니가 말했던 1200엔짜리 버거는 가게 안의 메뉴판에 쓰여 있던 '1일 10개 한정 1파운드 버거'였다. 아직 손님이 많이 오질 않아서 주문할 수 있었다. 나와 야에가 그걸 주문하자 점장님은
"뭐, 여자애들에겐 많을 텐데 괜찮겠어?"
라고 말 했지만 야에는
"자전거 타고 오느라 배 엄청 고프거든요!"
라고 기세 좋게 말 했고
"그래, 그렇다면야!"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언니는 카레버거(그런 게 있었나?)를 시켰고, 우리는 주방에서 풍겨 나오는 치이익, 하는 기름과 고기가 불에 익는 소리를 들으며...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1파운드...가 몇 그램이었지?"
"몰라. 1kg은 안 되는 걸로 아는데..."
'애당초 내가 파운드 야드 변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해?'라는 야에에게 나는 '그렇네'하고 고갤 끄덕였다. 1파운드 버거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지만 사이즈 비교가 될 만한 담뱃갑이나 콜라 캔 같은 게 없어서 가늠이 되질 않는다. 일단 빵 사이엔 잘 구워진 패티와 양상추가 들어가는 모양이고, 사진만으로도 꽤 맛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문제는 이 1파운드가 대체 어느 정도 인지냐다.
언니한테 물어 볼까 했지만 언니는 자기 폰으로 뭔갈 보며 빙글거리고 있다. 그러는 사이 야에는 라이딩 코스나 재밌었던 일 같은걸 언니한테 물어보고 있었다. '같이 다니는 대학 지인들이랑 나중에 플레쉬를 나가려고 해'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에는 '좋겠다...'를 연발하고...역시 자전거 라이더들끼리 공통화제가 나오면 자연스레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구나.
가을에서 겨울까지 자전거 관련 행사가 화제에 올랐을 때, 능숙한 솜씨로 나와 야에 앞에 놓인 접시 위의 그것은 뭐라고 말해야 좋은 걸까.
그것은......거대한 갈색 베레모였다.
"야, 야야야, 야야야야야야에! 눈앞에 뭔가 이상한 갈색 물체가...!!"
"크다! 엄청 커!! 1파운드가 이렇게나 큰 거였나, 우호옷!!!"
눈앞에 놓인 '햄버거'라는 물건은 체인점에서 300엔에 살 수 있는 것을 한참 초월해 거대한 고기와 빵 덩어리가 '어떠냐!'하고 뭐라 범접할 수 없는 오라를 발산하고 있었다.
크다.
가격이 보통의 4배 정도면 사이즈도 4배여야 할 텐데, 이건 무려 10배를 넘어가는 초특대 사이즈라 머릿속의 가격 환산식이 와장창 부서지고 있다.
너무 커서 한손으로 들 수도 없다.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중간에서 부러질 것 같다. 보자마자 '베레모'라 말한 내 감상이 이해가 갔으면 좋겠다. 야에는 아예 헬멧을 가져와 사진을 찍을 정도였다. 확실히 지금 마시는 닥터 페퍼보단 헬멧이 더 비교하기에 적절하다. 감정 제어가 안 되는 것처럼 낄낄대며 스마트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야에 옆에서 잠시간 멍하니 있던 나는 겨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질 이해했다.
히나코 언니가 왜 여길 가르쳐주면서 웃었는지.
왜 1200엔짜리 햄버거라고 하고 1파운드 버거라고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왜 먹고 난 뒤에 인증사진을 찍으라고 조건을 걸었는지.
나는 얼굴이 새파래지면서 이게 다 히나코 언니의 장난이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렇게 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내 바보 같음에 무심코 식탁 위에 머리를 콩콩 찧고 말았다. 히나코 언닌 날 놀리려고 일부러 여기의 특대 버거를 지정한 거였어!!
언니는 우후후후, 하고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히나코 언니가 미리 언질을 한 건가? 이렇게 될 거란 걸...으으, 충분히 가능성 있어.
