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재, 성벽아래엔 기사들과 용병들이 완전무장한채로 집결하고 있었다. 공주의 망명, 알비온 침공, 게르마니아 선양같은 큼직한일이 연속으로 벌여지면서 현재 상태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국민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던 공주가 트리스테인을 배신한 사실은 전 국토에 널리 알려져 전 국민의 사기 저하와 혼란을 부추기고 있었다. 도로란 도로는 이미 피난행렬로 북새통이었다.
다행히 왕국에서 속속들이 새로운 소식들이 나오면서 혼란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귀족들의 의견 통일이 이루어진 것, 알비온의 함대가 바로 코 앞까지 다가온것, 그리고 트리스테인에 '허무의 사용자'가 강림했다는 기적이 그것이었다.
하 지만 사태가 너무 급격하게 변하는 탓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어찌어찌 모은 일반병은 겨우 이천명. 그 중 마법위사대와 용기사대의 일부가 선발 척후대로서 라 로셸로 향했다. 그리고 그 선발대엔 실피드를 탄 루이즈, 양, 롱빌, 시에스타, 타바사와 공작부인도 있었다. 처음에 공작부인과 양은
'트리스테인의 의사 통일을 위해 허무의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면서 루이즈가 왕성에 남는것을 권했다. 하지만 루이즈는
'만일 알비온함대가 이길 경우엔 "허무의 힘"없이는 승산이 없잖아!'
면서 동행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또한 시에스타는 평민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용을 쓰러뜨릴수 있는 총을 가진 사실이 알려져 동행을 허가받았다.
차 차로 해가 떠오르면서, 어둠이 밝은 빛으로 차오를 무렵, 풍룡무리는 라 로셀이 눈에 보이는 거리까지 다다랐다. 아니, 정확히는 마을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불길을 발견했다. 그것은 격침당해 땅에 처박힌 함선의 파편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풍룡대가 고삐를 바로쥐고 내달리려 할때, 그들 앞으로 한마리의 풍룡이 날아들었다. 전날 전령역할을 맡은 깅멜이었다.
"깅멜 대장님! 무사하셨습니까!!"
"전황은!? 함대는 어떻게 된 겁니까!"
"것보다 마을은? 항구는 어떻게 됐습니까!!"
마을로 향하려던 용기사들은 저마다 말을 뱉아내면서 깅멜의 곁으로 모여 들었다. 아직 전날의 피로가 다 풀리지 못한 용기사는, 자신의 곁으로 모여드는 부하들에게 고막을 찢을듯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알비온 함대는...큰 피해를 입고 영공에서 철수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환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제 28화 황혼에서 새벽으로
세계수의 부두엔 수많은 군함이 정박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정박한 트리스테인과 게르마니아 함대로 크게 수가 줄어 있었다. 당장에 봐도 이전의 절반 이하, 거기다 온전한 상태인 배는 한대도 없었다. 곳곳이 포탄에 부서져 겨우 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부두 옆 다리엔 큰 자루들이 줄지어 정렬돼 있었다. 장례를 기다리는 전사자들이었다. 또 그 옆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함대전에서 승리한 병사들이지만, 다들 크고작은 부상으로 인해 붕대를 감고 워터 메이지들의 치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치료를 기다리면서 함대전 이상의 충격을 받았다. 함대전이 끝난 뒤 도착한 깅멜에게서 선양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사이로 공작부인을 선두로 한 선발 척후대가 착륙했다. 거기에 앉아있던 병사들이 모여 들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공주님은...납치된 것이 아니라뇨!!"
"우리 나라에의 선양이라니...뭔가 잘못전달된건 아니겠죠!?"
"망명이라니...공주님이 망명이라니! 이게 무슨 소립니까!"
"그것보다 먼저 전해져온 명령서는 뭐요! 설마, 가짜정보로 우리를 이용한 건가!?...아니, 그게 사실이라해도 그 덕분에 우리 함대와 트리스테인함대가 생존할수는 있었는데...그래도 이건 뭔가..."
"에이, 그런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왕성은 어떻게 됐습니까!?"
공작부인은 성난 군인들에 둘러쌓여도 물러서는것 없이 위엄을 유지하며 어제의 사정을 모두 이야기했다. 양국의 군인들은 침묵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는 중에, 어딘가에서 한 남자가 언덕을 뛰어오르고 있었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 남자는 비탈을 오르면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타, 타르브...마을에!! 알비..온 군이!!!"
