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호, 사령실에 앉은 라인하르트의 앞에 드 빌리에의 일그러진 미소가 비춰지고 있었다. 그 영상 옆으로는 밝게 빛을 발하는
소환게이트와, 그 주변에 정선한 배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소환 게이트 주위에는 차원의 구멍을 고정하는 약 천 척 가량의 전함의
열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제플입자가 살포된다면 입자 그 자체의 폭발은 함정의 유폭으로 이어진다. 현재 긴급히
외측의 전함부터 소환 게이트로부터 거리를 벌려나고는 있지만 각 함이 충분히 거리를 두기까지는 시간이 모자랐다.
"자, 그럼 이제 게이트를 확대해 주시겠습니까, 황제폐하?" 대주교는 언제나처럼 깍듯한 어조로 물었다. 한줌 먼지로나마 남아있던 대주교로서의 품위인건지, 아니면 겉으로만 취하는 황제에의 경의인지는 몰라도, 그 날이 선 마른 인상의 남자는 분명히 경멸과 조롱의 입웃음을 지고 있었다. 그의 배후로는 좁은 콕피트가 비치고 있었다. 아마도 함선에 탑재된 소형기로 옮겨 타, 발진을 기다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짐에게 감히 명령을 하는 것인가." "거부하실 수 있는 입장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기어오르지 말라, 이 방자한 것!" "말장난에 대꾸할 생각은 없습니다. 빨리 하시지 않으면 폐하도 핵폭발에 휘말릴지 모릅니다?" "흥, 너 따위에게 굴복한다면 나는 결국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남자엿다는 말이 된다." "용감하시군요. 과연 무패의 황제폐하, 하지만 당신의 어리광에 장단을 맞춰주다 휩쓸리게 될 사람들은 어쩌실 셈입니까?" "어리석은 소릴, 군인이라 되려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각오를 지녀야 한다." "군인은…그렇군요. 하지만 일반인들이 과연 그런 각오를 하고 있을까요? 특히, 이제르론에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은 말입니다." 순간 황제의 눈에 불이 붙었다. "네놈…설마!!" "네, 그 설마입니다. 이제르론 중앙병원, 저주받은 소 인간을 사육하고 있는 사악한 동물실험장이 있는 블록을 정화하겠습니다."
라인하르트의 단정한 얼굴이 분노로 뒤틀린다. 그와 동시에 대주교에 대한 분노와 저주의 말이 사령실에서 협상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에게서도 튀어나왔다. "네놈, 그러고도 성직자라고 할 셈이냐! 무고한 백성들을 괴롭히다 죽이는 것이 신의 가르침이냐!!" 분노에 온 몸을 떠는 황제와 사령실의 군인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대주교의 얼굴이 크게 비틀어졌다. "죄가 깊어 길을 잃어버린 양들도 우리들이 일으키는 성스러운 불꽃을 지나가게 되면 영혼이 정화돼 천계로 가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그것이 구제입니다." "이 미친것들, 그런 식의 자기합리화는 가당치도 않다!" "무슨 말씀이신지? 베스타란트와 똑같지 않습니까, 학살자 폐하." 분노에 일그러진 라인하르트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 잡담은 이 쯤 하고, 저희는 슬슬 희망으로 가득한 별세계에 가려고 하니 문을 열어주시지요. 아, 폭탄의 제한시간 말입니다만…" 드 빌리에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능청스레 손목시계를 풀어 카메라 앞에 가져다 놓았다. "
앞으로 27분 남았습니다. 폭탄 처리반이 지금 당장 폭탄 앞에 도착해서 해체 혹은 정지를 하려해도 시간이 모자라겠지요. 물론 입원
환자들의 피난도 시간이 부족하겠지요. 자, 이제 서두르시죠? 이것 말고도 다른 곳에서 두어개 시한폭탄이 폭발할 겁니다." 라인하르트는 열화와 같은 시선으로 모니터에 비치는 광신자를 째려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폭탄의 위치와 해제코드를 송신하겠다는 건 거짓이 아니겠지?" 그 말에 대주교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물론이죠. 설치 장소는 하나도 빠짐없이 제 휴대 단말 안에 저장해 뒀습니다." 하고 그는 가슴의 포켓에서 작은 단말을 꺼내 황제에게 보여줬다. "'설치장소는.'이라니, 그렇다면 해제코드는?" 대주교는 모니터 너머로 히죽히죽 웃으며 왼손으로 휴대 단말을 집어넣고, 오른손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제 머릿속입니다. 그러니 성급한 행동은 삼가 주시길. 이것은 게이트를 통과한 다음에 송신하겠습니다. 자, 남은 시간은 24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인하르트의 침묵은 잠시뿐이었다. 곧이어 그는 부하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고, 동시에 지구교도들이 탄 배의 전방에서 빛을 발하던 소환게이트가 확 하고 커졌다. "