언니 앞에 놓인 카레 버거도 꽤 컸다. 하지만 1파운드 버거의 박력에 비하면 거인과 인간 수준이다.
야에는 승리포즈를 취하면서 내 등을 팡팡 기세 좋게 두드렸다.
"땡큐! 이 정도면 진짜 배가 터질 정도로 고기가 먹고 싶단 주문에 딱 들어맞아! 으흐흐흐, 진짜 고기의 신이 아니면 못할 최고의 답안이야!!"
"응? 아, 응..."
고기의 신이라니 대체 무슨 신인거야. 일신교? 다신교? 패닉상태가 잘 모르겠다.
그래.
이걸 먹지 않음 히나코 언니의 심술이 폭발해서 여름의 코스프레 사진이 언니한테 가게 될 거다...그래, 이건 고기란 이름의 넘어야 할 업힐이야!
"자, 기념촬영 해야지~ 햄버거랑 같이~"
언니가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지금부터 찍힌 사진은 히나코 언니한테 보내져서 저편 하늘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겠지.
'아하하, 저 커다란 햄버거 진짜 먹고 있어!'하고 말이다.
나와 야에는 주룩, 하고 육즙이 흘러나오는 1파운드 버거를 양손으로 쥔 뒤 어깨를 맞댄 채 렌즈를 바라봤다.
무겁다.
이 세상 햄버거의 무게가 아니다.
반면 야에는 아주 싱글벙글이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미묘한 내 표정과는 전혀 달랐다.
언니도 엄청 즐거운 듯이 '자, 치즈~'하고 구령을 붙이고 있고...
"잘 먹겠습니다~!!"
1파운드 버거는 그릴 위에서 딱 적당하게 익었고, 양파도 적당히 아삭거리고 넘쳐흐르는 육즙은 정말 맛있었다. 크기가 크기니 미국 음식처럼 별다른 맛 없이 기름기만 많지 않을까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1파운드, 450g이나 되는 패티와 그에 걸맞은 모자 사이즈의 빵은 공복상태에서도 먹기 힘들었다. 야에는 벌써 자기 걸 다 먹고, 1/6정도 남은 내 것까지 먹어치웠다.
나도, 야에도 '배불러...소화 좀 시키자...'하고 말한 뒤 잠시간 벤치에 늘어져 있었다. 언니가 시킨 카레버거는 카레 가루가 섞여있는 거라 스파이시한 버거로 양도 딱 적당한 정도. 다음에 여기 오게 되면 보통 사이즈 햄버거나 샌드위치, 라멘을 먹자. 응.
오늘의 교훈
코스 짜는데 열중해서 음식 체크를 소홀히 하지 말 것. 특히 누군가가 장난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선 더더욱!
"우와아아악, 역풍이다아~!!"
사지마를 나와 우리는 134번 국도를 타고 미우라 반도의 남쪽으로 향했다. 미사키, 그리고 미우라 만도의 최남단인 죠가시마로.
배가 잔뜩 찬 내가 가운데에 서고, 선두엔 왠지 모르게 배가 아프지도 않은 건지 기운이 넘치는 야에, 내 뒤에 언니가 섰다.
하지만 자위대 기지가 있는 곳에서부터 남풍이 강하게 불어오고 설상가상으로 차도 잔뜩 늘어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여기서 26번 현도랑 만나는 삼거리까진 자주 막히는 곳이야. 휴일이라 미사키랑 죠가시마에 사람이 많이 몰려서."
"차로 왔다면 여러 가지로 불편했겠다..."
이럴 때 로드바이크는 교통 상황에 상관없이 다닐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맞바람이 불면 순식간에 라이더의 힘을 빼놓는 어려운 탈것이 된다. 거기에 추가로 업힐. 이 둘이 오게 되면 엔진이 달린 탈것이 정말 부러워지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
기어를 낮춘 뒤 씩씩거리며 페달을 밟는다.
