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르론 요새 +1809레벨엔 삼림 공원이 있다.
인공 천체 내부의 인공 숲이기에 이곳의 생태계는 인간의 관리 하에 놓여있었고, 때문에 모기 등 인간이 해충이라 부르며 기피하는 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부자연스럽게 왜곡된 환경이라 평하기도 하고, '낮잠 자기엔 최고'라고 하기도 했다. 후자는 이 요새의 전 사령관이 한 평이었다.
그가 낮잠장소로 최고라 평했던 그곳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아마빛 머리칼을 지는 그 젊은이는, 한때 그의 스승이었던 사람이 항상 낮잠을 자던 벤치에 앉으며 이미 안이 텅 빈 스낵과 음료 포장을 옆에 내려두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먼발치서 바라다보는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아니, 그걸 사람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힘들었다. 그 그림자는 너무나도 컸으니까. 터질듯이 팽팽한 청바지와 흰 셔츠를 입고 스니커를 신은 복장은 평범했지만, 그걸 입은 사람의 크기가 인간이라 할 수 없었다. 신장은 2.5m가량 돼 보이고, 둥근 공을 잘 짜맞춰놓은듯한 근육이 온몸에 박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압감을 느끼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우물쭈물 대며 서성이다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쉰 뒤 벤치를 향해 걸었다. 그리곤 젊은이 앞에 선 다음 휴대단말을 꺼내 옷깃에 마이크를 달았다.
"저……. 율리안 민츠 사령관 맞으십니까?"
휴대 단말에서 말소리가 나왔을 때, 율리안은 별로 놀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율리안에게 말을 건 그 사람은 머리에 소라같이 생긴 뿔이 달려있고, 툭 튀어나온 주둥이에선 침이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런 괴이한 머리를 지닌 사람은 이제르론 요새에 한명밖에 없었고, 여기 온 이유는 이제르론에서 치료법을 찾기 위해서라는 걸 율리안은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사령관은 아니에요. 군에서 제대 했으니까요. 어…….라스칼씨였나요?"
"랄카스입니다. 왜 이곳 사람들은 제 이름을 자꾸 틀리게 기억하는 걸까요."
"죄송합니다. 저, 절 찾아오신 이유가 뭐죠?"
그렇게 말하고 청년은 미안하다는 듯 웃었고, 침을 흘리는 남자도 코와 입에서 웃고 있는 듯 거친 숨을 토해냈다. 소머리를 지닌 거인 남성은 온화하게 전 사령관과 말을 주고받았다.
그는 미노타우로스였다.
특별편 마법사들
삐리리 하고 자동 번역을 하던 단말기가 울린다. 이에 신화시대의 환수는 과학의 산물인 단말을 굵은 손으로 조작하여 모니터에 알림 내용을 띄웠다.
"실례, 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군요."
"괜찮습니다. 사정을 알고 있으니 편하게 행동하세요."
랄카스라 자칭한 미노타우로스는 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모니터의 지시를 따라 약 몇 개를 꺼내 입에 던져 넣었다. 크르렁, 하고 큰 트림을 토해낸 랄카스가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은하 제국 사람들은 모두 '의학은 마법에 뒤쳐진다.'고들 말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미노타우로스의 육체에 뇌가 이식된 저의 이성을 지켜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과학의 힘으로 만들어 진 약이니까요. 뇌의 기능을 제한해 폭주를 억제하는 향정신성약품이 없으면 저는 몸도 마음도 미노타우로스가 돼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습격해 인육을 취하고 있었을 테지요."
사람을 덮쳐 먹는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율리안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고, 그걸 본 랄카스가 당황해 머리와 양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아, 신경 쓰지 마십시오. 무심결에 해선 안 될 말을 해 버렸군요. 하지만 제가 지은 죄는 반드시 갚아야겠지요. 때문에 이 몸뚱이와 지식을 은하제국에 제공하고 있는 겁니다."
"아뇨,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랄카스 씨의 사정을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율리안은 이미 자초지종을 알고 있었다. 랄카스는 미노타우로스의 신체에 인간의 뇌를 지닌 존재라는 것을. 갈리아의 귀족이자 우수한 워터 메이지였던 그는 불치병에 걸린 육체를 버리고 미노타우로스에 자신의 뇌를 이식했지만 뇌가 육체를 이겨내지 못해 이성을 잃고 인간을 습격하는 괴물이 돼 버렸다. 그런 그를 갈리아가 잡아 이제르론에 후송한 것이다.
서로가 상대의 사과를 받아들인 후, 율리안은 다시 나직하게 신화시대의 짐승에게 말을 걸었다.
"병원 밖에 나와도 괜찮으신 겁니까?"
그 물음에 소머리가 위아래로 끄덕였다.
"주치의에게 외출 허가를 받았습니다. 또 미노타우로스의 본능이 발현될 때를 대비해 이…….초 고농도 리스페달을 받아왔지요. 원래부터 강한 향정신성약품이지만 제가 특이 케이스다보니 더욱 농축된 물건입니다."
하고 바지 주머니에서 녹색 병을 꺼내 보였다. 그 거대한 손에 쥐여진 병은 원래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셔츠의 칼라를 밑으로 내려 목덜미에 붙은 작은 기계를 보여줬다.