네놈들의 요구대로 20m까지 확대시켰다. 통과를 허가한다…다만 그 뒤의 일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것이다. 너희는 마법세계에
대해 과한 기대를 품고있는거 같다만 그 별은 결코 낙원이 아니다. 그리고 너희들의 일은 이미 사하라의 엘프들에게 전해졌다. 고로
게이트를 통과하고 나면 현지의 아인들과 메이지들에게 쫓기게 될 거다." 게이트의 확대를 확인한 대주교는 라인하르트의 충고를 한귀로 흘려들으며 주변의 부하들에게 차례로 지시를 내렸다. 한두가지 지시를 마친 그는 다시 황제를 보고 돌아앉았다. 승리의 여운을 만끽하면서. "
걱정 마시길. 폐하의 보호정책 덕분에 은하제국과 소환게이트는 사하라와 할케기니아 이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요. 그렇다면 그 너머는
어떨까요, 대충 남 아메리카 근처쯤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 별은 우리 지구교도가 추구해온 성지, 그 성지를 진심으로 신앙하는
우리들을 그들은 따뜻하게 반겨줄 겁니다." "그 지구가 아닐 텐데. 그리고 총으로 위협한 환영이 환영인가?" "세계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 사도(使徒)의 의무. 그들에게 과학이라는 또 하나의 진실을 전파하는 것이 바로 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렇게 독설과 비아냥거림으로 얼룩진 대화중에 엔진 소리와 기계 구동음이 섞여오고, 주변의 오퍼레이터가 화물선의 메인 해치가
열리고있다는 보고를 해 왔다. 대주교는 곁눈질로 통신 화면 너머, 열리는 해치의 틈새로 비쳐 들어오는 소환게이트의 빛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말로 항복할 생각은 없나? 지금이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드 빌리에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악의가 뒤엉킨 홍소가 사령실을 울리고, 표면뿐인 경의도 사라진채 성직자는 썩은 그 본석을 드러냈다. "
이봐, 그렇게도 지는 것이 싫어? 앙? 억울해? 무패의 천재가 경험하는 첫 패배가 그렇게 싫어? 왜, 지금 당장 추적대를 편성해서
보내려고? 안되지 안돼, 소용이 없지. 우리는 곧 판타지세계로 몸을 숨길거거든. 그리고 발견한 뒤엔 이미 때가 늦어. 왜냐하면
과학과 마법을 융합한 무적의 군대가 옥좌에서 거들먹거리는 금발꼬마를 지옥에 쳐 넣을 거거든. 하하하하하! 다시 만날때가
기대되는군!!" 말이 끝나자마자 대주교는 통신을 끊었다.
《뭐 하는 거야 당신들!? 빨리 도망쳐! 긴급 이송 슈터도 곧 있으면 격벽으로 닫혀버린다고!》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의사는 여전히 기구를 다루며 환자를 보고 있었고, 랄카스도 치유마법의 영창을 그치지 않았다. 《안 돼.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제3뇌실에 파고든 파편을 꺼낼 수 있어. 뇌출혈만 멈춘다면 이 환자와 함께 탈출하지.》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라니까!? 자기가 죽어버리면 아무것도 안된다고! 빨리 도망치란 말야!!》 《안 돼!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를 내버려둘 순 없다!》 하고 랄카스는 치유 마법의 영창을 시작했고, 옆의 의사는 스코프에 눈을 댄 채 이사벨라에게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진 모르겠다만 대강 예상은 간다. 다른 녀석들은 이미 대피했으니 너도 어서 가라. 우리는 이, 이 처치가 끝나면 간다." "NEO…NEOHUIDEUL…(너…너희들…)" 온몸에 진땀을 흘리고 있는 간호사도 서툴게 입을 열었다. 《나, 나는 도망칠 수 없다. 환자를 두고 도, 도망치면, 지는, 지는 거 같아서.. 아하하하, 나는 바보.》 세 명 모두 죽음의 공포로 얼굴이 굳어있으면서도 자리를 뜨지 않자 《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 진짜, 이 사람들이 정말!!!》 하고 외치곤 환자의 머리를 향해 지팡이를 들었다. 그러자 메인 모니터에 제3뇌실의 뇌척수액 속을 떠다니는 파편이 나타났다. "PAPYEON, 'YEOMSA'RO BICHUNDA! YAMAMURA, PAPYEON BBARANAE!!(파편, '염사'로 비춘다! 야마무라, 파편 빨아내!!)" 하지만 떠다니는 파편이 빠르게 움직이는지 이사벨라의 지팡이가 빠르게 움직인다. 이에 야마무라라 불린 의사는 수술용 기계팔을 바삐 놀려 파편을 빨아들이고 이에 동반된 출혈을 랄카스가 치유마법으로 막았다. "석션 완료! 봉합한다!!" "네!!" 그 말에 의사와 간호사가 각각 조작하던 기계팔이 뒤로 물러나고 그와 동시에 치유마법이 발동하여 훤히 드러난 환자의 두개골이 순식간에 원상 복구되었다.