그 말에 시에스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지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쓰러질 듯이 양에게 몸을 기댔다. 루이즈 일행이 그 남자를 붙들고 그를 진정시켰다. 거기에 시에스타가 비틀거리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타...타르, 타르브에....알비온 구구구구군대가...?"
몰아쉬는 숨에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남자는 그저 고개를 무겁게 끄덕거릴 뿐이었다. 이에 시에스타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양이 그녀를 대신해 물었다.
"그렇다면 타르브 마을은...어떻게 됐습니까?"
땀을 폭포수처럼 흘리던 남자는 어떻게 숨을 고른 뒤에 겨우 대답했다.
"저...전멸...."
순간, 양은 실피드쪽으로 달렸다. 루이즈도, 타바사도, 롱빌도 거의 같은 타이밍에 땅을 박차고 실피드에게로 점프. 그대로 풍룡은 푸른 비늘을 빛내며 하늘로 비상했다.
그 남자의 말 그대로 타르브 마을은 전멸해 있었다.
마을 곳곳에선 불길이 피어오르고 곳곳에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은 없었다. 그리고, 촌장의 집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실피드의 등에 탄 사람들은 그 광경에 말문을 잃었다. 루이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롱빌도 지금 눈앞의 광경을 믿을수가 없었다.
"뭐야...뭐..냐구 이건...어떻게 된거야......"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마을에 널부러진 시체는, 모두 망토를 두른 '알비온 군인'이었으니까. 촌장의 집이 있던 곳엔 새빨간 비늘을 피로 물들인 용의 시체가 있었다. 머리는 무너진 잔해에 파묻힌 상태였다. 그 외에도 약 십여기의 용이 곳곳에 쓰러져 있다. 엘프 다음으로 적으로 돌리면 안될 알비온의 화룡기병대가 몰살당한 것이다.
시에스타가 어느곳을 바라보더니, 그 시선이 닿은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 저기! 저기 좀 보세요! 저기 초원!!"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태양빛에 빛나는 타르브 초원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타바사양, 저기 초원으로 가 보죠."
양이 이야기하기 전에 타바사는 실피드를 초원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이, 매쉬...왜 가만히 있는거야."
"내가 뭐?"
알비온 병사들은 초원에 몸을 숨긴채로 아침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르브가 이런 터무니 없는 실력의 마법사들에게 보호받고 있다니 들어본적 없다고."
오른뺨에 큰 흉터가 난,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라는 느낌이 나는 남자에게 한소리 들은 매쉬가 투덜거리며 답했다.
"나라고 뭐 알았나...그리고 난 와인 가지러 온거지 싸우러 온거 아니거든요? 그리고 저 중에 마법사같은 새끼는 한마리도 안 보였다고."
"진정해, 조나단."
방금 조나단이라 불린, 뺨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혀를 차곤 고개를 돌렸다.
"분명 험한꼴을 당하긴 했지만, 나도 매쉬도 조나단에 앤디까지 우리 넷 다 이번에도 살아남았으니 그걸로 됐잖아? ...어이, 앤디. 뭐야?
"아, 아니, 찰스...저기...귀족 양반들이..."
앤디라 불린 사내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나머지 셋도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시선이 닿은 곳엔 한 귀족이 필사적인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매에서 조심스레 지팡이를 꺼내고 있었다. 그 귀족을 보면서 네 사람은 서로 소근소근 의견을 주고 받았다.
"호오, 지팡이를 숨기고 있었나. 아까 내던진 건 가짜로군."
"거기다 저 기도...마음 독하게 먹은 모양인데?"
"그런거 같아...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하나라도 더 적을 죽이려는 눈이야."
"허어...어이, 저놈이 마법을 쓴다면, 그 주변에 있는 놈들은?"
네 사람은 일순, 얼굴을 서로 맞댄뒤 그 귀족에게서 최대한 멀리 거리를 벌렸다. 그들뿐 아니라 다른 군인들도 단번에 뛰쳐 달아나고, 지팡이를 숨기고 있던 귀족은 순식간에 허허벌판에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됐다. 그래도 그는 주문을 외우는걸 멈추지 않았고, 불 덩어리를 도망친 병사들너머로 날리려고 했다.