"그리고 여기 센서가 달려 있습니다. 이건 미노타우로스의 세포가 활성화 됐을 때 인간에겐 없는 야콥슨기관(페로몬을 수용하는 기관으로, 고등 영장류는 태아시기에만 잠시 나타난다. - 역주)이 활성화되는걸 감지한다더군요. 그렇게 해서 제가 이성을 잃게 될 전조를 보이면 이 기계가 먼저 강한 전류를 흘려보내 날 기절시킵니다. 그리고 동시에 병원과 경찰, 군대에 경보가 울리게 되죠. 살 거죽이 두껍고 물의 마력이 몸을 흐르긴 하지만 제국군이라면 큰 수고 안들이고 절 죽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다행이다', 하고 말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이야길 들으니 조금은 안심이 되네요."
미노타우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을 주머니에 넣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무엇보다 안심하고 있는 건 바로 저니까요. 이제 또 다시 사람을 습격하는 일이 없다는 것에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모릅니다. 갈리아에서 체포당했을 적에 조금이나마 남은 이성을 짜내서 절 죽여 달라고 얼마나 요청했는지 모를 겁니다. 하지만 샤를롯 여왕님은 나 같은 괴물에게조차 자비를 베풀어 은하제국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 사람들은 저를 단순히 실험동물로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저를 치료하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어요…….유전자 치료를 통한 미노타우로스 세포의 불활성화, 약물을 이용한 뇌신경 보호 및 도파민·글루탐산과 세로토닌과 같은 신경전달물질 보급...사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선 아직 공부중이라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네요."
"아뇨, 이 우주에 와서 일 년도 안 된 분이 거기까지 배우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율리안은 정말로 놀랐다. 이종간 뇌 이식을 할 정도의 워터 메이지기에 의학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식을 갖고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원 출신지는 마법 세계인 할케기니아. 그곳에서 나고 자란 그가 의학용어를 자연스럽게 입에 댄다는 점은 누구라도 놀라기에 충분했다. 뭣보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소머리의 환수가 의학용어를 나열한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위화감을 줬다.
통역을 하던 단말기가 이번엔 '우우우웅'하는 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병원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로군요. 모처럼 민츠님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아쉽네요."
"아뇨, 이 뒤로도 언제든지 이야길 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부디 그렇게 됐으면 좋겠군요. 그 유명한 양 님의 아들분과 만나게 되서 영광이었습니다. 쉬시는데 시간을 뺐은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미노타우로스는 휴대단말을 가슴 쪽 주머니에 꽂아놓고, 머리를 크게 숙여 인사한 뒤 더듬더듬 제국공용어를 말했다.
"ANNYEONG, DAUM-E DASI MANNAJA.(안녕, 다음에 다시 만나자.)"
청바지 차림의 미노타우로스는 그 무게 때문에 땅에 큼직한 발자국을 남기며 공원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걸어간 너머로는 인공 숲을 둘러싼 벽 한켠엔 창문이 많은 건물이 하나가 있었다. 최근 몇 년 새에 신설된 '이제르론 중앙 병원'은 거대한 종합병원이자 동시에 생명과학 연구소로, 환자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푸른 숲과 구름이 넘실대는 푸른 하늘이 투영되는 공원 근처에 부지를 마련해 병실 창문으로 그것을 볼 수 있게끔 해 두었다.
"나도 슬슬 일어나야겠네……."
벤치에서 일어난 율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빈 과자봉지와 음료수 캔을 둥근 벤치 옆 쓰레기통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그 무더기는 공중에서 '팅'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쓰레기통 안으로 떨어졌다. 율리안은 벤치와 오솔길 전체를 덮고 있는 투명한 강화유리를 톡톡 두드리면서 걸었다.
이곳은 이제르론이란 인공 천체 내부의 인공 숲. 그리고 이곳의 생물은 모두 과학의 관리 하에 있었다. 때문에 인간은 관리자 외엔 내부 접근이 금지돼 이렇게 유리로 된 작은 길로만 다닐 수 있었다. 그 유리 너머, 나무들에게 쏟아지는 햇빛 또한 과학으로 제어되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는 20세기에 남획으로 멸종된 것이 확인됐던 나그네비둘기가 날아다녔고, 쓸데없이 큰 몸집에 꼬리에서 이따금씩 불을 내뿜는 샐러맨더가 물가 바위에서 느긋하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으며, 눈알달린 괴물 벅베어는 공기 정화기가 내뿜는 바람을 타고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고, 족제비랑 비슷하지만 좀 더 크고 파란 눈을 지닌 할케기니아의 고대 환수 에코는 서로 털을 골라주고 있었다. 작고 얌전한 개체만을 수용하고 있지만 그래도 과학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환수들이 있는 삼림공원은 느긋하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르론 요새.