처치를 마친 랄카스가 다른 룬을 외우고 큰 도끼를 들어 수술실에 있는 전원을 향해 찔렀다. 그러자 환자를 포함한 모두가 공중에 떠올랐다. 《뭐 하는 짓이야!?》 《이러는 게 더 빨라.》 하
고 랄카스가 병원 복도를 폭풍과 같이 뛰쳐나갔고, 이 뒤로 의사와 간호가, 환자, 이사벨라가 떠내려갔다. 랄카스는 복도에 있는
수레나 수액대, 침대같은것이 부딪히는데도 개의치않고 이를 뛰어넘고 걷어 차고 때때로 벽을 부수면서 질주했다. 밀폐된 무균실의
유리를 뿔로 들이받은 랄카스는 총알처럼 병동의 복도로 뛰쳐나갔고, 그의 시야 끝엔 바깥의 혼란한 상황이 보이는 병원 창문이
있었다. "날아간다!" 하고 다른 사람들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미노타우로스가 창문을 향해 내달렸다. 현관홀에 점한 4층 창문을 향해서. 쨍그랑-! 으와아아아아아아아앙아ㅁ좆대ㅑ홈짐자ㅓㅠㄷㅅ히ㅑ쇼배ㅜ… 이사벨라의 비명이 허공을 헤엄치고, 훤히 트인 공간을 인간과 환수가 낙하해왔다.
쿠당탕! 한순간의 자유낙하 후, 랄카스는 병원 앞 부지에 착지했다. 마법도 쓰지 않고 자신의 다리만으로 4층에서 떨어진 거구를 받아낸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떨어지는 넷을 마법으로 받아냈다. 《괜찮아? 별 탈 없으면 이대로…》 눈이 빙빙 돌고 있던 의료진들에게 말을 걸던 랄카스의 입이 멎었다. 머리위에서 비행하던 물체를 발견해서였다. 그것도 전속력으로 피난하는 것이 아닌, 병원을 향해 강하해온 것이었다.
지구교도들이 탄 배는 화물실의 해치를 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강습 강하정은 사출되지 않았다. 해치가 어정쩡하게 열린 채 멈춰버렸기 때문이었다. 살짝이 열린 해치 너머로 소환 게이트의 빛이 비쳐왔다. "무슨 일이냐! 왜 해치를 열다 마는 거냐!?" 콕피트에서 나온 대주교의 힐문에 오른쪽 옆에 앉은 남자가 큰 소리로 답했다. "해, 해치가 열리지 않습니다!!" 남자는 필사적으로 제어판의 버튼을 조작했다. 하지만 강철 문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는 문제없이 움직이던것이 갑자기 멈춰 선 것이다. "제길, 이럴 때 고장이라니! 어쩔 수 없지, 포격으로 파괴한다. 발진한 다음엔 예정대로 제플입자를 살포, 소환게이트를 통과하면 배의 자폭이다." 남자는 소형정에 탑재된 레일건의 조준을 맞추며 손잡이를 쥐었다. 그때, 왼쪽에 앉아있던 여자에게서 절망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제…제플입자 발생장치가 반응하지 않습니다. 지시를 몇 번이고 입력해도 전혀 응답이 없습니다!" "뭣…!?" 신음하던 드 빌리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패널로 뛰쳐나와 배와 소형정의 상태를 체크했다. 모니터에는 배의 메인 컴퓨터와 강습 강하정의 컴퓨터에서 송출된 내용이 표시되었다. "이…이럴 수가…!?" 대주교가 외치고, 좌우의 남녀도 이를 보고 경악했다. 여자의 새된 비명이 다시 터져 나왔다. "레이더가, 3차원 레이더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선외 모니터도 영상이!" 해
치를 개폐시킬 모터가 동작하지 않았다. 레이더의 안테나가 파손됐다. 카메라도 소실됐다. 제플입자 발생장치는 소형정의 지시를
받아들일 통신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들이 소형정으로 옮겨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배가 갑자기 고장부위를 표시하는
붉은 점으로 물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그 어떤 포격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생각도 못 할 것이다. 열려있는 문 너머,
20m정도로 확대된 소환 게이트의 앞에 또 다른 광원이 있다는 것을. 그들이 타고 있는 화물선의 외벽, 해치 근처엔 빛을 발하는
거울같은것이 떠 있었다. 그것은 '허무'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시공의 구멍─'세계문'이었다. 그 작은 구멍을 통해 선내를 훔쳐보는 미녀들이 있다는 것을 광신자들은 알지 못했다.