"우욱, 쿠후후후... 아직도 속에서 고기 냄새가 풍겨온다...근데 이대로 죠가시마까지 갈 거야?"
"응, 그 근처 미야카와 공원의 풍력발전소가 엄청 볼만하다고 하던데..."
옆을 백미러랑 핸들이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면서 차들이 슬금슬금 지나간다. 이대로 계속 역풍을 맞으며 차가 밀리는 134번 국도를 가는 건 가마쿠라나 즈시를 달릴 때와 비교하면 전혀 즐겁지가 않다. 거기다 기온도 계속 올라가고 있고... 습도가 낮아서 그늘에 들어오면 시원하긴 한데,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도로 위라 여름 때처럼 더워서 꽤 지쳐온다.
"목적지가 미야카와면 죠가시마까지 가지 말고 중간에서 빠져서 지름길로 가면 안 될까? 이와도 산이라고 내가 추천하는 곳이야."
신호 대기를 받느라 멈춰선 중에 언니가 제안했다. 나는 야에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래? 그럼 코스 바꾸자!"
"언니, 거기까지 안내해 주실 수 있어요? 그럼 선두 교대해서...아! 그럼 난 하즈킷치 엉덩이를 핥으면서 가야지!"
"배가 무거워졌지만 그렇게까지 힘 빠진 건 아니거든!?"
이번엔 언니가 선두, 후미엔 야에. 언니 바로 뒤에서 달려보긴 처음이다. 지금까진 '내가 기획자니까 안내해야 돼!'란 생각에 계속 선두에서 달렸으니까.
......이 등을 보기 위해 나는 열심히 용기를 내서 달려온 것이다.
이렇게 꿈이 이뤄졌단 생각을 하고 있으니 가슴이 벅차오르다가...
"아, 아으으...이렇게 뱃속에 밀어 넣지 말걸 그랬어......"
"안 돼, 죽지 마. 하즈킷치~!! 아, 근대 나도 배가...아구구구. 미우라 반도는, 산이 많아서 싫다ㄴ..."
134번 국도와 26번 현도가 만나는 삼거리를 지나 미사키로 가는 길은 진짜 떡하니 놓인 오르막길이었다. 거기다 강한 역풍. 거기에 언니 수신호를 따라 옆으로 빠져 나간 코스는 밭 사이를 누비고 지나간 뒤 업힐이 몇 번이고 이어져서...컨디션이 좋을 때라면 모를까 배에 고기를 5/6파운드나 집어넣은 지금 상태로선 힘들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앞으로 나아가는 언니 뒤를 따라 갔다.
물통 안의 물도 이제 다 돼간다. 가을이면서도 이렇게나 더울 줄 몰라서 중간에 편의점에서 보급을 안 한 게 뼈아프단 생각을 하며 언덕을 올랐다.
"자, 여기가 이와도 산에서 경치가 제일 좋은 곳이야."
그런 언니 말에 브레이크를 잡고 고개를 들었다.
언니 뒤로 바다가, 새하얗게 보일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
절경이었다.
이와도 산...이랄까,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미우라 반도 남단의 경치. 밭은 흙과 푸른색이 대비되고 있었고,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이 바람에 흔들거리면서 저 멀리 보이는 흰 풍차 두개가 마치 조형물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푸른 바다와 하늘...엷은 구름과 함께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과 그 빛을 반사하며 물결이 잔잔히 일고 있는 바다. 비슷한 푸른색이면서도 옅은 수평선이 확실히 둘을 갈라놓고 있었다.
가까운 바다에서 천천히 나아가는 컨테이너선과 화물선은 손가락으로 집을 수 있을 거 같이 선명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안장에서 내리는 것도 잊은 채 나는 이 풍경에, 어떤 풍경화보다도 선명한 초록과 파랑의 두 색에 빠져있었다.
야에도 눈을 부릅뜨고 손으로 햇빛을 가려 저 멀리를 보며 놀라고 있었다.
"여기 이런 데가 있을 줄이야...전혀 몰랐어! 쩐다...!!"