1년 전까지만 해도 은하 제국에 저항하는 공화주의자들이 사투를 벌인 최전선이었었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곳은 마법세계로 통하는 창구이자, 과학과 마법의 융화를 꿈꾸는 최첨단 연구시설이 됐다. 작년에 발견 된 소환게이트를 관리하는 '아인슈타인 로젠 브릿지'의 감시관측사령소, 통칭 '게이트'의 운영거점을 중심으로 제 2지구에서 데려온 무수한 생물들이 은하제국의 생물과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하는 연구기관, 제 2지구 연구기구 등등으로 둘러찬 이곳은 현재 은하제국 로엔그람 왕조 초대 황제 라인하르트 1세와 민주 공화제의 핵심요인 양 웬리의 정전 선언 일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준비로 분주했다.
"이봐, 율리안! 어딜 멍하니 다니고 있는 거야!!"
율리안이 현관문을 열자마자 날카로운 여성의 노성이 그를 맞이했다.
"오오, 왔는가 전 사령관 나리. 어라, 너님 피보호자랑 같이 있었던 거 아니었어?"
복도 안쪽에서 회색 머리칼에 주근깨가 가득한 남성이 슥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이제 그런 식으로 놀리는 건 그만둬주지 않을래요, 아텐보로 전 중장님?"
"아이구, 그렇게 불리니 옛날 생각이 절로 나는데. 그렇담 다시 한 번 제국 상대로 거하게 날뛰어 볼까?"
흉흉한 말을 하던 남자가 휴대 단말을 손에 든 채 방에서 나오고 뒤이어 파란 T셔츠에 짧은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뒤따라 나왔다.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고 빨리 들어와. 아 진짜, 이제 더 이상 이 사람이랑은 인터뷰 안 해!"
"이거 미안하군요, 레이디. 하지만 이게 기자가 하는 일이다 보니 용서해 주시길."
입으로는 사과의 말을 하는 아텐보로였지만 얼굴은 전혀 사과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으면서 아텐보로가 걸어 나오고 긴 분홍색 머리에 몸집이 작은 여자가 따라왔다.
율리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루이즈씨. 억지로 인터뷰를 하게 해서."
"정말이지, 이런 건 이제 질색이란 말야. 율리안이 아니었으면 절대 받아줄 생각이 아니었다구!"
그렇게 말하고 루이즈는 볼을 북-하고 부풀렸다.
하지만 율리안도, 아텐보로도 루이즈가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란 걸 이미 아텐보로의 선배이자 율리안의 양부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루이즈는 번역기의 합성음이 아닌 자기 목소리로 유창하게 동맹 공용어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근데, 양은 주인님을 내버려두고 어디 간 거야?"
방에 들어가 의자에 앉은 세 사람. 소파에 앉아 루이즈의 질문을 받은 율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을 하곤
"사령부일거에요. 프레데리카씨도 같이 갔어요. 거기에 행사 일정 조정이라던가 예행연습 때문에 카젤느씨도 갔었던 거 같은데…….아직 안 돌아오신 걸로 봐 오늘도 길어질 모양이네요. 제 기억이 맞는다면 아텐보로씨도 가셔야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응, 그런 건 나 없어도 알아서 돌아가."
가슴을 펴고 당당히 땡땡이중임을 선언하는 불량 중년.
"그리고 그런 의장행사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루이즈 아가씨한테서 할케기니아에서 선배님이 한 일들을 들어야 한단 말야. 선배님이라면 분명 그때 그일 이상으로 추태를 부린 게 있을 거란 말이지. 이제야 바라마지않던 기자가 됐는데 TV같은 저런 저속한 언론에 저항하지 않고 배기겠냐! 저런 진실 은폐와 사실 날조 따윈 엿이나 먹으라고 해!!"
그렇게 경애하는 선배이자 역사적 위인이 된 양 웬리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해 결의를 다지며 주먹을 치켜드는 아텐보로를 보며 루이즈와 율리안은 서로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루이즈가 책상 에서 리모컨을 들어 입체 TV를 틀었다.
"그 날조란 건 이 드라마겠지?"
입체 영상엔 중세 유럽의 성을 배경으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배우들이 과장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하필 이때 더벅머리 위에 베레모를 얹은 건장한 체격의 미남 배우가 유니콘을 타는 모습이 나오는 중이었다.
"확실히 심한 날조네요."
율리안도 동의. 그리고 아텐보로가 선배이자 전직 상관에 대한 모욕발언이 이어졌다. 선배는 이런 꽃미남이 아니라는 둥, 몸은 더 비실거려야 한다는 둥, 체면 치례하는 말 따윈 전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둥…….거기에 루이즈가 속옷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던 이야기나 양 때문에 자기마저 늦잠꾸러기가 됐다는 등 말을 거들었다. 그런 말을 들으며 율리안은 같이 끼어서 웃어야 하나, 아니면 양부의 명예를 위해 화를 내야하나 머릿속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던 것은 몇 달 전에 시작한 TV드라마 '이방인' 3부작이었다. 소환게이트에 휩쓸려 제 2지구에 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일단 대외적으로는 픽션으로 소개됐다. 은하제국의 사람들에게 할케기니아를 소개하기 위한 작품이다 보니 그 무대는 철저히 고증에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아텐보로의 말 대로 각색이나 연출로 인해 달라진 부분도 상당했다.