"OK, 엔진도 파괴했어." 브륀힐트의 에어록, 작업용 메카의 콕핏 내에서 루이즈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저들은 움직일 수 없겠군요." 조종간을 쥔 프레데리카는 지구교도들이 탄 화물선의 입체도를 여러 각도로 돌려가면서 내부 구조를 루이즈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앞으로 2분정도 '세계문'을 유지할 수 있어요. 다음은 어디를 망가트릴까요?" 콕
피트 밖을 향해 작은 지팡이를 든 티파니아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 왼손에는 낡은 책-시조의 기도서가 펼쳐져 있었고, 지팡이를
든 오른손엔 갈색의 반지-한때 죠제프가 소유하고 있었던 갈리아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흙의 루비가 반짝였다. "그럼 이대로 산산조각을 내 버리는 건 어때~?" 역시 즐겁다는 듯 말하는 루이즈의 오른손에도 물의 루비가 끼워져 있다. 그리고 루이즈의 눈앞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굴도 있는것은 갈리아 왕가의 비보인 시조의 향로였다. 루이즈가 룬을 외우고, '익스플로전'은 콕피트 너머 티파니아가 만든 작은 '세계문'을 지나 공기를 배출하고 있는 화물선과 그 안의 강습 강하정을 향했다. 화물선과 강습 강하정은 순간, 강렬한 빛에 휩싸였다.
라
인하르트가 '필요한 것이 잇다면 곧바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한것. 그것은 이제르론 요새에 보관 중이던 시조의 비보였다. 그리고
시공에 구멍을 뚫는 마법 웜홀인 '세계문'은 티파니아가 이제르론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현했다. 그녀가 향수병에 걸리기
시작했을 무렵, 시조의 비보가 그 마음에 응답한 것이었다. 현재 티파니아의 마력으로는 차원의 문을 넘어 트리스테인으로 갈 수 있는
웜홀을 열 수는 없었다. 웜홀을 열기까지 마력이 어느 정도가 필요한지도 불분명했고, 설령 열렸다 하더라도 그 좌표가 소환
게이트와 상당량이 달라져 있어 다시금 방대한 좌표 계산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티파니아의 '세계문'은 할케기니아로 향하는
지구교도를 추적할 수 있을정도로 짧은시간동안 작은 구멍을 만드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빛이 사라지자 강습 강하정의 콘솔은
연기와 스파크를 내뿜고 있었다. 화물선과 연결된 고정 장치 겸 사출장치도 산산조각이 났고, 강하정의 레일건과 그들이 세계정복을
위해 잔뜩 싣고 있던 무기들도 죄 고철덩어리가 됐다. 대주교를 포함해 콕피트에 앉아있던 세 사람과 뒷자석에 있던 다른 지구교도가
소지한 블라스터도 방아쇠가 부러져 있었다. 화물선과의 연결이 끊어진 강하정은 무중력의 화물실 내에서 공허하게 떠다닐 뿐이었다.
"이야-역시 무중력은 재밌다니까. '플라이'를 쓰는 것 만으로 금방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 말이죠. 거기다 이렇게 커다란 배를 내 손놀림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건 상당한 쾌감입니다." 강
하정 옆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진공 속에서는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은 헬멧에 부착된 통신기를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 뿐이었다. 갑자기 화물실 내의 공간의 일부가
비틀리며 주름이 잡히고, 아무것도 없었을 허공에서 우주복으로 몸을 감싼 콜베르가 튀어나왔다. 그의 왼손엔 입은 사람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마법의 망토, 과학적으로 말하면 광학미채 카모플라주가 들려있었다. 우주복을 입은 콜베르는 게이트를 빠져나와 전열함의
거체와 투명 망토를 이용해 몸을 숨기면서 '플라이'를 사용해 지구교의 화물선에 접근, 해치가 열린 틈을 이용해 잠입했던 것이다. "자, 이제 슬슬 나와 주시죠?" 콜
페르가 지팡이를 흔들자, 그 손놀림에 맞춰 강하정이 요동치고 동시에 중간에서 멈춰 섰던 화물실 문도 루이즈에의해 폭파됐다. 이
행동에 지구교도들은 배와 궤도 캡슐 바깥으로 방출됐고 그런 그들을 구축함의 거대한 해치가 반겨주었다. 소환 게이트 주변에 정박
중인 전열함 중 한척이 대열을 이탈해 화물선에 접근한 것이었다. 꿀꺽. 이란 의성어가 딱 들어맞게끔, 강하정과 콜베르와
티파니아가 만든 작은 소환 문이 구축함의 화물실로 빨려 들어갔다. 구축함의 해치가 닫히자 밸브로부터 폭발적으로 공기가 분출되고,
기압이 차례로 높아져 간다. 강하정 콕피트 근처에 작은 광구가 생겼다 사라지고, 그 천장이 둥글게 파여져 내부가 노출되자 "확보하라-!!!" 는 지휘관의 외침이 울려 퍼졌고, 이와 동시에 화물실 내에서 대기 중이던 장갑척탄병이 돌격해 강하정내 광신자들을 차례로 끌어 내렸다. 대주교 드 빌리에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단말기도 확보하였다. "이거다!" "비번을 풀어서 폭탄의 위치를!" "해제코드가 있는지도 확인해라!" 몇몇의 외침과 함께 단말기는 데이터 분석을 위해 화물실에서 긴급히 실려 나갔다.