그 순간, 공중에 한줄기 섬광이 지나가고, 마법사의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마법사의 머리에 난 구멍에서 핏방울이 맥동하여 퍼져 나가고, 그는 그대로 쓰러져 움직이지 않게 됐다. 마법사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쓸데없는 명예에 대한 그 기도를 조롱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이 휩쓸리지 않게 된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타르브 초원에 있던 것은 바로 알비온함대의 상륙병단이었다. 그리고 그들 주위를 쟁기와 곡괭이를 꼬나뒨 마을 사람들과 창칼을 든 십수면의 군인, 그리고 몇몇 노인 마법사가 둘러싸고 있었다. 타르브 마을 사람들과 결혼식에 가지 않고 애스턴 백작령에 머물러 있던 군인, 그리고 애스턴 백작이었다. 그런 그들을 수없는 전투를 겪은 알비온의 군대가 무찌르지 못할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도 알비온의 병사들은 초원에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무기였던 창,칼, 갑옷, 지팡이는 초원 기슭에 쌓여 있었다. 그 병장기의 언덕주위엔 마을 여자들이 날붙이나 막대기를 들고서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애스턴백작을 향애 입을 모아 칭찬의 말을 던졌다.
"이야, 역시 백작님이십니다. 백작님의 멋지신 마법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멋졌어요! 저 산너머에서부터 용이고 마법사고 그대로 픽픽 쓰러지니 말에요!"
"이렇게 좋은 영주님을 모시고 있으니 저희가 어찌 게으르게 있을수 있겠습니까! 이제 좀 쉬시고 나머진 저희에게 맡겨 주시지요!!"
백작은 산쪽을 바라 봤다. 포도밭이 늘어선 산등성이로 하나둘씩 민가의 지붕이 보였다. 아까 날아온 빛은 포도밭에서 날아왔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온 탓에 그게 무엇인지, 누가 한 것인지도 알수가 없었다. 아니, 애시당초 그런 마법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백작과 부하들이 마을에 도착할 무렵엔 이미 그 빛이 용들을 모두 격추한 후였다. 지금도 간간히 알비온군대의 장교나 마법사들을 저격하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기척을 느껴 올려다보니, 몇몇의 남녀를 태운 풍룡이 머리위에 있었다.
"아! 다들 무사해요! 저기 있어요~!!"
시에스타는 알비온 병사를 포위한 마을 사람들을 보고는 얼굴빛이 돌아왔다.
"...어떻게 된거?"
타바사로서도 지금 상황는 이해할수가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그녀로선 알비온 상륙부대가 왜 이런곳에서 항복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됐다. 하지만 양은 현 상황을 확실히, 그리고 루이즈와 롱빌은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실피드가 포도밭 위로 낮게 통과하자 그 나무 아래에 있던 셋이 루이즈에게 손을 흔들었다.
"할어버지, 누나가 성에서 돌아왔어요!"
줄리안이 옆에있던 와이즈에게 안도의 말을 건넨다.
"그래, 이제야 우리 일이 끝났구나. 탄환이 떨어지기 전에 끝나서 다행이야. 자 돌아가자, 조르쥬."
"네, 아버지. 아직 군대는 오지 않았지만 이걸 쏘고 있던 모습이 들키면 여러모로 곤란해 질테니까요. 줄리안도 밤새도록 수고했다."
"헤헤, 이래뵈도 나도 사봐릿슈인걸요. 그래도 역시 할아버지가 짱이에요!"
조지라고 불린 사내의 팔엔 스코프가 달린 하전입자라이플이 있었다. 오이겐 사봐릿슈가 소지하고 있던 두정의 총중, 양이 정비했던 그 소총이었다.