제 1부인 오이겐 사바릿슈의 이야기는 할케기니아의 벽촌 타르브 마을을 무대로 고난과 좌절을 뛰어넘어 성공을 손에 넣은 해피엔딩이었던지라 큰 각색은 없었다. 대체적인 내용은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일어나는 외지인이 인정을 받기위해 종횡무진 하는 눈물과 웃음이야기였다. 물론 극의 진행을 위해 마을을 습격한 불한당을 하전입자 소총으로 저격하고, 악덕 상인을 과학 지식으로 응징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그거라도 없으면 분위기가 살지 않기 때문에 추가됐다.
하지만 제 2부의 주인공인 요하네스 슈트라우스는 세계를 방황하다 절망 끝에 쓸쓸히 죽어간지라 대량의 각색이 들어갔다. 드라마에선 가는 곳마다 악인과 싸우며 약자와 평화를 지키고 바람과 같이 사라지는 수수께끼의 영웅이 돼, 오스만과 만나기 전 도적떼를 만나 쓰러트린 이야기는 할케기니아를 뒤에서 조종하던 사교집단을 괴멸시키고 그 수괴와 일기토 끝에 무승부가 되는 등 엄청난 과장이 들어가 있었다. 결말부인 '오스만의 도움으로 표면상으로 죽은 사람이 돼 타르브에 초대받아 오이겐의 도움으로 조용한 여생을 보내게 되지만, 다시 할케기니아에 악의 기운이 준동하게 된다면 총을 빼 들고 일어서게 되리라.'를 보고 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해서 였지만.
그리고 제 3부의 주인공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양 웬리였다. 2부를 본 이후로 양은 드라마의 줄거리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며, 드라마 제작진들의 인터뷰 요청도 응하지 않았다. 지금 방영중인 3부도 당연히 보지 않았다. 가끔 CM에서 드라마의 예고가 나오면 곧바로 채널을 돌려 버렸고, 이 드라마를 본 전 부하들과 친구들은 본인이 이를 보고 언제쯤 제작사에 항의 서한을 보낼지 내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참고로 루이즈는 3부를 빠짐없이 녹화해 보고 있었으며, 매 장면마다 배를 부여잡고 대 폭소를 했다.
"…….그런 거 때문에라도 난 반드시 선배님의 진실 된 모습을 보도해 보일거야! 그러니 부디 협력 부탁드립니다, 루이즈 님."
"응, 맡겨만 둬!!"
겸손히 고개를 숙이는 아텐보로를 보고 루이즈는 만족해하며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했던 것이다.
서로 죽이 맞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둘을 보면서 율리안은 잠시 잊고 있었던 문제를 생각해 냈다.
"저, 그런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죠. 곧 있으면 황제도 이제르론에 올 테니 그때 필요한 옷이나 연설에 대해서 생각해 보죠. 그리고 루이즈씨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는 건데 짐이나 선물준비는 잘 돼가고 있나요?"
"그러네……. 반입이 금지되는 물건을 피해서 선물을 골라야 하니 좀 골치가 아파. 메크링거 고등판무관은 참 융통성이 없단 말이지."
"그 분은 제 2지구의 문화와 문명, 생태계를 보호하지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그 분이 사하라에 주재하고 있지 않았다면 할케기니아는 이미 우리들의 문화에 종속되어 버렸을지도 모르죠."
"음, 그 점은 나도 맘에 들어. 그 사람은 정말 성심성의껏 고등판무관직을 하고 있거든. 뭣보다 제국 군인이면서 황제의 이견에 당당히 반대하는 사람이니."
율리안의 말에 아텐보로도 동의했다. 에르네스트 메크링거는 은하제국의 사자로서 고등판무관 직위를 받아 제 2지구의 사하라에 가 자신의 모든 열과 정을 제 2지구 조사 및 보호에 쏟고 있었다. 과학의 산물은 대부분 버리고 엘프와 같은 옷을 입고, 이동에도 말과 풍룡을 사용했으며, 아침 기상 때도 알람시계를 쓰지 않는 철저한 모습에 '볼일도 사하라의 사막에서 보고 모래를 휴지 대신에 쓴다.'는 농담이 퍼졌다. 그렇게 잡담을 하면서 세 사람은 행사 준비 및 루이즈의 선물을 고르는 것을 도왔다.
참고로 메크링거 본인의 입으로 화장실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다.
행사 준비로 한창 바쁜 이제르론 요새. 액체금속으로 뒤덮인 백은의 인공 천체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흰 유선현의 전함 '브룬힐데'의 한 방에서 침대에 누운 사람이었다. 그 옆에 있는 여성은 이제르론이 아닌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고 있었다.
"…….끝났습니다. 몸 상태는 어떠신지요?"
단정히 정리된 긴 금발에 긴 귀를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 엘프 여성은 조금 걱정스럽게 침대에 누운 남성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할케기니아 어였지만 옷깃에 붙은 기계에서 제국어가 흘러 나왔다. 자동 번역돼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말과는 달리, 이해는 되지 않아도 할케기니아 어 쪽이 방울소리마냥 듣기에 좋았다.
아이스 블루의 눈동자는 초점을 인공 천체에서 엘프 여성에게 옮겼다.
"양호하다. 항상 미안하군, 티파."