"휴우. 수고했어, 티파. 이제 괜찮아." "후우…제대로 했던 걸까요?" 프레데리카의 말에 티파니아가 지팡이를 내려놓았고, 동시에 소환문에 사라졌다. 화물실 내에 공기가 어느 정도 차 오르자 콕피트 내에서 라인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잘 했고말고. 티파도 루이즈도 멋지게 해 냈다." 모니터에 투영된 라인하르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루이즈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 보였다. "이 정도쯤이야 간단한 일인걸요. 맡겨만 주세요!" "물론이다. 그럼 브륀힐트에서 잠시만 쉬고 있어라. 이제 폭탄은 이쪽에서 처리하지." 황제와의 통신이 끊어진 직후, 좁은 콕피트에서 여성들의 환호성이 울렸다.
철컥. 장갑복을 입은 강건한 남자들에게 온몸을 옥죄어 바닥에 내팽개쳐진 대주교의 머리로 블라스터의 총구가 닿았다. 장갑척탄병중 하나가 분노에 찬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해제코드를 말해라." 하지만 대주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음습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총구가 관자놀이에 박힐정도로 눌려지고 광신자의 머리도 바닥으로 밀쳐졌다. "이게 마지막 경고다. 해제코드를 말해라. 말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큭큭큭큭…하고 작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까도 말 했지만, 그 단말기 안에는 폭탄의 설치장소 뿐이고 해제코드는 나밖에 모른다. 덧붙여서 그 폭탄은 액체질소를 끼얹는 것 만으로 멈출수 있는 싸구려 온도센서를 붙여놨다." 음침한 눈이 콕피트의 시계로 향했다. "남은 시간은 10분." 장갑척탄병들의 가슴에 솟은 분노는 그대로 그들의 온 몸으로 표현됐다. 대주교의 모든 관절과 뼈에서 삐걱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도무지 귀염성이라곤 없는 광신자가 흘리는 비참한 신음소리가 화물칸을 감돌았다. "이대로 핵이 폭발한다면 너는 그 즉시 죽는다. 물론 편하게는 못 죽어. 그러니까…말해! 당장!!" 방아쇠가 천천히 당겨지고 드 빌리에의 입이 조금씩 열렸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는 "금발 꼬마놈! 지옥에서 기다리겠다!!" 하고 말이 끝나자마자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행동이었기에 병사들은 그를 제지시킬 수 없었고, 어금니에 장치된 폭탄은 광신자의 머리를 부숴버리고 그 속에 들어앉은 피와 뇌수를 병사들의 장갑에 흩뿌렸다.
이
제르론 중앙병원 근처에 착륙한 소형기는 병원 현관 앞에 폭탄 처리반을 내려놓고 눈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사벨라와 의료진, 환자를
수용했다. 랄카스의 거구가 좁은 입구에 걸려 버둥거릴 동안 다른 기체는 홀 상공에서 체공하거나 병원 주위를 선회하면서 병원 이외의
장소가 지목된다 하더라도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다. 착륙한 기체의 조종사가 마이크를 움켜쥐고, 이사벨라 일행을 수용하기위해 내팽개쳐진 군장을 정리중인 폭탄처리반을 향해 통신 내용을 전파했다. "폭탄 위치 파악! 병원 지하의 창고의 대형 컨테이너 No.21498DAT! 산소 탱크로 위장돼 있으며 폭발까지는…7분! 해제코드는 불명!!" 이
와 똑같은 내용의 통신이 폭탄 처리반의 귀에 걸린 통신기에서도 들려왔다. 그들의 시선은 동시에 옮겨져 병원 옆에 있는 커다란
셔터, 차량용 입구로 향했다. 중장비를 둘러맨 그들이 달려 나가려는 순간 뭔가가 땅을 울리며 폭탄 처리반을 앞질러 나갔다. 크오오옹오오오아아아아아아아아아!!!! 병원 앞에서 야수가 포효한다. 지축을 뒤흔드는 포효였다. 병원 옆의 차량용 입구로 강하하기 시작한 다른 기체에서 자동차수준의 속도로 창고를 향해 질주하는 미노타우로스가 보였다. 와장창! 전
자 록으로 잠긴 철제 셔터가 랄카스의 도끼질 한방에 찢겨져 나갔다. 그렇게 몇 번 도끼가 휘둘러지자, 그의 거구가 들어갈만큼 큰
구멍이 뚫렸고 그는 셔터의 파편을 적당한곳에 던진 뒤 창고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달려오는 대원들의 목소리는 울려퍼지는 요란한
경보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차량용 통로를 지나 창고 안에 뛰어든 랄카스의 핏발 선 눈이 대형 컨테이너를 찾는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미노타우로스의 육체는 야간투시경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어두컴컴한 창고 안을 똑똑히 바라 볼 수 있었다. 소의