"어때, 올만한 가치가 있었지? 오늘처럼 맑은 날에 오면 정말 경치가 좋아. 한겨울이 공기가 제일 맑아서 그만큼 경치도 한층 더 예뻐지지만 지금 이것도 그거에 못지않을 거야."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언니 등을 ?기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야에와 함께 여러 가지로 노력해왔다.
지금까지 따라잡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용기를 내서 언니에게 같이 가자고 말 했다.
그리고 이 고개를 무거운 배를 부여잡고 올라왔다.
이 바다와 하늘의 풍경은 '그러한 노력이 잘못된 게 아니다. 너희들은 정말 수고했다, 이건 포상이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싶다.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힘들게만 느껴졌던 남풍도 바다 냄새를 가져와 줘 몸과 마음의 씻겨 나가는 것처럼 상쾌하다.
무심코 눈물이 흐를 것 같았지만 계속 코를 훌쩍이고 장갑으로 코를 훔치며 먼지 탓을 해 본다.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히나코랑 아미, 아오이랑 처음 같이 탔을 때도 갔던 게 미우라 반도. 하즈키랑 하즈키 친구 야에랑 같이 탄 곳도 미우라 반도. 이렇게 미야카와 풍차까지 오게 되니...뭔가 운명 같네."
"응."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우리는 바다와 육지의 파노라마를 바라봤다.
문득, 언니 목소리가 휙 지나가는 바람 속에서 들려왔다.
"실은 있지...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언니...?"
"하즈키를 위해서 로드바이크를 준비해두고, 언젠가 자매가 같이 탈 수 있는 날이 오길 말야. 하지만 하즈키가 어느 정도로 탈 수 있는지를 모르니까 나나 히나코 페이스대로 달리면 무리하게 달리게 되서 자전거를 싫어하게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됐었어."
그건 걱정이 심했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6월에 정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야에 덕분에 마음을 다잡은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은인인 야에를 바라보니...반대방향을 보며 '오오! 호위함이다!!'하고 느긋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분명 야에는 딴청 피우는 척 하면서 자매간의 대화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 하는 걸 테지.
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계속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 하즈키가 먼저 나한테 라이딩 이야기를 꺼내와서...기뻤어."
"아냐, 나도...언니를 따라가고 싶어서, 계속 노력해 와서 이제야 겨우 달리게 된 걸."
"그럼 앞으로도 같이 타 줄 거지, 하즈키?"
"...응."
더 이상 뭐라 말 할 수도 없을 만큼 가슴이 따뜻한 감정으로 부풀어 올라왔다. 야에는 슬쩍 이쪽을 본 뒤 웃었다.
좋은 얼굴이었다.
응, 내 꿈은 드디어 이뤄졌구나...
아니, 이걸로 만족하면 안 돼. '이제 로드바이크는 필요 없어'하고 그만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좀 더 멀리 가봐야겠다고, 이렇게 즐겁고 기쁜 일을 단지 추억 속으로만 남겨두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미우라반도 남단의 미야카와 공원을 지나니 강한 남풍은 우리 편이 됐다. 해안을 따라 달리는 215번 현도도 꽤 낙타등 코스였지만 순풍이라 그리 힘들지 않았다. 다시 134번 국도에 들어서 카네다 만을 따라 완만한 커브길을 도니 가마쿠라나 즈시를 다닐 때처럼...아니, 스케일이 커져서 몇 배나 더 기분이 좋았다.
핸들의 속도계를 보니 시속 40km가 찍혀있어서 깜짝 놀랐다. 이렇게나 빠른데도 그렇게 페달을 밟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배도 좀 진정되고, 물 보급도 해서 나는 언니 등을 따라 달린다.
언니가 앞에 있어주니 정말 안심이 된다.
"그래그래, 이래서였어... 역풍일 땐 정말 싫다가도 순풍이 되면 천국이란 말이지!! 코스를 시계방향으로 하지 않은 건 이래서였다구!!"