"아뇨, 저에겐 별 일 아닌걸요. 모든 것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반지의 힘 덕분입니다, 라인하르트 님."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여오는 라인하르트를 보며 티파니아는 언제나처럼 황송해하며 같이 고개를 숙인다. 그와 동시에 눈에 띄는 가슴이 크게 요동쳤고, 옆에서 시중을 들던 에밀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도 못본 척 시침을 떼려 하지만 결국 흘금흘금 시선이 티파니아의 가슴으로 향한다. 그런 사춘기 소년의 번뇌를 모른 척 하면서 실내에 있는 다른 사람이 엘프 여성에게 물었다.
"그럼 티파니아님, 그 반지 말입니다만 앞으로 얼마큼 더 사용할 수 있을는지요?"
"글쎄요……."
은 접시에 놓인 물의 정령의 힘이 깃든 반지를 바라보면서 티파니아가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폐하의 발작이 지금 같은 빈도와 증상이 계속된다면 3년 정도는 갈 것 같아요. 확실하다곤 말을 못하겠지만요."
그 예상에 군복차림의 남성은 오른손을 턱에 대고 한참 생각에 빠졌다. 동시에 허리에 얹힌 왼손을 까딱거리며 톡톡 소리를 냈다.
"그 정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폐하의 치료법을 찾기엔 충분합니다. 만일 상황이 급변한다 해도 랄카스 씨를 비롯한 제 2지구의 수계 마법사를 초청하는 방법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 말에 황제도 만족해했다.
"음, 참으로 마법의 힘은 훌륭하군. 어떤가, 바렌도 이를 이용해 왼팔을 치료하는 게 좋지 않겠나?"
그 말에 바렌 상급대장은 황송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폐하의 치료에 제공되는 티파니아님의 귀중한 마법 아이템을 감히 저 따위가 사용하다니 아까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이미 왼팔을 쓰는데 불편함이 없으며 의수에 애착도 가고, 더군다나 물의 정령이 깃든 반지로 팔이 새로 돋아나는 일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바렌의 말에 티파니아가 면목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네…….죄송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없어져버린 팔은……."
"그런가. 하지만 앞으로 진행될 연구에 따라선 그리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라인하르트는 눈을 반짝이며 향후 예산되는 의학의 발전에 대해 말했다.
"마법의 발견으로 지난 1년간 의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제르론의 랄카스의 도움 덕분에 단순 외상으로 죽는 사람은 사실상 제로가 됐으니 말이다. 즉사하지 않는 한 다들 확실히 살 수 있단 것이지. 거기다 골덴바움 완조시대에 봉인되거나 소실된 생명공학기술도 하나씩 복원되고 있다. 짐은 어쩌면 우주를 통일한 위업보다 과학 및 의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황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지도 모르겠군."
멀리 이제르론을 바라보면 말하는 황제의 미래상에, 실내 사람들은 모두 수긍했다. 라인하르트의 말은 진실이었으니까. 어떤 상처도 흔적 없이 치료해 버리는 치유 마법은 이미 의료 현장에서 절찬리에 활용되고 있었다. 그 주체는 이제르론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워터 스퀘어 메이지, 미노타우로스 랄카스였다. 그는 실험동물의 입지로서 이제르론에 왔지만 그와 동시에 인류 의학의 모든 것을 동원해 그의 뇌를 미노타우로스의 육체로부터 지켜내고 있었다. 그의 수계 마법을 최대한 치료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마법은 의학적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도 치료할 수 있었고, 피부마저도 완전히 재생해 내기 때문에 흉터 또한 남지 않는다. 거기에 미노타우로스의 육체 덕분에 인간을 뛰어넘는 스테미너로 임상현장에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워터 메이지는 그 혼자였지만 그가 모든 환자를 맡을 필요는 없었다. 마법으로 심장·뇌·췌장과 동맥과 같은 신체 중요기관만 살려낸다면 나머지는 일반 의학으로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수술의 성공률은 크게 올라갔고, 랄카스의 마력 또한 아낄 수 있었다. 환자의 입원·치료 기간도 크게 단축되었고, 의료·복지관련 예산도 많이 남게 됐다. 랄카스가 이제르론에 보내져 인간의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 의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런 밝은 미래상을 떠올리는 가운데 통신이 들어왔다. 모니터에 나타난 사람은 전 주석 비서관이자, 현 로엔그람완조 초대 황후인 힐데가르트 폰 로엔그람이었다. 체내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해 곧 국모가 될 여성이었지만 모니터에 비치는 표정은 어머니가 된다든 기쁨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우울한 표정을 보고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요, 카이저 린(황비). 무슨 일이 있었던 게요."
황비는 조금 주저하더니 간략히 사실을 전했다.
"그가……죽었습니다."
그.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그'라고 언급됐지만 라인하르트는 그게 누구인지 바로 이해했다. 푸른 눈동자에 경악과 슬픔이 들어찼다.
"……사인은?"
"자살입니다."
"누군가에게 강요받은 것은 아니고?"
"네, 틀림없는 자살입니다."
그 보고를 듣고 티파니아가 고개를 돌렸다. 바렌의 낯빛도 흐려져 있었다.
"그런가…….하지만 어째서 오베르슈타인이 아닌 황비가 보고를 하는 것인가? 이런 보고는 뱃속의 아이에게도 좋지 않을 텐데."