눈이 컨테이너 번호를 읽어나가고, 폭탄 처리대원들이 창고에 들어왔을 때쯤 찾고있던 컨테이너를 발견했다. 그는 곧장 컨테이너의 문을
열려고 했지만 여기에도 전자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물론 비밀번호는 알지 못했다. 콰직! 도끼가 다시 한 번 휘둘러지고, 격렬한 불똥이 사방에 흩날렸지만 문은 약간 찌그러졌을 뿐 별 흠집은 나지 않았다. "그럼 문을 폭파하지! 잠시 떨어져 있어!" 후방에서 그를 따라온 폭탄처리대원중 한명이 말했고, 랄카스가 순식간에 컨테이너에서 물러섰다. 대원들은 문 곳곳에 폭약설치한 뒤 곧바로 물러서서 엄폐물 뒤로 숨었다. "3, 2, 1, Feuer!" 폭약이 작렬하고 섬광이 창고 안을 밝혔다.
연
기가 걷히자 문은 크게 부서져 간신히 컨테이너에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랄카스는 순식간에 컨테이너로 걸어 나와 아직 열이 식지
않은 강철문을 자기 손에 화상을 입는것도 개의치 않은채 움켜 쥐고 창고 속 빈 공간으로 던졌다. 컨테이너 안에는 어른 몸만한
거대한 봄베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남은 시간 4분! 대피 불능! 격벽 폐쇄에도 시간을 못 맞춥니다!!" 대원 중 하나가 비명 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그때, 대원들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들의 머리를 뛰어넘었다.
그 사람은 컨테이너 안에 뛰어들어, 왼손에 빛나는 무언가에 의지한 채 용기를 차례차례 만졌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만졌을 때 그가 외쳤다. "찾았다! 지금부터 해체하겠다!" 그
목소리는 랄카스를 비롯해 그 누구도 들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찌되던 상관이 없었다. 대원들과 랄카스는
작업에 방해되는 봄베들을 치워내자 거기엔 어느 한 봄베와 그것을 조작하는 인물의 윤곽이 있었다. 폭탄의 모니터에는 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카운터와 같은 숫자가 표시돼 있었고, 그 숫자는 시시각각으로 줄어가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창고 안의 더 어두운 컨테이너
속, 어째선지 양복 차림을 한 남자가 봄베에 달린 제어기기를 조작했다. "남은 시간 3분!…저기 당신, 해제코드를 알고 있는건가!?" 대원의 질문에 그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앞으로 수 분 후에 작동할 핵무기를 앞에 두고서 "아니, 지금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라며 태평하게 답하고는 오른손으로 패널을 이래저래 만졌다. 그제야 대원들을 그의 왼손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왼손에 지닌 것은 긴 쇠막대였지만 그것이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빛나고 있는 것은 왼손 장갑위로 떠오른 빛나는 룬 문자였다.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다.'라…하긴, 핵병기도 무기는 무기지." 봄베에 걸쳐진 장검이 챙챙 거리며 소리를 냈다. "근데 말이다, 아무리 내가 '무기에 손을 대면 그걸 대부분은 다둘 수 있게 된다.'고 말은 했다만 해제의 주문을 찾으려 할 줄이야, 이거 참 놀랍구먼." "잡담은 거기까지. 자, 가끔씩 이런 자원봉사도 해 봐야겠지!" "그럼!!" 양의 룬과 델브링거의 도신이 빛을 발했다. 그
들은 폭탄 처리반과 함께 병원에 급파됐다. 해제코드를 얻지 못한 경우, 핵을 요새 밖으로 배출하는 등의 차선책을 시도할 시간마저도
부족하게 될 것을 우려한 보험이었다. 사실 해제코드를 알게 됐더라도, 그리고 그 코드를 입력해도 괜찮다는 것이 판명됐더라도
광신자가 세계에 가진 악의를 완전히 지워내는것은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양과 델브링거가 마주한 사태가 그 결과인
것이다. "어…저기, 델 군…" "이, 이럴 수가…이렇게 썩어빠진 것들은 처음 본다!" 그 말에 주변에서 양과 델브링거의 외침을 들은 랄카스와 대원들의 위장이 불길함에 비틀렸다. 그런 주위의 분위기는 아랑곳않고, 양은 해제 코드를 입력했다. "큭, 그래도 할 수밖에 없나…아 진짜, 이 일이 끝나면 황제폐하께 무조건 보너스와 그 보너스의 보너스를 타내야겠어. 연금도 제국 예산으로 청구해야겠군. 만일 안 해준다면 내 다시 이런 거 하나봐라!!" 양의 손이 고속으로 패널을 두들겼지만 그 입력이 끝날 기세는 보이지 않았다. 랄카스가 조심스레 장검에게 물었다. "저…해제코드를 알아내신 겁니까?" "아- 그럼, 알았고말고. 아 *발, 이따위로 길어빠진 문장이라니, 폭발하기까지 억지로라도 다 쳐 주겠어!!" "!!!" 랄카스뿐만 아니라 대원들 가운데에서도 함성과 비명이 나온다. 