알비온 용기병대의 습격을 눈치챈 사봐릿슈 가의 남자들은 바로 소총을 꺼내 화룡과 기병대를 저격했다. 붉은 비늘을 지닌 거대한 화룡도,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도 소총 앞에선 그저 단순한 도마뱀이요, 사람에 불과했다. 약 20기 정도의 용을 저격한 다음엔 초원에서 돌격해오는 상륙병단이 표적이 됐다. 저편에서 망토를 펄럭이며 달려오는 자들 부터 하나하나 쓰러트리자 지휘자가 없어진 상륙부대는 행동불능에 빠져 그자리에서 진군을 멈췄다. 상륙부대를 내려 보내던 수송선단은 이런 광경에 경학했다. 지원을 하려해도 배에는 무기가 없었고, 이미 마법사들은 지상에 내려간 뒤였다. 그러던 차에 함대전에서 패배한 알비온 함대가 퇴각하는 것이 관측되고, 함대의 기함에서 퇴각신호까지 나오니 수송함대는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그 차에 애스턴 백작과 부하들이 마을에 도착하고, 전의를 잃은 상륙부대는 무장해제를 당했다. 지금의 이 광경은 왕성에서 군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촌장의 가족들은 교대로 돌아가면서 밤새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군인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셋이 손을 흔드는것을 본 시에스타는 볼을 잠시 부풀렸다가 한숨을 내쉰뒤
"다행이다...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줄리안도 모두 무사하구나..."
하고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네...다행이야."
양도 마찬가지로 힘이 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그들을 태운 실피드가 마을과 초원 사이에 착륙하고, 시에스타가 뛰어내려 마을 사람들과 서로의 무사를 기뻐했다.
해가 완전히 뜨고, 늦은 아침이 되서야 라 로셸에서 날아온 풍룡기사대와 함대의 장교들이 타르브에 도착했고 알비온 병사들은 포로가 됐다. 다행히도 사봐릿슈 가의 소총은 완전히 들키진 않았다. 누가 물어도 '백작님 휘하의 마법사가 한일'이라 우겼고, 애스턴 백작또한 계속 말이 바뀌다가 결국 '누가 한 일인지 모른다'고 실토했다. 카린느는 저격당한 바법사와 용의 시체를 확인하고는 양과 시에스타를 노려봤다. 당황해서 모른척 먼산을 보고 있는 두사람에게 공작부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초원 기슭의 나무아래에서 카린느는 웅크리고 앉아 알비온 병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곁에 장검을 짊어진 양이 걸어오는걸 알아차렸지만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부인, 이제 그만 성으로 돌아 가시지요."
양의 말에 카린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포로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저...부인?"
다시 양이 말을 걸자, 카린느는 천천히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아쉽다......"
그 말에 양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그 다음에 올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가진...아니, 너와 그 흑발의 메이드와 이 마을에 숨겨진 총은 알비온군을 몰살시킬수 있을만큼의 힘을 갖고 있었군?"
그 말에 양은 입이 딱 막혔다. 그 탓에 잠시간 둘 사이에 침묵이 돌다가 양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할케기니아의 총과 비교해서 성능상의 우위가 있을지 몰라도 탄약이 다 되면 그냥 고철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리고 전함을 상대로는 아무것도 할수 없습니다."
공작부인은 고개를 돌려 양을 바라 보았다. 그 시선에 평소의 정열은 보이지 않고, 어딘가 모를 쓸쓸함과 슬픔이 묻어 나왔다.
"그 탄약부족이 오기도 전에 알비온의 마법사들이 전멸했어. 그말은 곧 귀족의 마법이 평민의 총에비해 열등하다는걸 증명한거야."
"아뇨, 그 총은 할케기니아의 것이 아닙니다. 저편 너머 제가 있던곳의 총입니다."
"그런가...우리 마법사들은 귀족으로서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어. 하지만 넌 마법을 쓸수 없는 평민이면서 군대의 원수자리를 갖고 있었지. 그 말은 네가 있었다는 그 세계에선 마법의 존재자체가 무의미한 곳이란 것일테지...그런곳에서 온 네가, 우리의 별 것 아닌 마법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생각을 했는지도 알것 같아."
양의 말문이 또 닫혔다. 지금 공작부인의 질문에 대체 어떻게 답을 해야 좋을지 그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양은 정치·군사방면 이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어떻게든 말을 이어갔다.
"제 나라는 그 나름대로의 역사와 전통과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할케기니아에는 할케기니아의 역사와 법이 있지요. 서로 다른 두 세계에서 어느쪽이 더 우수한지 가리는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카린느의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려 지휘관을 잃은 포로의 무리를 바라봤다. 그들 주위엔 트리스테인 군대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중에는 녹색이나 분홍색 머리도 보였다.