"하지만 이 보고는 제가 폐하께 전해야 마땅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티파에게도요."
"그렇군…….알았소."
중얼거리듯 황비의 말을 받은 황제가 돌아눕자 얼굴을 가리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힌 티파니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미안하군, 티파. 짐이 부족한 탓에 그대의 노력이 수포가 되고 말았다. 내 잘못이다."
"아니오, 폐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폐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라인하르트를 위로하는 티파니아였지만 곧이어 다시 입에서 오열이 새어 나왔다.
티파니아가 은하제국에 온 뒤, 그녀는 라인하르트와 함께 공식 행사나 회견 장소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은 라인하르트의 발작을 억제하는 것뿐만 아닌, 그를 암살하려했던 한 남자를 도우란 황제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베스타란트의 생존자로서, 베스타란트 학살을 고의로 묵인한 라인하르트를 증오하고 있었다.
구 제국 골덴바움왕조의 문벌귀족세력은 구 제국력 488년의 립슈타트 전역에서 자신들의 영지인 베스타란트에 핵공격을 실시했다. 민중의 반란을 학살을 통해 진압한 것이다. 라인하르트는 이를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 폭거를 묵인하고 전 우주에 공표함으로서 민심을 문벌귀족파로부터 떨어트린다.'는 오베르슈타인의 진언을 채택한 것이다. 그 결과, 문벌귀족은 와해됐고, 전역도 3달 일찍 끝나 전사자는 천만 명 미만으로 끝을 보았다. 하지만 동시에 라인하르트는 평생 잊지 못할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양이 이제르론에 귀환한 후 할케기니아에서 데려온 손님들과 함께 제국의 새로운 수도인 페잔에 도착했을 때, 라인하르트는 또 한 번 암살당할 뻔 했다. 즉시 붙잡힌 암살미수범은 본래대로라면 사형을 받아야 했지만 '또 다시 베스타란트의 사람들을 죽일 순 없다.'면서 그를 무죄방면 하였다. 그리고 티파니아에게 부탁한 것이다. 만일 그가 원한다면 그의 증오와 복수의 기억을 허무의 마법으로 지워줄 순 없겠느냐고…….
엘프의 습격과 계속된 내란으로 가족을 잃은 고아들을 돌봐온 티파니아로선 이 건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의 요청을 수락하고 암살자를 만나 기억의 말소를 제안했다. 암살자는 그 제안을 거부했지만 똑같이 전란에 농락당한 기억이 있는 티파니아의 이야기는 받아주었다. 돌아온 티파니아는 그가 새로운 인생을 보낼 수 있게 지원받을 수 없는지에 대해 강정했고, 라인하르트도 죄책감에 의해 충동적으로 마법에 의한 기억 소거를 생각한 것에 대해 후회하게 됐다. 이후, 티파니아는 반지를 이용해 라인하르트를 치료하면서 동시에 암살자의 카운슬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이제르론에서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페잔을 떠나게 됐고, 이때를 기다렸다는 것 마냥 그는 자살했다. 그런 속사정이 있었기에 방 안의 남자와 소년도 그녀의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분명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그의 곁을 떠났기에 그가 죽어버린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
"티파여. 그의 죽음은 결단코 그대의 책임이 아니다. 두말 할 것 없이 짐의 책임이다."
라인하르트는 침대에서 일어나 오열하는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지만, 그녀의 눈물을 하염없이 계속 흘러나왔다.
"어쩔 수 없군. 티파, 지금은 방에서 쉬고 있게. 바렌, 티파를 방으로 데려다 주게."
"알겠습니다."
의수를 한 장군은 엘프를 부축하면서 라인하르트의 침실을 뒤로 했다. 남아있던 라인하르트와 에밀도 조용히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마법도 결코 전지전능한 것만은 아니로군. 아니, 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 짐은 순간의 희열에 싸여 그런 것조차 애써 무시하려한 바보였던 게야."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지 않습니까!"
라인하르트의 약한 소리에 에밀은 필사적으로 황제에게 위로의 말을 꺼냈다. 하지만 왕제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이제르론을 바라만 보았다.
"그 남자라면 뭐라 말을 했을까."
황제가 생각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에밀은 잘 알고 있었다. 우주가 제 아무리 넓어도 황제의 상담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기 때문이었다.
"글쎄요~ 그런걸 물어봐도 전 모릅니다."
라인하르트의 머릿속에서, 그 상담자는 김빠진 대잡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라인하르트의 고뇌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모르고 있지 않을 텐데? 왜냐하면 이건 자네의 검이니까."
추궁 당하던 양의 뒤편 벽에 기대져 있던 장검을 뽑아들고 칼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벌써 몇번째인진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지 않겠나. 네가 어디서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니까 모른다고 몇 번이나 말하냐~!!! 이봐, 카젤느 양반. 이제 질리지도 않냐, 그런 질문 하는거."
장검은 코등이를 챙챙 하고 울리면서 답했다. 코등이 부분에 설치된 번역기에서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카젤느라 불린 남자도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턱에 손을 괴고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흐으음…….그렇담 어쩔 수 없지. 이제르론 요새 부사령관의 권한을 사용해서 분해해보는 수밖에."