대원 한명이 정보 단말을 꺼내들었다. "코드를 알려줘! 이쪽에서도 입력해 보겠다!" "무리" 간달브의 룬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양이 답했다. 그의 손놀림은 룬의 육체강화를 최대한으로 이끌어 낸 덕분에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였다." "이거, 패널 이외의 조작은 불가능해. 단자고 뭐고 죄 막혀있거나 부서져있거든." 그 말대로 핵폭탄의 제어장치에는 터치패널 이외에는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았다. 코드를 전송할 수 있을만한 구멍도, 적외선이나 레이저 수신부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를 분해해 직접 컴퓨터에 연결할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어찌됐건 손으로 입역할 수밖에 없어. 미안하지만 카은트가 얼마 남았는지 말해주지 않겠어?" "ㅇ, 알았다! 82, 81, 80, …" "델 군! 입력 오류를 체크!" "어이, 방금 하나 틀렸어!" "다른 사람들도! 폭탄을 해석해서 다른 해제방법이 없는지 확인해 줘!" 즉시 그 자리에 있는 전원이 몸을 움직인다. 양을 방해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기기가 폭탄 주위에 놓여 몇개의 모니터가 빛을 발했다. "투과 개시, 결과 화면에 띄우겠습니다!" "어딘가 이걸 버릴만한 쉘터는 없어!?" "기폭장치 위치는!?" "메인 컴퓨터에 직통회선을 보내! 사령부에 해제방법을 찾도록 시켜!!" 그러는 동안 핵폭탄에 달린 모니터엔 양이 입력하는 문자열이 고속으로 흘러나갔다.
Tibi Cherubim et Seraphim incessabili voce proclamant Sanctus:Sanctus:Sanctus Dominus Deus Sabaoth Pleni sunt caeli et terra majestatis glori…
그것은 서기의 시대, 기독교에서 신을 찬미하는 노래 중 하나인 그레고리오 성가의 일부였다. 그 뿐만 아니라 켈트 성가, 모자라베 성가 등등 대량의 노래 가사가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로 입력됐다. "신의 세계로 떠나는 사람을 위한 노래란 건가…유감이지만 나는 아직 바보 브리밀 녀석의 낯짝을 보고싶은 마음이 없거든." 너스레를 치면서 양이 패널을 두드렸다. 폭포와도 같은 땀을 흘리면서.
이 광경은 사령실의 메인 모니터에도 나오고 있었다. 비명 섞인 소리가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
서둘러라! 검색은 아직 끝나지 않았나?" "시간이 부족합니다!" "격벽을 폐쇄해라!" "안됩니다! 아직 대피를 마치지 못한
민간인들이 있습니다!" "상관없다, 닫아라!" "안됩니다! 아직 사람들이 남아있단 말입니다!!" "닫으라면 닫아! 이대로라면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 "사고 발생! 대피하는 인원들 사이로 차량이 돌진해 사상자 다수 발생입니다!" 사령부에 퍼지는 노호성과 비명은 점점 이성이나 지성에 기반을 둔 냉정을 잃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격벽, 탈출용 슈터, 엘리베이터 주변에서 일어나는 비극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었다.
그곳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현
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는 자, 남을 밀어젖히고 앞으로 달아나는 자, 인파와 차량에 짓눌려 움직일 수 없게 된 자, 손을
놓쳐버린 아이를 찾아 헤메는 부모, 울부짖는 아이, 벽에 충돌하여 불타는 차, 사람을 가득 실은 엘리베이터의 문에 손이 끼여
내쳐진 여자… 그곳에 보이는 것은 문명인의 이성도 지성도 아닌 그저 살아남기를 요구하는 동물의 본능이었다.
라인
하르트는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할 수 있는 모든 지시를 내린 그에겐 더 이상 소리를 지르거나 팔을
휘두르며 바렌과 캬젤느에게 내릴 지시가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황제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부하들에게 안심감을
주기위해 평정을 가장하는것 뿐이었다. 양이 고속으로 입력하는 코드가 시간내에 다 쳐질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메인 컴퓨터가
다른 정지 방법을 표시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혹은 한명이라도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그는 몰래 주먹을
쥐었다.