"역사와 전통이라...트리스테인은 그 역사와 전통을 이어 가는데에 충실했고, 그 결과 국력은 점점 떨어져 갔지...지금 보니 당연한 일이야. 평민이라도 힘이 있으면 귀족이 될수 있는 게르마니아나, 슈발리에 훈장이 수여되는 갈리아로 평민들이 이탈한 거야. 지혜와, 돈, 실력을 가진 평민들이 점점 국외로 유출되니 남는것은 정말 힘없는 평민들과 그들을 가축취급하는 우리 귀족들뿐. 그러니 지금 레콘기스타의 위협을 받아 이 사단이 나고, 게르마니아와의 동맹체결에도 실패하고, 결국에는 양위까지 하게 됐어. 역사와 전통이 있어도, 그것을 만들어 나간건 귀족들과 평민이라는것을 잊어버린 우리의 무지몽매함이 지금의 이 사태를 만들어 버린거야......"
카린느는 그렇게 읊조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자조와 자학으로 가즉한 힘없는 미소였다. 양은 거기에 위로를 할수 없었다. 실제로 국가가 영원 불멸할수 없다는것을, 양은 역사를 통해 알고 있었으니까. 인류 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영원히 이어져 온 국가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할케기니아에도 동일하게 적용할수 있었다. 바로 얼마전, 육천년 역사를 자랑해오던 알비온 왕가가 멸망했으니까. 계절이 바뀌면 옷을 바꿔 입는것처럼, 시대가 바뀌면 역사도 전통도 법도 바뀌게 된다. 그 주기가 인간의 수명보다 길기에 그것을 체감하기가 어려울 뿐이었다. 그렇기에 시대의 흐름에 농락당한 공작부인에게, 양은 냉철해 질 수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시대가 온다면 그에 맞는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살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으니, 살아만 있으면 그 방법은 언젠가 찾을수 있게 되겠지요. 실제로 저도 수많은 전투에서 패배했고, 고향의 나라도 멸망했습니다만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 덕에 할케기니아에 소환돼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카린느가 뭔가 떠올렸다는 듯이 눈을 뜨고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 보앗다.
"원래 나라에서 원수이자 최고 사령관이었다는거...소문이 아니라 정말이었던 거야?"
"어...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만, 사실입니다."
양은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고, 그러는 양을 공작부인은 구멍을 뚫은듯한 기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그런 과거를 가진 사람이, 딸인 루이즈의 속옷을 빨거나 옷을 갈아입히는걸 했다는 거야?"
"네, 맞습니다."
그 말에 카린느가 기가 막히다는듯이 쏘아 붙였다.
"아니, 넌...당신은 자존심이 없는 겁니까, 아니면 마음이 넓은 사람입니까?"
"글쎄요...그저 제가 있는곳의 방식에 따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당연한 듯이 말하는 양의 태도에 공작부인은 할 말을 잃었다. 조용히 둘의 이야기를 듣던 델프링거가 참견했다.
"줏대라고할까...뭐 여튼 귀족이네 원수네 하는 잘난척이 없는 거로구만."
다시 둘 사이에 침묵만이 있었다. 잠이 가득한 눈과 갈곳없이 방황하는 눈이 교차하고, 이에 공작부인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웃긴것을 본 사춘기 소녀처럼 진솔한 웃음에 양은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한바탕 웃은 전 만티코어부대 대장은 어흠, 하고 헛기침을 한뒤 양을 향해 돌아 섰다.
"흠 이야기를 바꿔서, 지금 이대로라면 추기경의 몰락은 기정 사실입니다."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새로운 재상이 임명될텐데...거기에 당신을 보좌관으로서 추천하겠어요."
하고 카린느가 고개를 숙이고, 그 행동 양은 곤란한 얼굴을 지었다.
"부인, 정말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를 이대로 루이즈님의 집사로 둘순 없겠습니까?"
카린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방금 나온 양의 말은 그 정도로 믿을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정도의 사람이...고작 집사로 만족하려는 거에요?"
"네"
"왜죠? 당신정도의 머리라면 알브레히트 3세의 오른팔로서 빠지지 않을 실력일 텐데요."
양은 작게 '나참...'하고 중얼거리곤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전 더이상 전쟁에 관여되기 싫습니다. 권력다툼도, 정치투쟁도 질색이구요. 지금 제 꿈은 느긋하게 술을 마시면서 역사책을 읽으며 한가롭게 생활하는 겁니다. 연금을 타면서 말이요."