"그, 그건 안 돼. 분해하지 말아줘."
장검은 정말 무서워하는 듯 부르르 떨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양도 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서 무척 피곤한 기색이었다.
"뭐가 어쨌든 데르 군은 내 검입니다. 설령 제국군이라도 남의 집 가보를 맘대로 징수해가는건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어이, 그럼 너네들 이거 하나만 대답해 봐."
"뭐 말이죠?", "뭔데?"
"너 매일 밤 콧노래를 부르면서 칼을 갈고 있다는 말이 돌던데, 사실이냐?"
"그래, 정말이야. 저런 음치가 흥얼대는걸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서리가 다 쳐진다고. 저 녀석 완전 음치야."
양보다 빨리 장검이 대답하고, 불명예스런 추가정보가 나오자 양은 옛 부하이자 친구인 그를 보면서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알렉스 카젤느.
양이 사관학교 재학시절 학교의 사무자장이었던 그는 데스크워크의 달인으로서 양 함대의 후방에서 사무 처리를 혼자 맡은 인물이었다. 그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제국군에게 초청받아 이제르론 요새 부사령관 겸 사무감의 지위에 올랐고, 양의 귀환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제르론 요새의 운영을 총괄하고 있었다.
이제르론 요새는 동맹이 멸망하고 양과 라인하르트간의 정전협정이 이뤄진 후 제국에 인도되었다. 그리고 군사시설들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마법 연구기관과 각종 실험 시설과 같은 복잡한 것들이 추가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게이트'의 출현 때부터 요새의 실무를 담당해온 카젤느가 사라지는 것은 은하제국에게 있어 악몽보다도 더한 일이었다. 덕분에 양은 이제르론의 막후 실세인 카젤느 부사령관에게 불려나가 그가 가장 싫어하는 장문의 연설을 연습해야 했던 것이다.
"간신히 군에서 제대했는데…….난 루이즈의 집사인데…….내가 뭐라고 이런 걸……."
물론 '2초 스피치'란 별명을 지는 양에게 있어 어떤 중요한 행사라 할지라도 긴 연설은 그에겐 고문이었다. 때문에 아까부터 계속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봐 이봐, 이건 그거야. 양 웬리란 사람의 운명은 그런 불쾌한 일의 연속이란 거라고."
"오, 그거 딱 맞네. 음음,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내가 그렇다고 보증해 줄 수 있어!"
물론 양은 그런 운명도, 보증도 기쁘지가 않았다.
"아니, 우선 황제 폐하가 직접 방문하는 것이니까 굳이 제가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 폐하 옆에 있으면 나 따윈 아무도 안본다구요."
체념에 빠진 전 상관의 모습에 전 부하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 하곤,
"저기, 양. 황제에게 은하제국의 헌법 도입과 의회 개설을 추진한건 너잖아. 그걸 발표하는 행사에 왜 니가 결석하려는 건데?"
"맞아, 나도 옆에서 들었걸랑? 거참 희한한 양반일세, 이제 와서 자기가 한 말도 안한 척 모른 척 잡아떼는 거야?"
"으윽……."
양이 포기의 신음을 흘렸을 때, 부사령실의 인터폰이 손님을 알리는 벨소리를 울렸다. 그리고 들어온 것은 감색 정장을 입은 프레데리카와 푸른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원피스 차림의 여자였다. 그런 그녀들을 보고 양은 마치 구세주가 찾아온 듯 마냥 만면에 미소를 띄며 그녀들을 맞았다.
"안녕, 이사벨씨. 아내와 같이 있었군요. 자자, 여기로 오세요."
"YAN, ORANMAN. GOMAWO(양, 오랜만. 고마워)"
이사벨은 번역기를 사용하지 않고 어눌한 제국어로 감사를 표하며 의자에 앉았다. 의자에 앉는 모습을 보면 겸손이라던가 예의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이 방의 사람들은 그녀가 진짜 공주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작 1년 새에 습관이 고쳐지리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프레데리카는 이사벨 옆을 지나 남편이 손에 든 연설 원고를 보았다.
"저기 당신, 제대로 연습하고 있던 거 맞아?"
그 순간 그들은 양을 구원해 줄 구세주가 아니었다는 걸 양은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풀석, 하고 어깨가 주저앉는다.
"저기, 프레데리카…….모처럼 이사벨씨와 만났는데 저기 그, 뭐냐…….간만에 친교를 나눈다거나 그러면 안 되는 거야?"
"SINGYEON SSUZI MA. IJE MAK HAKGYOESEO DOLAONEUN GIL. JOONGGAN-E Frederica REUR MANNASEO ONGEO. GOT BYEONGWON-E GANDA(신경 쓰지마. 이제 막 학교서 돌아오는 길. 중간에 프레데리카를 만나서 온 거. 곧 병원에 간다.)"
"병원이군요. 랄카스 씨의 조수를 한다고 들었는데요."
"MAZZA. BAM GGAZI SUSOOL-I DASEOTKAEYA. SIGAN-I EUOPSEO. ABEOJI NEUN Reinhard WA GATTI?(맞아. 밤까지 수술이 5개야. 시간이 없어. 아버지는 라인하르트와 같이?)"