41…40…39… 대주교의 단말기를 해석한 결과와 폭탄의 모니터 상에 뜬 카운트가 같은 시간을 가리킨다. 그것은 시간의 여신이 인간의 생사 따위에 아랑곳않고 냉철하게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런 젠장, 10초, 아니 5초, 3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이대로라면 시간에 못 맞추겠어!!" 27…26…25… 카운트가 계속된다. 양
의 손놀림이 느려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룬의 빛은 점점 커져갔고 그에 따라 인간을 초월한 힘을
그에게 주었다. 그 덕분에 본래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속도의 입력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시간 내에 입력을
마치는것이 불가능하다. 앞으로 십수초 내에 폭탄이 폭발한다. 카운트가 줄어듦에 따라 양에게서 흘러 넘치는 땀의 양은 증가하고
있었다. 주위의 대원들도 필사적으로 해제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때 모니터를 응시하던 대원이 큰 소리를 냈다. 사령부에서 해제
방법에 대한 회답이 온 것이다. "답신! 기폭장치만을 파괴할 것…! 지금와서 어떻게!?" "그럼 그 방법을 말해! 빨리!" "큭, 통신 상태가…!!" 사령부에서 통신이 왔으나 그 해제방법의 수신이 잘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기다 델브링거의 절규에 대원들은 더더욱 낯빛이 흐려졌다. "무리! 그 주변에 뭐 하나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그대로 폭발이야! 절-대로 안 돼!!" 장검의 속사포 같은 체념에도 아랑곳 않고 카운트는 비정하게 진행돼 갔다. 13…12…11… 대원들 사이에서 비명과 기도와 가족에게 이별의 말, 싫어하는 상사와 동료에 대한 욕설이 퍼져나갔다. 그런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그 절망을 씻어 없애려는 것 마냥 큰 소리가 들렸다. "기폭장치는 어느 거냐??" "뭐?" "어느 거냐고!!" 질문을 받은 대원이 서둘러 모니터에 표시되는 폭탄의 투과 사진을 가리켰다. "이거다!" 다른 대원들도 산소통으로 위장된 열핵병기의 바닥엣 약 15cm위를 가리켰다. 6…5…4… 소 인간이 바닥에 내려놓았던 큰 도끼를 꼬나 쥐었다. "다들 비켜어어어어어-ㅅ!!!" "으아아악!" "어, 어이, 그만둬!!" "건드리면 안돼애애-!!" '이 무식한 소**!!" 하고 외치면서 당황한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후웅! 하고 거대한 도끼가 공기를 베어 갈랐다.
카운트는 0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양의 손가락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3
2
1
0 카운터가 0을 가리켰다. 대원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기도와 저주와 이별의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양은 여전히 코드를 입력하고 있었다. 카운트가 0이 된 줄도 모르고.
그렇다. 카운터가 0을 가리켰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지 않았다. 핵무기는 폭발하지 않았다. 도끼는 봄베형태의 핵무기를 내리쳤다. 아니, 정확하게는 핵무기의 약간 앞을 내리쳤다. 그리고 기폭장치를 향해 내려쳐진 도끼형 지팡이가 실린더를 향해 빛을 발했다.
"입력 완료! 어떻게 시간에 맞췄다아아!!!" 뒤늦게 환호를 토해낸 그가 기쁨에 떨면서 대원들을 보자 그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어…저기 뭔가 문제가……??" 그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마치 카운트가 0이 된 순간에 시간의 흐름에서 분리된 듯 그 자리 그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뒤 델브링거가 철컥, 하고 소리를 냈다. "해제 성공…이긴 한데 이거 놀랍구만…「연금」이라니…" "뭐? 「연금」이라니…아! 랄카스 씨!!" 양이 이름을 외친 미노타우로스 메이지는 천천히 몸이 뒤로 쓰러지고 있었다. 도끼가 덜커덩하고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해…해냈다…「연금」으로 기폭장치를 흙으로 바꿨어…" 거대한 소의 입에서 격한 호흡과 함께 나온 할케기니아 어. 그 말은 제국 공용어로 된 합성 음성으로 변환돼 술의(術衣)의 목덜미에 있는 스피커로 흘러나왔다.
「연금」 과
학적으로는 굉장히 어렵고 위험한 기술인 '원소 변환'. 막대한 에너지 소모와 방사능 오염을 대가로 한 물질을 다른 물질로 바꾸는
행위지만, 할케기니아에서는 '흙' 계통의 기본이 되는 마법이며 어린시절에 습득을 끝낸 메이지도 많은 간단한 마법에 불과했다.
댓글