공작부인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기가 막혔다. 알비온 함대를 편지 한장으로 퇴각시키고, 할키기니아를 전란에서 구해내겠다는 계획을 짜낸 사내가 천방지축 소녀의 집사로 만족하다니...잠시간 루이즈의 '허무'를 탐내는게 아닌가 의심도 해봤지만, 어딜봐도 그런 기색은 없었다.
"어이어이, 욕심이 없는것도 어느 정도라야지!"
"상관 없어, 차피 나한테 정치나 전쟁은 어울리는게 아니니까."
"아무리 그래도 말이다~ 그렇게 느긋하게 놀고만 있으면 검으로서 내 입장은"
"괜찮아! 매일 깔끔하게 손질해 줄테니까."
"...필요없어."
그런 양과 델프링거의 실없는 대화를 본 카린느는, 이제껏 봐왔던 그의 언동을 참고해 생각을 굳혔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딸아이를...아니, 발리에르가 모두를 잘 부탁드립니다."
"네, 이런 저라도 괜찮으시다면...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화를 마친 양과 공작부인은 마을로 돌아갔다. 카린느는 마을의 귀족전용 숙소를 임시 사령부로 삼고, 풍룡기사대와 애스턴 백작에게 라 로셸과의 연락과 포로 감시에 대해서 명령을 내렸다. 마을 사람들도 시체나 무너진 가옥 처리, 포로의 감시로 바빴다. 뭣보다 촌장의 집에서 사봐릿슈의 책을 회수하는것이 시급했다.
해가 저물어갈 무렵에서야 대부분의 작업이 끝나고 다들 한숨을 돌렸다. 인근에 남아있던 마법사나 군인들도 다들 저항의지를 버리고 포로가 돼 연행되고, 이후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양은 델프링거를 짊어지고 산책을 시작했다. 포도밭이 펼쳐진 산등성이를 천천히 올라 마을과 초원이 보이는곳에 도착해 숨을 돌리고는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 봤다. 흰 구름과 파란 하늘. 그리고 그너머 우주...자신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진공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는 다시 저기로 돌아갈수도 없는데 왜 이럴까...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델프링거도 아무말 없이 조용히 있었다.
"또 이런곳에서 멍하니 있는거야?"
롱빌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을 보니, 녹색머리를 바람에 흩날리며 착지하는 롱빌이 있었다.
"설마 또 누가 날 불렀다거나 한건 아니지?"
"그렇진 않지만...루이즈가 당신을 찾고 있었어. 멋대로 자리를 뜨지 말라고 전해 달라던데?"
"응, 그런 그렇네. 미안해."
롤빌이 양의 옆에 나란히 눕고는, 몸을 틀어 양의 위로 올라탔다.
"정말이지...아무말 없이 딴데 가면 안돼."
그리곤 둘의 입술이 가볍게 맞물렸다.
"어이, 잠깐만. 아직 해가 중천인데 이런데서..."
"그게 뭐 어때서. 어차피 마을에 돌아가면 여러가지로 바빠질테니, 사람도 없는 여기서..."
롱빌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양의 옷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아, 찾았다!!"
갑자기 하늘에서 루이즈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반신 누드인 양과 속옷을 벗으려던 롱빌이 당황하서 하늘을 올려다 봤다. 포도나무로 착륙하는 실피드와, 양을 향애 뛰어오는 루이즈와 시에스타가 있었다.
"윽, 시에스타! 뭐야 그건?"
"루, 루이즈도 갑자기 무슨일이야!?"
갑작스런 침입자에, 둘은 허둥지둥 옷을 입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루이즈가 양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진짜 뭐 하는거야, 이런때에! 내 전속 집사로서 자각은 있는거야?"
뒤이어 시에스타도 양의 품으로 뛰어들고, 채 옷을 입지못한 맨살에 시에스타의 큰 가슴이 꾹하고 달라 붙었다.
"너, 너무해요! 저도, 저도 양씨를 위해서 뷘드보나에서부터 이런저런 계획을 세웠는데! 게르마니아에 가면 내 차례라고 생각 했었는데!!
그 말을 들으면서 롱빌과 시에스타, 둘중 어느쪽이 더 큰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양이었다.
"자, 자자자자자잠깐! 둘 다 대체 뭐뭐뭐 뭘 하려던 거야! 서서설마, 그 그그그!!"