양가 뒤에서 그렇게 외쳤다. 코스 선택때 반시계방향으로 가자 한 건 이런 이유도 있어서였구나.
해는 점점 저물어가고, 기온도 조금씩 떨어져가는 가운데 우리는 계속 북상해 우라가의 해변 카페에서 한차례 휴식을 취했다. 커피는 마셨지만 빵은 먹지 않았다. 여기까지 80km정도를 달렸지만 배가 전혀 고프지 않았기 때문이다...특대 버거 탓이다.
"음, 1파운드 버거는 보급식으로서 가성비가 끝내주네. 중간에 간식 없이 완주 할 수 있으니 말야."
"그래도 이후로 또 먹자고 하지 마. 그땐 나 라멘 먹을 거니까."
"아, 히나코가 그 사진보고 엄청 좋아했어~"
스마트폰을 보며 언니가 말했다. 나중에 히나코 언니를 만나게 되면 어떻게 복수를 할까...
"음, 역시 예상대로인가!"
자위대의 큰 군함이 정박하고 있는 요코스카의 항구. 우라가에서 칸논자키를 지나 요코스카 역까지 총 100km길을 완주하고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이라 생각했을 때였다.
요코스카 역 근처, 항구가 보이는 베르니 공원에서 서 있던 사람이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왔다. 붉은색과 흰색의 화려한 로드바이크를 끌고 언니와 같은 져지를 입은 키가 작은 여성 라이더였다.
"어머, 히나코?"
언니가 그 사람을 불렀다. 히나코 언니는 손을 들어 인사하며 우리를 보고 웃었다.
"아, 그쪽이 하즈키 친구? 아까 사진 잘 봤어~ 1파운드 버거를 꾸역꾸역 넘기는 그 모습...하즈키는 완전 죽을상이어서 덕분에 엄청 웃었다구."
"히이이이나아아아아코오오오 언니이이이이이....너무해요! 그런 거라고 미리 가르쳐 주셨으면...!!"
"미리 말 해주면 재미없잖아. 특히 내가!"
에헴, 하고 가슴을 펴는 히나코 언니. 뭐라 대꾸할 수가 없다...
그런 내 옆에서 야에는 싹싹하게 인사를 했다. 닮은 데가 많은 두 사람은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하고, 언니는 이를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여기서 혼자 뚱하게 있는 건...좀 그렇겠지. 히나코 언니는 날 가지고 장난을 쳤지만 그 코스를 짜는데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니까 괜히 여기에 불만 갖는 것도 그러니.
그리고 언젠간 히나코 언니와 같이 타게 되는 날도 올 테고.
"저기...히나코 언닌 왜 여기 계세요?"
"아니, 저기 소토보[바다 건너 치바쪽 지명]로 달려 나간 사키가 페리 타고 이리로 온대잖아. 마침 야요이도 이쪽으로 오니까 합류해서 저녁 먹고 야라 겸해서 오려고 했지. 아, 하즈키는 점프 뛴댔었나?"
요코스카 역을 가리키며 물어보는 히나코 언니.
그럼 저도 같이 갈래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언니, 히나코 언니랑 같이 와. 나는 야에랑 여기서 피니쉬!"
"응? 괜찮겠어, 하즈킷치?"
"응.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달까...피곤하기도 하고, 내일 학교도 가야하니까 밤새도록 달리면 아침에 지각할거 같아서."
석양이 내리쬐는 가운데, 나는 히나코 언니를 보며 '반격'이란 의미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 이상 언니를 독점했다간 히나코 언니가 외로워서 울지도 모르니까...사실 여기 온 것도 그래서죠?"
"아, 건방진 소리 하고 있네. 이 중삐리가!!"
히나코 언니가 장난스럽게 내 머리에 헤드락을 걸고, 야에와 언니가 웃었다. 그래,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너무 욕심 부리는 것도 안 된다.
이젠 언니뿐만 아니라 언니'들'의 뒤를 따라가야 하니까 이 뒤로도 계속 달리는 쪽이 좋겠다고 생각해서다.