이자벨의 질문에 카젤느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미안하지만 죠제프씨는 오지 않아. 역시 공공연하게 얼굴을 내비치지 않을 생각인가 봐."
"GEUREONGA...SIGAN BBEASSATTA. MIAN.(그런가……. 시간 뺏었다. 미안.)"
아버지와 만날 수 없다는 소식에 이사벨은 그다지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담담히 방을 나섰다. 죠제프와 이사벨라는 갈리아에 있을 적에도 광대한 궁궐 탓에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 적이 거의 없었었다. 그랬던 탓인지 삭막한 부녀관계를 보면서도 양은 불쌍하단 생각은 들어도 신기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사벨은 이제르론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물론 정상적인 수업이 아닌, 과학과 사회, 무엇보다 은하제국·자유행성동맹의 상식을 처음부터 친절하게 가르치는 특별 교육과정이었고 루이즈와 티파니아도 장소는 다르지만 같은 커리큘럼을 배우고 있었다. 그들의 수업성과를 보고 앞으로 제 2지구에서 희망자가 나올 경우 이민자들을 위한 수업을 개설할 예정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셋은 커리큘럼의 시범운영이기도 했다.
또 이사벨은 물 계통의 마법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랄카스와 함께 병원에서 의료에 종사하고 있다. 물론 스퀘어인 랄카스에 비하만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의학으로는 불가능한 치료를 할 수는 있었다. 때문에 이사벨도 마법 치료를 받기위해 전 우주에서 방문해온 환자들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죠제프는 묘드니트니룬과 함께 우주의 한적한 행성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소식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이거 참, 모처럼 종전 1주년 기념식이니 제 2지구에서 온 사람들이 전부 모여주면 좋았을 텐데. 이번에 잠시간 고향에 돌아갈 수도 있는데 말이지."
한숨 섞인 남편의 말에 아내도 동의했다.
"그러게 말예요. 전쟁이 종결된 건 그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말이죠. 모처럼 찾아온 귀향의 기회를……."
"어쩔 수 없지 않겠어. 갈리아 왕가의 셋은 망명자니까 말야. 결국 행사는 나머지 사람들로 진행할 수밖에 없겠군. 나로선 옛 동료들이 많이 없다는 게 아쉬워……. 하긴, 전 동맹군의 간부들이 옛 거점에 모여 있는걸 보면 제국군들이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니 뭐라 할 순 없지."
쉔코프, 메르카츠, 포플랭과 같은 전 이제르론 공화국 정부 중진들은 대부분 요새에 오지 않았다. 그들이 집결하는 것은 제국 사람들에게 공연한 자극을 준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와는 별도로 카젤느의 '나머지 사람'들이란 말에 양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나머지 둘의 얼굴을 본 지가 한참 되었었다. 그 의문은 카젤느가 풀어 주었다. 무척이나 질린 듯 한 표정으로 말이다.
"걔네들은 지금 샤프트네 방구석에 눌러 붙어있어. 뭐 건수만 생기면 몇 번이고 찾아와서 아주그냥 미쳐버릴 지경이야."
"거 참 희한한 일일세. 정말이지 말이 안 통한다니까, 걔네들."
데르프링거의 말에 양 부부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양은 그 뒤에 나온 말 때문에 더욱 더 쓴웃음을 지어 올렸다. 조금이나마 자신의 책임을 얼버무릴 셈이었다.
"어쨋던저쨋던 지금은 남의 일보다 자기 눈앞에 있는 일이나 신경 쓰시지? 자, 그럼 다시 스피치 연습을 이어가 볼까."
"아, 아니, 잠시 만요. 저기, 나한텐 루이즈의 집사란 중요한 책무가……."
하지만 두 명과 한 자루는 그 말에 속지 않았다.
"루이즈에겐 지금 율리안이 같이 있어. 그러니 당신은 자기 할일에 좀 더 집중해 줬음 하는데요?"
"그래그래, 그리고 너 말야, 집사가 할 일의 절반은 네 마누라한테 떠넘기고 있잖아? 솔직히 말해서 넌 집사로서 별로 도움이 안 돼."
"자 이야기 들었지? 이제 그만 단념하라고. 아내랑 칼이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는데 더 이상 말 꺼냈다간 가만 안있을거야. 잠자코 연습이나 라라고."
그리하여 시조 브리밀을 저주하던 양은 그에게 한층 더 불평불만을 마음속으로 쏟아 부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환상의 에피소드, 제로인제독 특별편입니다. 무섭도다 메크링거, 술에 진탕이 되서 라인하르트를 욕하더니 정말 할케기니아인인것 마냥 행동할 줄이야!
특별편 1편은 단순히 마법세계와 과학세계가 만나 벌어지는 소소한 만담이었습니다만 이 이후론 좀 분위기가 심각해 집니다.
다음번 제로인 제독 - 정전기념식을 앞두고 분주한 이제르론 요새. 그 인공 천체에 어두운 기운이 덮쳐든다!!
다음화 남 가마쿠라고교 여자 자전거부 - 걸즈 사이클링 투어를 앞두고 트레이닝 센터에 가게 된 남 가마쿠라고교(이하생략)! 그리고 그녀들을 바라보는 몇개의 눈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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