두 사람이 남녀간의 은밀한 일에 난입해온건 둘째치고, 시에스타가 자신과의 관계를 강요하며 달라붙어 있는 이 상황. 이런 사태에 대한 대처법은 양에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신기한 일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남녀간의 역사...그런데 역사를 배운 그에게 남녀교제에 대한 지식이 없다니......물론 양의 이런 생각 자체가 현실도피였다는건 말할 것도 아니다. 때문에 양의 머릿속은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반면 롱빌은 그저 죽을맛이었다. 특히 시에스타의 선언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와도 같았다.
"아니, 시에스타! 너 무슨 짓을 할 셈이야!?"
"그쪽이 따질게 아닐텐데요? 지금 양씨를 독차지 하려 들다니...허락할수 없어요!"
"무슨 말이야! 독점이고 뭐고, 양은 날 사랑하는걸!"
"됐네요! 그렇담 내가 양의 두번째가 되겠어요!"
시에스타의 첩/2호 발언. 그 말에 롱빌뿐만 아니라 양과 루이즈도 눈이 점이 됐다. 부들부들떠는 롱빌의 눈엔 지옥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와들와들 떨고있는 그녀의 애인을 집어삼킬듯이 노려 보았다.
"양?"
"...으, 응......"
항상 반쯤 풀린 상태였던 양의 눈은, 이제껏 한번도 치켜뜬 적 없는 크기로 열려 있었다.
"이 요망한 도둑고양이한테 확실하게 말해줘."
"뭐, 뭘 말야, 말에요?"
양은 지금 중앙검찰청에서 모살당할때보다, 레다II에서 암살당할때보다, 프레데리카에게 청혼할때보다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더할 나위없이 상큼한 롱빌의 미소 때문이었다.
"너따위는 필요없어...그렇게 말야."
하고 다시 생긋 하고 짓는 미소가 양의 마음을 한도끝도 없이 얼어붙게 만들었다. 양은 시에스타를 바라 보았다. 촉촉히 젖은 까만 눈동자. 항상 밝고 활기찬한 모습으로 자신을 지켜보던 그 눈은 지금,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스스로의 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상처를 주다니, 양으로선 차마 할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우유부단한 모습은 롱빌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서서히, 녹색 머리칼이 중력을 벗어난것처럼 일어서고 있었다.
"다들 그만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루이즈가 양의 목을 억지로 끌어당겨 시에스타에게서 집사를 떨어트렸다. 그 작은몸에 어떻게 그런힘이 나오는건지 생각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애인이나 연인으로 말하기 이전에, 양은 내 집.사.라.구! 그리고 나한텐 더없이 소중한 선생님이야!! 그러니 내가 있는 한 너희들 맘대로 되진 않을거야!!!"
하고 양에게 감은 팔에 힘을 주는 루이즈. 덕분에 양은 질식 직전의 상태에서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옆에 놓여진 장검이
"야,야! 그렇게 하면 양 죽어! 숨 못쉰다고!!"
하는 말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이 죽을적에 제일 괴로운 방법이 질식이라는건 사실이었구나....'
하고 양은 어렴풋한 의식속에서 납득하고 있었다.
"루이즈씨야 말로 적당히 하세요! 그러다가 양씨가 죽는다구요!!"
하고 시에스타가 양을 자기편으로 끌어냈다. 그리곤
"양 씨? 양 씨! 안되겠어, 지금 당장 인공호흡을..."
하며 양의 입술을 빼았았다.
"꺄아아-!! 야야야양을 돌려줘!"
"뭐 뭐하는거야, 쟨!!"
하고 비명을 지르는 루이즈와 롱빌. 세 여자에게 둘러싸여 이리저리 양을 끌어 당긴 덕에 불쌍한 양은 세조각으로 찢어지게 생겼다. 델프링거가 어떻게든 중재를 하려 했지만 그 누구도 그 말에 귀 기울지이지는 않는 것 같다.
"뀨, 뀨이...역시 인간은 재미있어."
"쉿, 감시할수 없어."
실피드와 타바사는 포도밭에 몸을 숨기곤 계속 양을 감시하고 있었다. 실피드의 거구가 포도밭에 숨겨지는지는 둘째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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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양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왜 이런말이 나오는지는 다음화를 보시면 알게 됩니다. 그건 그렇고 양씨양씨 하니까 참 기분 묘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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