"그럼 점프 준비부터 할까? 요코스카에서 환승하는 거 엄청 큰일이지~ 오후나는 복잡하니까."
"그냥 근처에서 내려서 자전거로 가도 되지 않아? 아, 야에."
"응?"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전철을 찾아보고 있던 야에에게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하루도 정말 고마웠어!"
"에이, 뭐 그런거 가지고. 오늘 고기도 실컷 먹었잖아! 다음엔 취향 바꿔서 생선을 주문해 볼까~"
야에는 헬멧을 벗어 땀에 젖은 머리를 긁적긁적 긁었다.
언니도 만족했다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수고했어, 하즈키."
"그럼 언니랑 히나코 언니는 밤에 사고 안 나게 조심해서 오세요. 그럼...!"
다음에 봐요.
모두 함께.
그래, 이후로도 나와 야에는 이런저런 것들을 계속 따라갈 것이다.
후기
"역시 사장 영애가 타는 자전거는 다르구만! 마키노 풀 오더메이드를 타는 하즈킷치네 언니는 역시 레벨이 다른 사람이었어! 하지마아안!!"
이라고 야에에게 대사를 시켰더니 M. 마키노 사이클 팩토리의 크로몰리 프레임 오더메이드를 주문하게 되고 정말 레벨이 달라지는지 어떤지 솔직히 궁금해하는 작가인 '아라모토 케이'입니다.
이번에 '롱 라이더스! 투어링 가이드'를 통해 연재하던 '롱 라이더스!'의 외전 소설 '퍼슈터즈!'의 단행본이 나왔습니다.
구입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미야케 타이시 선생님의 작품이 나오기 이전부터 저는 '메이드씨 학과 자전거부'란 메이드 아가씨 져지(사키가 2권에서 입고 있던)를 만든 장본인 중 한명이기도 한 터라 여러 관계자 분들과 교제하던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롱 라이더스! 0권'이 나올 쯤부터 작품의 성장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소설을 쓰면서 자전거를 타는 몸이라, 이 경험을 살려 '멈추지 않는 자전거 아가씨'란 자전거 라이트노벨을 집필한 경력이 있어서 '롱 라이더스! 투어링 가이드'에 외전소설을 연재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아 탄생한 것이 이 '퍼슈터즈'입니다.
하지만 아미 일행의 이야기인 '롱 라이더스!'의 캐릭터들이 나오는 소설이 아니라 주변인물의 자전거 이야기를 만들어달란 요청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어떤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할까 하고 꽤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야요이와 나이차이가 나는 여동생이란 '하즈키'가 태어난 것입니다만...야요이는 꽤나 대단한 물건들을 갖고 있는지라 그 여동생의 로드바이크는 별로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또 그런 소극적인 성격의 아이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고 나올 역으로 보이쉬하고 밝은 성격의 야에가 만들어졌습니다. 언동은 꽤 경박하면서도 마음씀씀이는 고운 복잡한 성격이지만 덕분에 매력적인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즈키와 야에의 '퍼슈터즈' 콤비는 같은 세계관이지만 본편인 '롱 라이더스!'의 주역들과는 만나지 않겠지...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6권에서 아미 동생 에미의 등장과 함께 배경에서 등장한 것을 보고 둘을 만든 부모로써 꽤나 기뻤던 기억이 나네요.
드라마 CD에서도 목소리가 꽤 어울렸다고 할까...여튼 여러분들께서 이쪽도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언제까지 계속 될 지 아직 알 수 없지만, 하즈키와 야에의 라이딩을 앞으로도 응원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6년 6월, 아라모토 케이.
중간에 나온 1파운드 버거의 위엄.
그거슨...햄버거라고 하기엔 너무나 크고 두터웠다...
여튼 이걸로 퍼슈터즈 완결입니다. 뒤에 이야기가 더 나올지는...이시코우 씨랑 아라모토 선생만 알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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